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세상과 단절됐던 소녀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 건, 깡시골의 경치 덕분이었다.
사람보다 우거진 수풀이 더 많았던 그곳은 이연을 너르게 품고 많은 것들을 돌려주었다.
“이연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나무요.”
권채우가 미묘하게 눈썹을 구겼다 폈다.
두 사람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축하연 도중 사라졌던 문제로 추자에게 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것도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다.
『최근 송이버섯, 잣, 산약초, 산삼 등 임산물 불법 채취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틀어 놓았던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연의 시선은 화면이 아닌 먼 허공을 향해 있었다.
축하연 이후, 그녀는 자주 멍을 때리게 됐다. 딱히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점점 그 횟수가 잦아졌다. 그냥 머릿속을 텅 비우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최근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등, 그 방식도 점점 지능화되고 있는데요. 보도에 황지연 기자―』
갑자기 TV가 꺼졌다. 팟―! 하고 브라운관 표면에서 정전기가 튄다. 이연은 그제야 최면이 깨진 사람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어리벙벙하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권채우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턱을 괸 그는 꼭 하품이라도 할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TV는 왜 껐어요?”
“글쎄요.”
그런데 묘하게 비틀린 입꼬리가 심상치 않다. 눈은 무료한 빛을 띠는데 입매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왜인지 팔뚝에 한기가 내려앉았다.
“그럼 구두부터 물어뜯고 미친개처럼 짖어 볼 걸 그랬나요?”
그가 상체를 쑥 굽혀 가까이 다가왔다. 꺾어 올라간 한쪽 눈썹 아래, 눈동자가 자글대고 있었다.
“왜 자꾸 방치해요.”
이내 이연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요즘 이연 씨 너무한 거 알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나 빼고 열심히 해요.”
“……나무요?”
이연이 콧등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노래하는 나무 맞나.’
추자는 이연이 잊고 지냈던 소중한 추억을 불시에 끄집어 올렸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 당시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나무라…….”
그가 인상을 쓰며 볼 안쪽을 혀로 꾹꾹 눌렀다.
“남편 좆은 거들떠도 안 보면서, 다른 두툼한 기둥들은 자꾸 생각이 나나 봐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이연이 뜨끈해진 숨을 뱉으며 팔짝 뛰었다.
그러나 권채우는 이미 서늘함이 드리워진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나도 아주 단단히 난 것이다.
이연은 심사가 꼬인 그가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를 안다. 게다가 주로 피가 쏠리는 부위까지 몸소 겪어 본 터라 후다닥 말을 덧붙였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병원 이름이요……! 어릴 때 좋아하던 나무에서 따온 거거든요. 오늘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요.”
열일곱, 친척 집을 전전하며 마음을 굳게 걸어 잠갔던 이연을 다시 살게 했던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비춰 들어오고, 사방이 청량한 풀 내음으로 가득했던 숲. 그곳에서 이연은 노래하는 나무를 만났다.
이젠 빛바랜 기억이 되었지만 이연이 가진 유년 시절 중 그나마 가장 그림 같고 따스한 시간이었다.
“스와핑이 안 되니까 이젠 정신적 외도예요?”
“……!”
권채우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저도 모르게 또 넋을 빼놓고 있었나 보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침착했던 담갈색 홍채가 조금씩 온도를 높였다.
“이연 씨는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요.”
아닐……걸? 그녀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연 씨 보수적이라면서요.”
“그건 맞는데…….”
“그럼 나한테만 보수적이었네요.”
그는 무언의 깨달음을 얻은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지루해요?”
“……네?”
“내가 재미없다는 건 알겠어요. 이연 씨 관심사는 오로지 불쌍한 나무들뿐이고, 나는 아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앉아 있지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니까.”
야살스럽게 쭉 올라간 눈꼬리가 오늘따라 닻처럼 박혀 온다. 그는 이연의 머리통을 묘한 표정으로 주시하더니 이내 소파 턱에 기대 눈을 감았다.
“차라리 다시 식물인간이 되고 싶어요. 내가 아픈 나무가 되면 이연 씨는 분명 내 생각만 해 줄걸요.”
이연은 왠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언제쯤이면 나만 예뻐해 줄 거예요?”
“……!”
