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158)

#43.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그가 이마를 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주친 눈에서 깊고 진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연 씨한테 보상이 될까요.”

이연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권채우는 그녀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것을 참 쉽게 내밀곤 했다. 이미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이연의 과거를 보상해 주는 힘이 있었다.

“그냥…….”

그녀는 흔들리는 속을 애써 갈무리했다.

“매사 차분하고, 과다하지 않게…….”

“…….”

“더는 공격하지 않고, 세, 세우지도 않고. 일단은 권채우 씨 증후군이 얼른 나았으면 좋겠어요.”

단정했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빌어먹을 소이연의 저 똥고집.

이 순간 권채우는 그녀가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저 방어벽부터 철저히 부숴 주겠노라 마음먹었다.

* * *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수놈은 탈락입니다.”

규백이는 빠르지만 일정한 속도로 책장을 넘기며 백과사전을 속독했고, 권채우는 무표정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어느 나른한 오후, 두 남자는 햇볕이 잘 드는 테이블에 앉아 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어린 원숭이가 아니고서야 가망 없습니다.”

“꼬마 박사님, 원숭이랑 사람은 달라.”

“동물인 건 같습니다. 습성이 비슷합니다.”

남자는 밀리지 않는 규백이의 기개에 픽 웃음을 흘렸다. 아이는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상대를 압박했다.

“어린 원숭이는 냄새가 좋습니다.”

자꾸 어린 원숭이 타령을 하며 은근히 어깨를 펴 대는 꼴이 우습다.

어린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 애기 원숭이를 들이밀어. 그가 가소롭다는 듯 입매를 올렸다.

“누가 들으면 나한테 더러운 냄새 나는 줄 알겠어요. 나도 잘 씻어요, 박사님.”

이윽고 권채우는 상체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인간 사회에서 나이 어린 남자는 인기 없어.”

그가 여봐란듯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모아 놓은 돈 없지, 제 한 몸 건사하기 정신없지, 다방면에서 경험 부족하지, 철없지, 책임감 없지―”

“그런데 수놈도 돈 없습니다.”

“……뭐?”

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아이를 응시했다.

“직장 없습니다. 백수입니다. 누워 있기만 합니다. 힘자랑만 합니다. 일은 암컷이 다 합니다.”

“…….”

“늙은 원숭이가 능력까지 없는 건 최악입니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권채우는 날아오는 잽을 속수무책으로 맞느라 머릿속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수놈은 요즘 식충입니다.”

규백이 웬일로 책에서 시선을 떼고 권채우를 힐끔 보는가 싶더니, 다시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식충이의 특징은 장수풍뎅이 애벌레처럼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쌉니다.”

“…….”

“샤따맨. 샤따맨.”

테이블에 대고 있던 그의 팔꿈치가 삐끗 떨어졌다.

입꼬리를 슬쩍 올린 규백이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2차 토너먼트 공지가 떴다.

이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메일을 빠르게 읽어 나갔지만, 스크롤을 내릴수록 점점 입매가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작년, 닷새 동안 계속되었던 폭우로 인해 약 5만㎥의 토석류가 쏟아졌다. 파도처럼 밀려 내려온 엄청난 토사 더미가 평화로웠던 주택 단지와 차량을 단숨에 덮쳤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던 재해였다.

그 산사태로 인해 주택 삼십여 채가 흔적도 없이 급류에 쓸려 사라지고, 천오백 가구의 전원 공급이 끊겼다. 당시 이연은 사고 지역과 떨어져 있었음에도 급하게 의사를 불러 권채우와 이어진 의료기기를 긴급 전원으로 돌려야 했다.

“……역시 만만치가 않네.”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심란하다.

이번 2차 토너먼트는 산사태가 벌어졌던 그 지역에서 나무 구조 작업을 하는 것이다.

마을의 복구 때문에 잠시 폐쇄해 두었던 곳을 일시적으로 열어 나무의사들의 인력을 ‘공짜로’ 이용하겠다는 산림청의 심보가 엿보였다.

목적은 숲의 복원. 제한 시간 안에 가장 많은 나무를 치료하는 것.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즉 하루였고 동행인은 딱 한 명만 가능하다. 활자로 쓰여 있는 공문을 읽기만 해도 체력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칙대로라면 수목치료사와 한 팀이 되어 동행해야 함이 옳지만, 이 무박 스케줄을 과연 추자가 잘 버텨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연 씨, 5시에 왕진 나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 국자를 든 권채우가 이연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연은 앞치마를 걸친 남자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의자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밥은 어떡할래요?”

