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158)

#44.

“나무만 보면 표정부터 달라지는 거 알아요?”

몇 발자국 뒤에서 이연의 작업을 전부 지켜보던 권채우가 그녀의 왕진 가방을 제 것처럼 뺏어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양손이 가벼워졌다.

“그냥 편해서 그래요.”

그녀가 선선히 웃었다.

노을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저녁, 권채우는 보기 좋게 올라간 아내의 입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편해요?”

“네. 시인 릴케는 가로수 아래서 시를 쓰고, 슈베르트는 라임 나무 아래서 위로를 받았대요.”

나긋하게 풀어진 목소리가 청아했다.

“심지어 석가모니는 무우수 아래서 태어나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셨고요.”

앞장서 걸어가던 그녀가 돌연 뒤를 돌았다. 바람에 헐렁이는 밀짚모자를 꾹 누른 채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사랑스러웠다.

“인간은 사랑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나무가 없다면 모두가 오염될 거예요.”

그는 뒤로 걷고 있는 그녀가 혹여나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온통 그쪽에 곤두서 있었다.

“그래서, 이연 씨는 나무 아래서 뭘 했는데요?”

“뭐…….”

이연은 곧장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지만 왜인지 입 밖으로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왜요? 첫 키스라도 했어요?”

“아니요!”

“그럼요?”

권채우가 고개를 숙였으나 조급한 음성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는 제 아내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인내가 자꾸만 닳아 갔다.

“……저는 나무 아래로 자주 도망쳐 왔어요.”

이연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그리고 거기서 음악을 들었어요.”

과거를 쓸어 보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권채우는 그녀가 꺼내 보는 추억 속에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안간 툭 밀려난, 익숙지 않은 감정이 들었다.

“어떤 음악이요?”

“현악기였어요.”

권채우는 말없이 눈썹만 찌푸렸다 폈다.

축하연에서 들었던 선율이 불쑥 떠올라서.

두통과 메슥거림. 현악기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신경을 자르는 듯 끔찍했다. 다시 생각해도 유난스러운 반응이었다.

“독일가문비나무가 악기의 재료로 쓰이거든요.”

이연의 재잘거림에 그는 애써 잡생각을 떨쳤다.

“나는 아픈 나무를 치료하지만, 누군가는 나무를 베서 연주한다는 게 신기해요.”

그녀는 은근슬쩍 ‘베서’에 힘을 주었다.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게 귀엽다. 권채우는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달게 쳐다보았다.

“누구는 죽어라 나무를 고치는데, 누구는 죽어라 긁어서 소리를 낸다니…….”

그녀가 투덜거리는 사이, 옥같이 반질반질한 나뭇가지가 남자의 발밑에 밟혔다. 권채우가 그것을 주우려 상체를 구부릴 때였다.

‘……어?’

마침 이연의 눈에 몇몇의 나무가 새삼스럽게 박혀 들었다. 약 오십 센티 정도의 기다란 자상. 예리한 칼로 난도질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이 몇몇 나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

얼굴이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저대로 방치했다간 체관부가 손상되어 뿌리에 영양이 공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수피가 심하게 벗겨지면 결국 굶어 죽는다는 소리였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짓을 한 거야?

이를 뿌득 간 이연이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눈에 더욱 힘을 주고 주위를 살펴보니, 일고여덟 중에 하나꼴로 인위적인 자상이 규칙적으로 나 있었다.

“이게 무슨…….”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떨렸다.

그건……. 하나의 표지판 같았다. 마치 길을 알려 주는.

이연은 반신반의하며 나무의 자상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휙 바뀌는 방향이 숫제 미로를 헤매듯 어지러웠다. 게다가 그 루트는 그녀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사고 다발 구역」

마침내 혼란스럽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 낡아 빠진 현수막은 경고의 문구가 무색하게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귀퉁이마다 까맣게 삭은 것이 꼭 몇 년이나 방치된 퀴퀴한 방석 같았다.

테이프로 치덕치덕 막아 놓은 출입 금지 구역.

무성하게 자란 수풀 때문에 그 너머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이럴 땐 보통 절벽이 있었다.

이연은 괜스레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권채……! 어……?”

뒤를 돌아본 그녀의 안면이 삽시간에 얼어붙는다. 한 번 두 번 느리게 깜빡거린 눈꺼풀이 이윽고 돌 부스러기처럼 파사삭 떨어졌다.

그가 없다.

