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158)

#45.

그는 죽었다 깨나도 성인군자가 될 수 없다.

‘권채우’로 살다 보니 이 몸뚱이가 천성적으로 모질고 독하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툭툭 튀어나오는 잔인한 생각들이며 폭력이 숟가락질처럼 자연스럽다.

겁 많은 아내를 생각한다면 퍽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연 씨, 그런데 말이에요.’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관계를 잇는다는 건, 한쪽이 상대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그런 같잖은 생색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가 맞아떨어져야만 했으므로.

감정,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남편이 식물처럼 무해해 주기를 바라는 소이연과 도끼를 쥐고 멧돼지를 난도질하는 권채우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발을 디딘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그가 싸늘해진 눈으로 괴한들의 뒤를 쫓아갔다.

‘대신 이연 씨도 내 쪽으로 떨어져 줘야 해요.’

출입 금지 구역.

그러나 한 줄의 테이프를 넘어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니, 웬 칙칙한 컨테이너 창고가 산 중턱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권채우는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투명한 비닐하우스 두엇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마주 보는 구조였다. 이맛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뭐니?”

묵직한 몽둥이가 그의 등을 꾹 눌러 왔다.

“…….”

그는 몰래 입꼬리를 올리며 항복하듯 손을 들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어디 출신인지는 알겠고.

그 순간 몽둥이를 붙잡고 상대를 홱 끌어당겼다. 어느새 괴한과 자리가 뒤바뀐 그는 상대의 목을 팔꿈치 안쪽으로 힘껏 조였다.

“으……!”

눈 깜짝할 새에 제압당한 남자가 새파래진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그에 권채우는 기다렸다는 듯 귀밑에 단도를 겨누었다.

“쉿―”

팔 안쪽으로는 목을 강하게 압박하고 남는 손아귀로는 상대의 두피를 뜯을 것처럼 잡아당겼다. 다소 왜소한 남자는 점점 얼굴색을 검붉게 물들였다.

“나쁜 짓 하는 새끼들이 왜 이렇게 굼떠요?”

“으으……!”

“딴 게 아니고, 부탁이 있어서 기다렸는데.”

“……!”

남자가 벌벌 떨며 간신히 눈동자를 굴리자 마침 고개를 숙인 권채우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나 한 대만 때려 봐요.”

그가 마른입을 축이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 * *

지독하고 매캐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연은 의자에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얻어맞은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게다가 투박하고 거친 밧줄이 연한 살갗을 둔기처럼 누르고 있어 몸 전체가 쥐어짜이듯 아팠다.

“어, 일어났니?”

그때 아저씨가 하얀 마스크를 벗으며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위생용 마스크를 낀 채 무언가를 열심히 옮겨 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꽃. 이연은 그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양귀비였다.

평온하기만 했던 섬에서의 생활이 언제부터 이렇게 예측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는지. 왜 자꾸 안 좋은 일에는 빠지지 않고 휘말리는지, 이연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권채우 씨는 괜찮을까.’

해가 진 산속은 낮보다 몇 배나 위험하다. 만약에 그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라면, 과연 누가 그를 찾아 줄까.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야, 사람이 이야길 하는데 어딜 보니?”

이연의 앞머리가 억세게 당겨졌다.

“으……!”

“너는 무섭지도 않니?”

흉악한 얼굴이 예고도 없이 훅 들이닥치자 이연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권채우와 어느 순간 거부감 없이 부대끼기만 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아닌 남자들은 이토록 역하다는 것을.

“너 같았던 연놈들도 결국 여기서 다 뒈졌는데.”

“……!”

“살금살금 들어와서 어떻게든 해 보려는 새끼들이 한둘이 아이었어.”

입 안이 바짝 말랐으나 죽을 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미 비슷한 상황을 한 차례 세게 겪어 본지라 나름의 단련이 된 상태여서. 그 도축장에 비하면 이곳은 쾌적한 편에 속했다.

다만 미아처럼 산속에 혼자 남겨졌을 권채우 생각에 이연은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다리가 떨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핸드폰도 없을 텐데…….

아저씨는 그런 이연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통을 왼쪽, 오른쪽으로 휙휙 돌리며 귓구멍을 확인했다.

“너 혹시 뭐 붙이고 왔니?”

“……네?”

“이어 마이크는 없고. 함 옷 좀 들어 보자.”