“나는 다녀와서 대충 때울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권채우 씨 먼저 먹고 있어요!”

“…….”

그 말에 눈썹을 까딱인 권채우가 돌연 문설주에 국자를 대고 길목을 막았다.

급하게 왕진 가방을 들고 뛰쳐나가려던 이연은 떡하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의 몸집에 괜히 주춤거렸다.

“어……. 좀 비켜 주시면…….”

“차라리 데려가요.”

“……네?”

“집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랑 겸상도 한 번 못 해 줄 거면, 차라리 데려가서 막 굴려 먹으라고요.”

이연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퍽 고집스러웠다.

“삽도 되고, 도끼도 될게요.”

자신을 도구화하는 말투가 사뭇 미끈했다.

하지만 이연은 그와 함께 산을 오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가 도끼를 들고 칼부림을 하는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사람을 생매장하던 첫 만남도 그렇고, 권채우와 산이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봤다.

“난, 난 권채우 씨가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고, 또…… 꽃꽂이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게 좋아요.”

“…….”

“그런 모습에 안심이 돼요.”

권채우의 미간이 옅게 파였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귓가에는 샤따맨, 샤따맨, 하고 규백의 목소리가 뻐꾸기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이연 씨는 내가 화초 같았으면 좋겠어요?”

“……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를 집에만 가둬 두려는 제 영악한 회유가 들킨 듯하여.

“그런 배우자여야 이연 씨가 편한지 궁금해서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은 더없이 잔잔했다. 이연은 그의 심중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으나 이것만큼은 꾸밈없이 말할 수 있었다.

“네, 아무래도.”

“…….”

“저는 권채우 씨가 그렇게 무해하길 바라요.”

그에게선 딱히 반응이랄 게 없었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이 이연을 그늘처럼 덮었다. 속을 꽁꽁 감춘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부딪쳤다.

이연은 어김없이 남자의 본성을 경계하느라 습관적인 당부를 한 것뿐이었고, 권채우는 처음으로―

“그럴게요.”

욱, 하고 어떤 반발심이 동했다.

소이연은 그를 가둬 두려고만 한다. 그런 분명한 의지가 상냥하고 걱정스러운 포장지에 싸여 종종 내밀어졌다.

취업을 해 보겠다고, 신분증을 달라 했던 언질도 어느 순간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제 형이란 놈이 이연을 옴짝달싹 못 하게 쥐고 있는 판국에도, 그녀는 권채우와 그 짐을 나누지 않는다.

기껏해야 ‘공격성의 거세’만을 바라며 그를 관상용 화초로 눌러 앉히려 하지 않는가.

애초에 개새끼로 태어난 짐승을 이곳저곳 잘라 식물로 바꾸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권채우는 그마저도 아내의 말을 착실히 따를 생각이었다.

그의 희멀건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대신 오늘만요, 나가서 같이 밥 먹어요.”

“……네?”

“내가 도시락 쌀게요.”

유순한 눈으로 고개까지 기울이며 애걸하는 모습에 이연은 홀린 듯 끄덕이고 말았다.

* * *

이연은 진딧물 때문에 몰골이 흉하게 변한 나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깍지벌레들의 대잔치로 이미 수피는 벌거숭이처럼 벗겨져 있었다.

그녀는 깍지벌레 살충제를 살포하고 라텍스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보호자가 양복 재킷을 대충 손에 욱인 채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저,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무는 안 베요.”

“네?”

이연의 뜬금없는 일축에 보호자가 멈칫했다.

“많이들 문의 주시거든요. 혹시나 뿌리가 무덤 속에 들어가서 시신이라도 감으면, 후손들한테 액운이 덮친다고요.”

그녀는 나무 옆, 둥그렇게 올라와 있는 무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보호자는 숫제 독심술이라도 당했다는 듯 눈을 크게 키웠다. 건조한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수백 년 된 소나무도 바로 잘려 나가요. 아직도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모르는 세상이거든요.”

이연은 밀짚모자를 고쳐 쓰며 왕진 가방을 닫았다.

“보호자님.”

“네, 네.”

그가 상체를 움찔하며 피곤해 보이는 낯을 들었다.

“이 나무를 베면 무덤 주위엔 아무것도 없어요.”

“……!”

“조상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자주 찾아와 주시겠죠?”

보호자는 끝까지 말이 없었고, 이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채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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