“하씨……!”

입에서 다소 과격한 헛숨이 새어 나왔다. 연쇄적인 자상에 눈이 멀어 별다른 설명도 없이 뛰쳐나간 것이 뒤늦게 기억이 났다. 이연은 밀짚모자를 풀어 헤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권채우를 두고 왔나 보다.

“아으……!”

그녀는 제 피부가 화끈거릴 때까지 손바닥으로 양 뺨을 세게 문질렀다.

심지어 권채우는 이 산이 초행이었다.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그가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이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른 권채우부터 찾아야 했다.

그녀의 발걸음에 힘이 붙을 때였다.

배낭을 메고 선글라스를 낀 대여섯 명의 등산객들이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른 척 지나가려 했지만―

“저기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종량제 봉투에 연신 주워 담는 마음씨가 기꺼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여기는 들어가시면 안 돼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들이 퍽 순박해 보여 이연은 용기를 냈다.

“저기는 막다른 길이라 위험해서요.”

그때 무리 중 하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시청 직원이니?”

“네?”

남자는 이연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왔니?”

이쪽 사투리가 아니었다. 이연이 슬쩍 걸음을 물리자 툭, 하고 돌부리에 뒤꿈치가 걸렸다.

“아, 아니요. 남편이 뒤에 오고 있는데요……!”

그러자 아저씨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얘기는 다 끝난 걸로 아는데 따로 더 챙겨 달라는 거니?”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상하게 등이 싸했다.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는데 갑자기 아저씨들이 이연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느이 어디 소속이니?”

“……소속이라뇨?”

“시청이 아이면 짭새 아니니?”

이연이 당황하며 손사래를 마구 쳤다.

“전 나무의사예요……!”

그 말에 아저씨들이 음산하게 낄낄거렸다.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닌 듯했다.

문득 이연은 그들이 등산로보다는 선산으로 많이 쓰이는 이곳을, 어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채 올라온 건지 의아해졌다.

꼭 누가 봐도 등산객처럼 보이게…….

『최근 송이버섯, 잣, 산약초, 산삼 등 임산물 불법 채취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때 뉴스 한 줄이 뇌리를 스쳤다.

이연은 그들의 면면을 주시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느새 축축해진 손바닥 안으로 핸드폰이 꽉 들어찼다.

“난 아가씨처럼 귀찮고 거짓말만 치는 사람들을 여기서 자주 만나는데―”

분명 처음에는 인상이 좋아 보이던 아저씨였다. 그런데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가더니 이윽고 진짜 눈빛이 드러났다.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아니?”

* * *

―권채우 씨……!

권채우의 고개가 허공 어디쯤으로 즉시 돌아갔다.

바람결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근처 어딘가를 배회하던 그의 미간이 콰직 일그러졌다.

권채우는 이 희미한 파동을 듣자마자 재깍 방향을 틀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제대로 길도 나지 않은 산속.

고르지 않은 땅은 울퉁불퉁했고 이끼가 낀 커다란 바위는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권채우는 그것들을 단번에 넘으며 풀숲을 헤치고 달렸다.

‘소이연……!’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깎아 선물할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산 중턱에 홀로 남겨졌다.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미약하고 흐리터분한 소리까지 쉽게 잡아낼 줄 알았기에 누군가의 발소리를 쫓아 무작정 이연을 찾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땅거미가 밀려드는 시간에, 사람 발길도 드문 이런 산속에서, 남자 여러 명이 여자를 끌고 가는 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이 씨발 새끼들이.”

권채우가 험악하게 욕설을 짓씹었다. 게다가 이연은 가격을 당했는지 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출입 금지 테이프를 자연스럽게 들추고 들어갔다. 권채우는 치솟는 살의를 어쩌지 못하고 이연의 왕진 가방을 열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것들은 일단 주머니에 다 쑤셔 넣었다.

어차피 제압하는 건 금방이다. 감히 이연을 건드린 손가락들은 전부 다 잘라 줄 것이다. 필요하다면 모가지까지 쑤실 생각이다.

그렇게 서슴없이 무자비한 끝을 되뇌고 있는데―

‘매사 차분하고, 과다하지 않게…….’

불쑥 그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더는 공격하지 않고, 세, 세우지도 않고. 일단은 권채우 씨 증후군이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시뻘겋게 들끓던 속이 놀라우리만치 천천히 가라앉는다.

피식,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건 뒤틀린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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