그제야 이연이 사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밧줄 때문에 옷 속을 확인하는 게 여의치 않자 아저씨는 튀어나온 마이크 같은 것을 더듬더듬 찾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허리춤, 오금 뒤, 발목 등을 거칠게 탁탁 두드리는 손길이 불쾌했다.

이연은 괜한 자존심에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버텼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숨까지 참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쾅―! 하고 굉음을 내며 열렸다.

“……!”

“……!”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키가 작고 어려 보이는 한 남자가 손을 벌벌 떨며 단도를 쥐고 있었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이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린 청년은 권채우를 인질처럼 붙잡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맞았는지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볼이 벌겋게 부어올라 엉망인 몰골이었다. 비틀거리는 권채우는 당장에 중심을 잡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믿기지 않았다.

“읏…….”

목구멍이 시큰거렸다. 그가 처참하게 당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나 보다. 그래서일까,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살인마의 마지막 조각이 이 순간 산산이 찢겨 나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확 불이 붙는다. 그건 안도였고, 분노였고, 걱정이기도 해서. 온갖 감정을 다 갖다 붙인대도 그럴싸하게 말이 됐다.

“이연 씨.”

권채우는 한눈에 많은 것들을 파악했다.

꽁꽁 묶여 있는 이연의 몸, 그녀를 더듬고 있는 한 남자, 묘하게 텁텁한 향기를 풍기는 꽃. 그것을 옮기고 있는 한 무리.

그가 고개를 뚝, 꺾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얼굴에 순간 싸늘한 이채가 돈다.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건 곁에 있던 어린 청년뿐으로, 안 그래도 떨던 손을 더욱 떨어댔다.

권채우가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어린놈에게 부축을 받는 모양새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좆만 한 섬에 별게 다 있네요.”

“…….”

“이젠 불안해서 이연 씨랑 소풍도 못 가겠어요.”

권채우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신혼부부가 이런 데서 애 낳고 살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울며 겨자 먹기로 권채우의 팔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던 어린 청년은 희게 질렸다.

퍽이나……! 진짜 위험한 게 누군데……!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이니!’

일찍이 범법에 가담했던 그는 약에 찌든 새끼들이 공기처럼 익숙했다.

약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 본성을 초속 단위로 들추고 쑤셨기 때문에 원치 않아도 사람들의 밑바닥을 노골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들을 가까이에서 자주 접하다 보면 웬만한 일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게 되는데―

‘그런데 이 미친 자슥은……!’

다짜고짜 자신을 때려 달라 말하던 이 남자는 구제 불능 약쟁이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지성이 녹아들어 퇴행한 게 아니라, 그 누구보다 명징하고 제정신인 상태로 협박을 해 왔다.

청년은 마지못해 주먹을 날렸지만, 남자는 김이 샜다는 듯 스스로 제 뺨을 연거푸 후려쳤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요.”

그건, 직접 보지 않으면 정말로 믿기 힘든 괴상한 장면이었다.

남자는 웃으며 기쁘게 청년을 부추겼고, 그럴 때마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는 얼굴을 했다.

“나 불쌍해 보여요?”

―라고 묻기까지 하면서.

“내 아내는 아프고 불쌍한 걸 잘 챙겨주거든요.”

이놈도 사실 약쟁이인가? 약을 못 구해서 직접 여기까지 쳐들어온 괴짜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턱을 매만지던 남자는 돌연 성에 안 찬다는 표정으로 뾰족한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그는 어딘가 표백된 듯 무심한 얼굴로 제 콧대와 입가를 내리쳤다. 그 행동에 망설임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청년이 저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붙잡고 말리기까지 했다.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신음 한번 내지 않는 그는 사람이 아닌 듯 무서웠다.

이윽고 흰 티셔츠에 흙을 묻히고, 단정했던 머리칼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린 후에야 남자는 칼을 직접 쥐여 주고 명령했다.

“끌고 가요.”

“그, 그게 꼭 안 그러셔도…….”

“염탐하는 새끼 처리하는 법 몰라요?”

당신이 대체 뭘 안다고……!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청년은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형님들에게 바락바락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중국 하얼빈에서 사람깨나 담가 봤다는 형님들이 고작 미친놈 한 명을 어쩌지 못할까 싶어 잠자코 상황만 주시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한편 권채우는 이연이 묶여 있는 의자 앞까지 기어이 다가와 커다란 개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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