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158)

#42.

―소이연 씨, 처음 인사 나눴을 때 제가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

그녀는 권기석이 공통된 기억을 이용하여 진짜 의도를 전달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는 모든 지원을 약속드렸습니다.

‘진범을 잡아다 소이연 씨 자리에 앉혀 주겠습니다.’

―필요한 건 전부 보내 드리겠습니다. 채우를 병원 직원으로 쓰든, 가정부로 쓰든. 그것도 아니면 장난감으로 쓰든.

“……!”

―소이연 씨가 내 동생을 ‘어떤 식으로’ 데리고 있든 상관 안 합니다. 다만 해야 할 도리만 잊지 마십시오.

‘되도록이면 화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이연은 굳은 얼굴로 간신히 네, 하고 내뱉었다.

한편 권채우는 예의 있는 말투이긴 하나 어딘지 위압적인 제 형이라는 작자와 벌서는 아이처럼 졸아 있는 이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납게 헛숨을 뱉었다.

“이봐, 지금 시집살이 시켜?”

* * *

―그딴 말이나 할 거면 다시는 전화하지 마.

답지 않게 순진하게 구니 귀엽기까지 하네,

권기석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권채우가 얼마나 불같이 포악하고 충동적인 사내였는지 집안 식구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애지중지 키운 조폭 가문의 막내아들. 그러나 친부모의 손길도 거부한 채 모두에게 이를 세우기만 했던 그 유별난 습성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의 권채우에게선 길들여진 냄새가 났다.

“조 원장님.”

그는 D 병원의 조경천 원장을 유유히 바라보았다.

“예, 이사님.”

조경천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설명할 수 없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통에 차라리 고개를 들지 않는 편이 그에겐 수월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조경천이 교복을 입고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유일한 감상이었다. 이쯤 되면 배짱의 문제가 아니라, 집터의 기운 때문이리라.

수십 채의 한옥으로 구성된 가옥.

한옥의 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군락은 으리으리했다. 특히나 검은 기와가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학의 무리처럼 고즈넉했지만, 깊숙이 발을 들일수록 숨이 콱 막혀 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마치 구렁이의 배 속으로 들어온 듯하여.

줄여서 권 가(家).

누군가는 알아듣고, 누군가는 짐작도 못 할 이름.

권 가(家)는 대한민국 부동산 3 대장 중 하나이며, 막대한 현금 동원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조직이자, 음지를 장악한 청와대의 비선 실세였다.

가진 게 돈밖에 없었던 권기석의 할아버지는 기업이 막 태동할 무렵 젊은 사장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그렇게 굴리는 현금이 하루에 많게는 수백억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80년.

권 가(家)는 현재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굵직한 기업들의 전신이 되었고, 나라의 그림자로 자리매김했다.

권 회장이 과거 중앙정보부의 부지를 통 크게 내놓으며 자신의 사냥개들을 고문관으로 빌려주었다는 얘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그 후 세상이 바뀌어 중정이 안기부가 되고, 다시 국정원으로 탈바꿈할 동안,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 사냥개들은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대통령의 직속 사조직이 되어 더러운 뒤처리를 대신해 주는 집단으로 대대로 굳어져 내려왔다.

제아무리 똑똑한 대통령이어도 그들과 엮이다 보면 약점이 잡히기 마련이었고, 권 회장은 그런 치부책을 화폭 삼아 풍류를 즐기던 노인네였다.

그는 대주주의 자리를 바둑알처럼 쌓아 두고 있으면서도 결코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이룩한 이 저택 안에서만 온건히 머물렀다.

무려 한 세기 가깝게 이어지고 있는 권 가(家)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졌는데, 그 중심에는 재단 사업이 있었다.

권 회장의 근간은 사채업이었고 그에 따라 더러운 일을 하는 것도 천성적으로 좋아했다. 그러나 뒤로는 그 누구보다 엘리트 육성에 진심을 다했다.

이 좁은 집터를 넘어 밖의 세상까지 그의 힘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야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가난하지만 떡잎이 남다른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지원하여 공부의 끈을 놓지 않도록 했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에도 한결같이 든든한 뒷배를 자처했다.

그 결과, 좋은 머리, 뛰어난 학벌, 무서운 뒷배로 이루어진 권 가(家)의 학생들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의 각계각층을 주름잡게 된 건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유학 비용까지 전액을 지원해준 권 가(家)의 후원은 부모보다도 헌신적이어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 자란 학생들은 스스로 권 가(家)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며 요구하지 않아도 충성을 갖다 바쳤다.

