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죽은 사람은 없어요.”
“아, 네…….”
“이연 씨, 불편한 데는요?”
옷 위로 닿아오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지금 누구보다 많이 다친 사람은 권채우다. 옷을 들추면 온몸의 실핏줄이 다 터져있을 텐데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이연의 몸부터 확인했다.
“권채우 씨…….”
“예.”
“……최고의 방어는 역시 공격이었네요.”
이연이 고개를 숙이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내가……. 제가…….”
그녀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입맛대로 그를 야금야금 바꾸려다가 권채우가 린치를 당했다.
이연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듣는 남자였기에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맞기만 하던 모습은 이연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괜찮아요, 권채우 씨.”
이연이 후―! 하고 씩씩하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뭔가를 때려 부수고 싶을 때도 있고, 아무하고나 막 자고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맞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
“그, 그건 아픈 게 아니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태초의 본능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권채우 씨를 너무 누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연은 어떻게든 납득해 보려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채우는 이 고지식하고 성실한 여자가 오로지 그를 수긍해주기 위해 이렇게 끙끙거릴 때마다 질척한 욕심이 더욱더 자글거렸다.
“권채우 씨, 앞으로는 내 눈치 보지 말아요.”
“…….”
“요즘은 싸움 잘하는 것도 스펙이에요……! 이 정도 실력이면 규백이가 곤충채집 할 때 날개 달린 것까지 전부 잡아다 줄 수 있고, 오늘처럼 나쁜 사람을 팰 수도 있고, 가족을 지킬 수도 있잖아요.”
“…….”
“고마워요.”
이연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마음을 전했다. 그에 권채우는 눈썹까지 찡그리며 퍽 달게 웃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조차 잊어버린 채 지금은 그저 온몸이 간지러웠다.
“아무하고는 아니에요.”
“네?”
“내가 마구잡이로 자고 싶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아무나라고 매도해버리면 듣는 남편은 속상하죠.”
“아…….”
그녀의 귓불이 발개졌다.
“얼른 집으로 가요. 여, 여기서 나가요.”
이연이 끙차, 소리를 내며 일어설 때였다.
“그 전에 여기 사진 좀 찍어줄래요?”
그 말에 이연의 얼굴 위로 느낌표가 떴다.
이연은 허겁지겁 카메라 앱을 켜고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권채우는 수거해온 낡은 폴더 폰들을 뒤적거렸다. 누가 봐도 대포폰이었다.
건조한 시선으로 메시지함을 훑는 동안, 그의 입꼬리는 점점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운 나쁘게도 그 얼굴을 정면에서 딱 봐버린 조직의 막내만이 몸을 옹송그린 채 떨 뿐이었다.
띠리리―
땅거미가 자욱하게 진 저녁. 별안간 차가운 공기를 뚫고 웬 벨소리가 울렸다.
근처에 있던 이연은 좁은 액정에 뜨는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조경천」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고 이맛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으려는데 권채우의 큰 손이 책상을 먼저 짚었다.
“까악……!”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권채우는 사람을 끌고 갈 때나 쓸법한 검은색 헝겊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이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이연 씨, 나랑 뱃놀이 갈래요?”
“네?”
“우리 데이트도 못 해 봤는데, 물놀이 어때요?”
가리개 너머로 콧노래가 들린 것도 같다.
* * *
화이도는 섬이다.
그러므로 산을 벗어나 부둣가로 조금만 나가보면 고기잡이배가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연은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경치를 보며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낡은 봉고는 도로 턱을 넘을 때마다 심하게 덜덜거렸다.
“권채우 씨…… 미쳤어요?”
결국 그녀가 참지 못하고 재차 이를 악물었다.
“진짜 사람 간 떨어지게 왜 이래요.”
현재 권채우는 검은색 헝겊을 쓴 채 두 손까지 밧줄로 포박된 상태였다. 누가 봐도 인질로 끌려가는 모양새인지라 이연의 눈빛에 마뜩잖음이 가득했다.
“이연 씨가 다 조져 버리라면서요.”
“네?”
“사람이 밥값은 해야죠.”
힘이 들어가 있던 동공이 맥없이 탁 풀렸다.
“표창받는 자랑스러운 남편이 될게요.”
“…….”
그런 꼴로 말해봤자 하나도 멋 안 나요…….