우울한 목소리가 돌멩이처럼 날아든다. 그 짤막한 말이 가슴속에 예기치 못한 파문을 남겼다. 어느새 눈을 뜬 권채우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발밑에 닿는 푹신한 카펫. 따뜻한 패브릭 소파. 거실을 가득 메운 크고 작은 화분들.
두 사람의 눈 맞춤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지이잉, 지이잉.
그때, 경직된 공기를 가르고 핸드폰이 울렸다.
테이블을 흔드는 소리가 이상스레 날카롭다고 생각할 무렵, 액정을 확인한 이연의 입에서 헉, 하고 신음이 샜다.
안면이 딱딱하게 굳고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연은 차마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예요?”
“아,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통화 거부를 누르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누가 봐도 얼버무리는 모습에 권채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
“…….”
핸드폰은 또다시 울려 댔다.
가느다란 정적이 고무줄처럼 당겨진다. 이연이 연신 무릎을 문지르며 핸드폰과 권채우를 힐끗거리는 사이, 소파 등에 늘어져 있던 남자가 별안간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
“……권채우 씨! 안 돼요!”
그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권기석.
이연이 발작하듯 그를 붙들고 늘어졌으나 화면을 미는 손짓이 훨씬 빨랐다.
“여보세요.”
―…….
권채우는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변경한 뒤 소파에 툭 던졌다. 이연은 느닷없는 이 상황에 빳빳이 굳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이를 악문 소리에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대체 어떤 새끼길래 소이연이 저렇게 얼었어.
그때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이다.
이연의 손가락이 움찔 튀었다.
권채우는 눈썹을 비죽이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 말이 진짜냐고 묻는 듯이. 이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소이연 씨.
묵직하고 미끈한, 구렁이 같은 음성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네.”
―그간 일이 바빠 연락이 뜸했습니다.
이연은 통나무 같은 차렷 자세로 눈꺼풀을 떨었다.
‘왜 하필 삼자대면인데……!’
권기석이든, 권채우든, 그녀 자신이든.
누구 하나라도 입을 잘못 벙긋하는 순간 끝이다.
지금껏 이연이 다져 온 거짓말이 전부 들통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연은 바싹바싹 타는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
―깨어났고, 정상은 아니라는 것까지.
형치고는 냉정한 말에 권채우를 힐끗 곁눈질하니, 숨소리까지 통제하고 있는 그의 기세가 귀신처럼 섬뜩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을 벌이셨더군요.
“……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겁도 없이.
“……저, 그, 그게.”
살갗을 뚫고 나올 듯 맥박이 펄떡였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던 그날의 도축장. 인생의 절벽에서 붙잡았던 계약자의 손. 그것도 꼴에 관계라고, 말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가 전부 읽혔다.
저 남자는 지금 그녀가 어떤 거짓말로 제 동생을 갖고 노는지를 안다. 이미 전부 다 알고 있는 거다.
―물론 상대에 대해 잘 몰랐으니 그런 거겠지만…….
권기석은 뜸을 들이듯 말을 멈추었다.
―큰 실수 하신 겁니다.
또다시 숨이 가빠질 것 같다.
이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으려는데 불현듯 권채우가 깍지를 껴 왔다. 그러자 그날의 정원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달빛 아래의 커다랬던 나무.
폭죽.
그리고…….
“……당신이 형이든 뭐든. 어차피 떠오르는 얼굴도 없고, 가족에 대해선 궁금하지도 않은데―”
그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이연을 추궁했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
이대로 모든 게 까발려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는 가슴팍에 총부리를 댄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확실히, 무언가를 잃을 거라는 예감.
―소이연 씨가 입찰 경쟁에 참가한다고 들었다.
그때 권기석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의자 등받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지 끽, 하고 쇠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심사 과정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충고를 하려는 참이었어. 여자 원장은 혼자인데다, 손에 꼽힐 만큼 규모가 큰 공공사업이라 업체를 허투루 정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연은 멍청하게 보일 게 뻔한 제 얼굴부터 깊이 숙였다. 당황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기억을 잃은 친동생에게 뻔뻔히 사기를 치는 여자를, 다름 아닌 권기석이 모른 척해 준다.
이, 이건 또 무슨 꿍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