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158)

#48.

그,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싹한 기운이 그녀를 확 덮쳐왔다. 돌연 잿빛으로 변한 안색이 시꺼먼 바닷물보다도 절망적이었다. 이연이 터질 것 같은 가슴께를 누르며 후들거리는 무릎을 간신히 붙였을 때였다.

누군가 이연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쇳물처럼 들이 부어지는 불빛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얼굴에서 몸, 다리로 내려간 불빛이 이윽고 바닥에 잠잠히 머무른다. 그제야 이연은 눈을 깜빡이며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는 순경이었다.

“거기 누구십니까?”

“……네?”

이연이 필요 이상으로 흠칫 놀라자 순경의 눈이 미묘해진다.

“신분증 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왜, 왜 그러시죠?”

“그냥 절차상의 확인입니다. 밀항 단속 기간이라서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고 주춤대자 경찰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도와달라고 오히려 부탁해야 하는 쪽은 자신인데 이상하게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경찰한테 데인 게 많아도 너무 많아서.

조금씩 걸음을 물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내가 화이도의 경찰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이쯤 되니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조직원들이 시청 직원이니 경찰이니 했던 말들을 잘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뒷돈을 먹여 마약밭의 존재를 쉬쉬해 온 것으로 추측이 됐다. 그러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순경이 호루라기를 불며 맹렬히 쫓아왔다. 이연은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두드리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연이 먼저 봉고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다급히 문을 잠그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동을 걸었다. 

경찰이 바깥에서 창문을 두들겨 댔지만 이연은 마구잡이로 핸들부터 돌렸다. 호흡이 딸려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이 따끔거렸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이연은 백미러를 힐끗대며 팔을 뻗었다.

“학, 학, 여보세요……!”

어쩔 수 없이 숨이 헐떡거렸다. 

순경은 이쪽을 노려보며 무전기에 대고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개를 쭉 빼고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니 봉고차의 번호판이라도 읊는 듯했다. 예기치 못한 추격전에 아드레날린이 팍팍 돌았다.

―소이연 씨.

“……!”

끼이익, 이연은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혀끝을 깨물며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멈췄다. 

권기석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아니, 왜, 왜, 어쩐 일로…….”

찔리는 게 있어선지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려왔다.

―채우 어디 있습니까.

“……!”

커다란 망치가 인정사정없이 심장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알면서 물어보는 것이다. 권기석은 다 알면서 이연을 떠보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패배감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피부 밑에 감춰져 있던 족쇄가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에만 반응하며 그녀의 숨통을 꽉 조였다.

―데려오세요.

싸늘한 목소리가 명령했다. 

―이런 식으로 계약을 위반하면 매우 곤란합니다.

“…….”

―당신이 무슨 짓거리를 하던 편의를 봐주고 있는데.

이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게 모멸감이 들었다. 

―저를 화나게 만들지 마십시오. 어차피 감당하지도 못할 거. 

다시 부둣가 쪽으로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 * *

그건 끔찍한 냄새였다. 생선 비린내와 뒤섞인 싸한 약품 냄새가 선실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누구한테 들킨 거니?”

갑판 위, 뺨을 가로지르는 칼자국을 얼굴에 단 사내가 막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에게 더러워진 제 장화 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손님의 가슴팍에 구정물을 치대는 건 발길질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헝겊을 뒤집어쓴 남자의 상체가 뒤로 밀렸다. 

“얌전하신 분이네. 이번엔 뭐, 동사무소 출신이니?”

사내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보통 이곳까지 끌려오게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울고불고 살려달라며 난리를 피우는데, 오늘의 손님은 영 재미가 없었다. 

“……그, 그건 모, 모르겠습니다.”

막내가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사내는 그런 막내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뭐, 됐다. 어차피 머리에 구멍 뚫려 죽을 놈.”

“…….”

“가져와.”

이곳의 중간 관리자인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되는지 돌연 배의 조명이 팟, 하고 꺼졌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고깃배들도 덩달아 전부 소등을 했다. 

하나씩 차례로 꺼지는 빛은 또 다른 볼거리였다.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가득해졌다. 모든 죄를 덮고, 모든 죽음에 침묵하겠다는 듯이. 

