#57.
달빛도 비치지 않는 새벽.
웬 기우뚱한 걸음걸이가 뒷마당을 가로지른다.
“…….”
슬리퍼를 느릿느릿 끄는 모양새가 꼭 다리를 저는 사람 같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든 권채우를 놔두고 몰래 빠져나온 이연이었다.
쾌감의 끝은 오르가슴이 아니라 근육통이다. 특히나 큼직했던 것이 밑을 질리게도 드나들었던 바람에 아직도 구멍 주위가 뻐근했다. 여전히 그가 들어와 있는 듯한 이질감이, 첫 섹스의 순간을 자꾸만 끄집어 올렸다.
권채우의 눈빛, 그가 내뱉던 억눌린 신음, 비벼지던 살갗, 차지게 마찰되던 소리, 습했던 공기 같은 것들을……. 방심하지 않으면 모든 감각이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휴우…….”
나무 스툴에 앉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털었다.
‘사고 쳤다……. 진짜 사고 쳤어.’
오롯이 혼자가 된 지금에서야 이연은 무너지듯 마른세수를 했다. 거뭇거뭇한 눈에는 극심한 피로가 몰려 있고 울상인 얼굴은 창백했다.
권채우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그 마음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으니까.
“…….”
이연은 핸드폰 액정을 켜고 화면에 띄워 놓은 웬 이름 하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권기석. 벌써 몇십 번이나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그녀를 수신 거부한 남자.
속에서 천불이 터졌지만 엄밀히 말해 일을 여기까지 키운 건 권기석의 장난질 따위가 아니었다.
권채우와 몸까지 섞고 난 후에야 왜 그때 추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등짝을 두들겨 팼는지 알 것 같다.
추자가 우려했던 대로 이미 이 사기극에는 감정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권채우 씨, 약속 하나만 해요. 절대로, 기억은 찾지 않겠다고요. 절대로요.’
그러면 나도 그럴게요.
다시는 떠올리지 않을 거예요, 기억하지 않을게요.
그녀가 눈을 다시 떴을 땐 어떤 비뚤어진 결의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연은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손수건을 펴자 회색의 얇은 줄 하나가 보였다. 2년 전부터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물건. 현재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권채우의 유일한 소지품.
“…….”
그가 산속에서 이연을 공격했을 때 사용했던 차갑고 뻣뻣한 줄이었다.
이연을 죽일 뻔했던 그것.
‘공장에서 쓰는 건가? 꼭 알루미늄 줄처럼 얇은데, 단단하고 탄력적이야…….’
그러나 이연이 라이터를 켜는 순간 일말의 궁금증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나도 그럴게요. 다시는 떠올리지 않을게요.
잘못된 길이라는 듯 심장이 거세게 뛰었지만 마침 그녀를 꽉 옭아매 주는 넝쿨이 있었다.
조금 사납기는 하지만 이연에게는 지극한 권채우. 그녀가 없으면 잠에서 깨지도 못하는 불쌍한 권채우. 신나게 사냥하고 주인 눈치나 보는 황당한 권채우. 이대로 영영 버림받을까 걱정하는 권채우. 그녀가 키우게 된 식물인간 권채우. 그 갈래 하나하나가 이연의 흔들리는 마음을 묶어 주었다.
그녀는 불에 닿아 새까맣게 곱아드는 줄을 땅바닥에 던지고 흙으로 덮었다.
“……약속한 거예요.”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기어이 태워 버린 밤이었다.
* * *
“이연 씨, 이제 일어나야죠.”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단한 몸을 깨운다. 그러나 오늘따라 더욱 일어나기가 싫어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커피 향이 솔솔 났다. 까칠하지만 섬세한 손이 잔머리를 살살 쓸어 넘겨 준다.
간신히 눈을 뜨자 트레이에 담긴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권채우가 보였다.
“잘 잤어요?”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매가 조용히 호선을 그린다.
“어…….”
창가에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시폰 커튼을 넘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기이한 정적 끝에, 이연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밝은 빛 아래에서 그를 마주하는 게 죽을 만큼 부끄러워서, 이연은 다시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그 안에 숨어 버렸다.
권채우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다짜고짜 도망부터 치는 그녀의 행동거지를 몹시도 못마땅해 했지만, 몸에 배인 습관을 하루아침에 떨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떠 있을 때 시작했던 섹스는 밤이 돼서야 끝이 났다.
추자 씨에게 듣기로 여자의 첫 경험이란, 팔 할이 과대광고라 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달려들어도 황당하게 끝내는 게 전부일 거라고. 하지만 이연은 중간에 블랙아웃이 되었다.