목에 줄만 감으면 딱 사형을 앞둔 사람인데, 권채우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입을 쭉 찢어 웃고 있었다. 그의 숨결에 딱 달라붙은 얇은 헝겊이 호선을 그린 입 모양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연은 지금이라도 권채우의 형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이연 씨.”
“네?”
“나 사고 나기 전에, 꽃꽂이만 했던 거 맞아요?”
“그……건 왜요?”
저도 모르게 바짝 허리가 곧추섰다.
“꽃보다 칼이 더 익숙해서요.”
“…….”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상대가 즉사할지 급소가 다 보이는 것 같아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고문하는 방법도 당장 떠오르는 것만 수백 가지고.”
그의 목소리에 뚜렷한 감정은 배어 나오지 않았다.
이연은 두 손을 맞잡고 침을 삼켰다.
‘역시……. 권채우 씨는 집 안에만 있는 게…….’
그녀의 얼굴이 울듯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마지못해 태연함을 가장했다.
“권채우 씨 취미가…… 격투기였어요.”
“그래요?”
그는 시트에 목을 기대며 추임새를 넣었다. 심드렁한 목소리에 별다른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이연인 입술을 말아 물고 창밖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심장이 잘게 요동을 쳤다. 이건 그를 인정하고 걱정했던 것과는 별개의 마음이었다.
목줄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이 이연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녀는 고작, 기억을 잃은 권채우만을 수긍한 것이었으므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이윽고 봉고가 멈추었다.
“이연 씨는 따라오지 말고 차 안에 있어요.”
“네?”
“위험해요.”
“아, 아니 그래도……!”
“도시락 가져왔으니까 그거 먹으면서 기다려요.”
남자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차에서 내렸다.
권채우는 왜소했던 막내와 봉고를 운전해준 아저씨에게 양팔이 붙들린 채 부둣가로 끌려갔다.
“힘 제대로 안 줘요?”
“…….”
“…….”
그러나 권채우의 일침에 얼굴만 빼고 온몸이 꿰뚫렸던 남자들이 움찔거린다.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처치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사위가 어두워서 그렇지, 벌어진 살갗에선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비닐하우스를 들켰는데 쓸데없이 사람이나 다지고 있던 것부터 잘못이에요. 보자마자 총으로 쏴버렸어야죠. 중간 관리자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쳤어요?”
“…….”
“…….”
그의 신랄한 일침에 남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표정 똑바로 해요. 흐늘거리면서 걷지 말고요. 지금 죽으러 가는 건 난데, 누가 보면 내가 죽이러 가는 줄 알겠어요.”
“……호, 혹시.”
그때, 어린 청년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권채우를 바라보았다. 헝겊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심스러운 눈길이 그 위를 배회했다.
“관, 관리자님이세요?”
공손한 말투가 우스웠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단속하러 오셨던 것입니까?”
권채우는 검은색 헝겊 속에 숨어 입꼬리만 휘어 올렸다.
* * *
배가 포말을 일으키며 멀어져간다.
낡은 모터 소리가 희미해지자 이연은 봉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에 잠긴 바다는 권채우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고깃배의 조명들만이 자그마한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두운 선착장을 연신 서성거렸다.
산에서 재배하고, 바다에서 혼합한다.
권채우가 조직원들의 핸드폰을 뒤져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들이 진짜 본거지는 ‘배’.
권채우는 한 사람을 본보기로 내세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열 손가락을 전부 꺾어버렸다. 적어도 이때만큼은 그가 이연을 먼저 컨테이너 밖으로 내보낸 후였다.
이연은 비닐하우스로 들어가 열심히 증거 사진을 모으고 있었다.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 때문에 핸드폰이 미끌미끌했다. 붉은 양귀비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산 중턱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 소리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권채우는 배를 타고 떠났다.
원래대로라면 바다에서 처리당했을 평범한 목격자가 되어.
그의 범상치 않은 무위를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걱정하는 것이야말로 쓰잘머리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기는 바다잖아……!’
이연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냥 냅다 바닷속으로 밀어버리면 어떡해.
이연은 그가 수영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조차 모른다. 문제는 기억을 잃은 권채우도 마찬가지로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잠깐만, 지금 이거. 화이도 밖으로 나간 상황이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