“막내야, 뭐 하니. 가져오라고.”

“…….”

하지만 평소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을 막내가 오늘따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막내의 뺨을 후려치며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자꾸 그렇게 어벙하게 굴 끼야?”

“……조, 조심하시라요.”

막내가 침을 질질 흘리며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뭔 헛소리야?”

“……하, 하, 함정―”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헝겊을 벗은 권채우가 희번덕한 안광을 뿜으며 사내의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막내는 귀신이라도 본 듯 얼어붙었고, 사내는 목덜미가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쑤셔진 채 바닷속으로 풍덩 떨어졌다.

찰나의 정적.

하얗게 일어난 물거품이 잦아드는 순간.

“저 개새끼 잡아―!”

선실에서 열 명쯤 되는 장정들이 몰려나왔다.

그때부터는 난장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칼날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권채우는 오히려 제 몸을 들이밀었다.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그는 제 쪽으로 쇄도하는 칼날을 타고 넘어, 상대를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뜨거운 피가 쉬지 않고 솟구쳤다. 그는 과감하고 거칠게 조폭들을 밀어붙였고, 그때마다 풍덩, 소리를 내며 가차 없이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순식간에 권채우의 손과 얼굴이 피로 번들거렸다. 어둠을 뚫고 번뜩이는 그의 눈빛에는 광기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탕―!

그때, 불같은 총알 하나가 권채우의 허벅지를 스치고 갑판에 박혔다. 사위를 찍어 누르는 별안간의 총성이었다. 

막내가 손을 벌벌 떨며 권채우에게 재차 총을 겨누었다.

“꼼, 꼼짝 마. 움직이지 마, 개새끼야!”

그러나 남자의 흉흉한 흰자위를 보는 순간 막내는 오금이 저려 왔다. 천천히 다가온 그가 총부리에 제 이마를 갖다 대었다.

“한번 뚫어보든지.”

“……!”

그토록 새빨간 피를 묻히고 있으면서도 권채우는 색이 다 빠진 듯한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바싹 메마른 그곳에선 풀 한 포기도 마음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다. 

“근데 너, 스물은 넘었어?”

지진이라도 난 듯 떨어대는 막내의 손을 그가 꽉 붙들었다.

“이렇게 고정하고.”

“…….”

“방아쇠 당겨.”

밤보다도 묵직한 목소리가 어린애를 부추겼다. 막내가 머뭇대는 사이, 권채우의 주먹이 상대의 목젖을 강타했다. 막내는 목을 감싸 쥔 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권채우는 떨어진 총을 주워들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은 작업실이었다. 

바깥에서 칼부림이 나는데도 비쩍 마른 노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둥글게 굽은 등으로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선실을 개조한 그곳은 마약을 혼합하여 포장하는 곳으로, 각종 플라스크와 정제 장비들, 비닐 포장지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약을 포장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천하의 권채우도 그 광경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탕, 탕, 탕―!

총탄이 잇따라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선실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고, 권채우는 몸을 낮춰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빠르게 탄창을 확인한 뒤, 한쪽 눈을 감고 서늘하게 바깥을 조준했다. 

각 고깃배 당 총을 든 사람은 하나. 그의 차가운 시선이 추처럼 가라앉은 순간. 

탕, 탕, 탕―!

그는 묵직한 반동을 어깨로 견디며 연달아 팔의 각도를 달리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바다. 권채우는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한 채 한 명씩 침착하게 저격해나갔다. 그럼에도 재차 총알이 퍼부어졌다. 갑판에 부딪쳐 튀어 오르는 총알이 산재했다. 

그럴수록 권채우는 어둠을 좀먹으며 안으로 침잠했고, 기어코 상대의 이마를 귀신같이 꿰뚫었다. 그들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갔다. 

이제 마지막 한 명.

권채우가 이를 악다물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탁, 하고 빈 소리만 났다. 총알이 떨어졌다. 짤막한 욕설을 내뱉은 그는 이내 선실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쾅―! 하고 무언가 커다란 것들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자비했던 총알 세례 또한 뚝 그쳤다.

상체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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