‘……추자 씨, 이건 내가 황당하게 끝낸 경우인가요?’
기진맥진한 이연이 까무룩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뀐 후였다.
정액으로 끈적했던 몸은 보송했고, 찢어진 옷이 아닌 잠옷을 입고 있었다. 더러워진 침대 시트는 깔끔하게 사라졌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보이지 않았다. 난장판이었던 섹스의 현장은 온데간데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느 날의 침실만이 있었다.
그 상반된 분위기에 이연은 자신이 꿈을 꾼 건 아닌지 진실로 헷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권채우의 모습이 그 의심에 더욱 힘을 보탰다.
그러나 다리 사이에서 시작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그 순진한 생각을 단숨에 부수었다.
결국 모든 뒤처리를 그가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연은 얼굴이 홧홧해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연 씨.”
강한 힘에 의해 이불이 쑥 내려갔다. 부스스해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를 가린다.
매트리스를 짚고 상체를 숙인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연의 개똥 같은 입이 또다시 쓸데없이 터졌다.
“어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큰 신세를 졌어요……!”
그러자 무표정한 그가 어슷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이거 기분 묘하네요. 이불 들춰 보면 꼭 돈이라도 있을 것 같아요. 돌아갈 때 차비로 쓰라고.”
“……네?”
“이연 씨는 섹스한 다음 날에 이런 말부터 해요?”
“아, 아니……”
“의외네요. 날 조금도 만져 주지 않길래 서러워서 더 세게 박았는데.”
“…….”
“그게 좋았나 봐요, 이연 씨는. 무슨 신세까지야.”
이연이 입을 떡 벌리고 약 올라 하자 권채우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픈 데는 없어요?”
“없을 것…… 같냐, 요?”
아침부터 그녀의 속을 긁어 대는 남자가 미워 말이 부루퉁하게 나갔다. 이연은 목청을 가다듬었고. 권채우는 휘어 올라가려는 입술을 깨물고 괜히 눈썹에 힘을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맨정신에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요.”
“……뭔데요?”
이연이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이연 씨가 나한테 거짓말한 거요.”
“…….”
그녀는 면목이 없어 고개를 툭 떨구었다. 권채우는 또 그 모습이 안타까워 얼굴을 은근히 구겼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연은 손바닥으로 애꿎은 눈썹만 문지르고 있었다.
사연이야 어떻든 법적인 유부녀가 다른 남자를 소개받았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엔 이 정도로 커질 문제가 아니었는데, 권기석이 끼어들고 기함할 만한 서류가 등장하면서 이연은 순식간에 죄인이 되었다.
그것도 제 친부모의 전철을 밟을 뻔한 최악의 형태로. 자기혐오가 피부 아래서 벌레처럼 우글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연 씨가 무슨 수를 써도 소용없어요. 그 조그마한 손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나 못 뜯어낼 거예요. 그러다 이연 씨만 다치지.”
권채우가 이연의 머리카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그녀가 화들짝 어깨를 피했다.
“……그걸, 이연 씨만 모르는 것 같아서.”
별안간 낯이 딱딱하게 굳은 권채우가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역시나 피는 못 속인다는 삿대질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만 같다. 이연은 두 손안에 얼굴을 가득 감추었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따가운 통증이 번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연 씨.”
그가 몇 도나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라듯 불렀다. 그러자 지레 쭈그러든 이연이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며 웅얼거렸다.
“……그건, 그건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권채우가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주시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딴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에요. 그냥……, 궁금했거든요. 다른 남자들은 권채우 씨랑 어떻게 다른지. 다른 남자들 앞에서도, 내가 권채우 씨한테 가끔 그러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지. 나는 확인해야만 했어요.”
“…….”
“왜냐면, 나는 권채우 씨가 진짜……, 진짜…….”
이연은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조금 시간을 끌어야 했고, 권채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연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목울대가 자주 흔들리고, 입술을 핥는 꼴이 퍽 우스웠다.
“사람이라 생각하면 무섭고, 그런데 개라고 여기면 좀 괜찮고, 잘 때는 식물 같아서 눈길이 가고…….”
권채우의 눈썹이 왜인지 꿈틀댔지만 이연의 나긋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귀찮아 본 건 처음이에요. 권채우 씨 때문에 하루하루가 정신없어서 정말 성가셔요.”
“……지금 뭐라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파문을 만든다. 그때 권채우의 눈매가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우묵한 동공 위로 이채가 슥 지나갔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귀는 왜 빨개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