조경천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조 원장님, 이번 건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사님.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황조윤이가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놈인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많이 아꼈던 제자라고 들었던 터라.”

“별거 아닙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제가 이쪽으로 좀 키워 보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학부생 시절, 황조윤이 몰래 마약을 키우다가 적발됐을 때 조경천은 내심 이놈을 점찍어 두었었다.

빨간 줄까지 막아 주며 고이고이 키워 화이도에 데려온 이유도 마약밭을 맡기기 위함이었는데…….

경솔한 그의 행동 때문에 전부 다 물 건너갔다. 권 이사의 사람을 건드렸다지. 조경천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꼬리를 잘라 버렸다.

“그 일은 잘되고 계십니까.”

권기석이 운을 띄웠다.

권 회장이 죽고 난 후, 권 가(家)를 물려받은 권기석의 아버지는 오랜 가풍을 깨고 양지로 나섰다. 그리고 당시 휘청거리던 수국제약을 가장 먼저 집어삼켰다.

“예,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희귀 식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경천은 찻잔을 만지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애써 생각을 비워 냈다.

연구가 진척될 때마다 기존의 연구원들은 사라진다. 완전무결하게 입을 막으려는 권기석의 결벽이었다. 조경천의 등허리로 삐질 땀이 흘렀다.

“화이도는 아주 중요한 땅입니다.”

대대로 화이도는 권 가(家)가 소유해 온 땅이 태반인지라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섬 어디에도 없었다.

화이도 전체가 권 가(家)의 유용한 소각장이자, 은밀한 비닐하우스인 셈이었다.

“일단은 화이돔 프로젝트부터 따내세요.”

그에 조경천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 *

“그동안 계속 저런 식이었어요? 지원해 줄 테니, 도리만 다해라?”

권채우는 굳은 낯으로 그녀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이연의 안색은 꼭 체한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권채우는 그런 그녀의 손바닥을 꾹꾹 눌러 주었다.

“이연 씨는 저딴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고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곱씹을수록 기분이 나빴다. 권기석이 직장 상사도 아닌데, 명령을 받잡듯 고개를 조아리던 이연의 모습이 자꾸만 속을 갉작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찾아오신 적은 없어요. 전화도 석 달에 한 번 정도고. 권채우 씨가 걱정할 만큼 심각한 건 아니에요.”

남자는 마른세수를 하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게 다 내가 병신 신세라 그랬던 거죠.”

“……네?”

“남편인 내가 이 모양이니까 아내까지 얕잡아 보인 거예요. 내 탓이에요. 내가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했어요. 미안해요, 이연 씨.”

“…….”

그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 속이 쿡쿡 쑤셨다. 그에게 사과를 받는 게 몹시도 면목이 없었다.

“이런 집구석인 거 알고는 있었어요?”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에요.”

이연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목을 쓸어내렸다.

“혹시, 전남편이 가족 얘기 숨기고 접근했어요? 돈은 많은데 인성이 부족한 형 얘기라던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 새끼 말본새만 봐도 윗물이 어떤지 훤히 알겠던데요.”

“…….”

“보통 진상 집안이 아닌 것 같은데.”

권채우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제 과거를 의심했다.

“진짜 속아서 결혼한 거 아니죠?”

“아, 아니에요……!”

이연은 그의 불신을 얼른 덮고 싶었다.

“우리가 살림을 빨리 합치다 보니까, 서로 가족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저, 저도 가족 얘기는 먼저 안 꺼냈구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빨개진 이연의 손바닥을 뭉근히 쓸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윤기 나는 앞머리가 눈매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그 얼굴이 왜인지 음울해 보였다.

“이연 씨한테 큰 빚을 진 기분이에요.”

“……왜요?”

“나 때문에, 원래라면 안 해도 됐을 고생을 혼자 다 뒤집어쓴 거 같아서.”

남자는 그녀의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무거운 숨결이 살갗에 뜨겁게 녹아들었다.

따지고 보면 권채우의 말 그대로다. 진범은 어디 가고 애먼 이연이 옴팡 뒤집어썼으니까. 물론 그가 말한 의미는 다른 거였겠지만 우습게도 눈꺼풀이 떨렸다. 가슴 밑바닥부터 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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