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나무에 별처럼 걸려있는 유리 등잔보다도, 권채우의 올곧은 홍채 하나가 밤을 밝혔다.
이연의 밤을 비추었다.
그녀는 벙쪘다가, 붉어졌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별 시답잖은 말에 긴장이 툭 풀어져서.
“나 꽃뱀 아니에요…….”
“아쉽네요, 차라리 콱 물어줬으면 좋겠는데.”
“권채우 씨 빈털터리거든요…….”
“시댁에 돈이 많다면서요?”
“……거기는 무서, 무서운 데고요.”
이연이 움찔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진짜로 콩가루 집안이었어요…….”
사람과는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좋았다. 어차피 사촌들이 한 차례 난장을 치고 가면 전부 떨어져 나갈 것이어서. 애초에 꽁꽁 싸매거나 벽을 둘렀던 시간이 길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기분은 추락을 닮아있었다.
“분명 피가 섞인 가족인 건 분명한데, 우리는 끝까지 가족이 될 수 없었어요.”
“…….”
“나는 집에서 송연이라고 불렸거든요.”
“송연이요?”
“그냥 별명 같은 거예요.”
소이연을 세로로 쓰면 송연으로 읽혔다.
“송연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이거든요.”
“…….”
“더러운 얼룩인 거죠, 가족들한테 나는.”
그때 펑―! 소리가 나더니 하늘 위로 폭죽이 수놓아졌다. 멀리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연은 공허한 눈으로도 눈부시게 떨어지는 빛무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저것들이 내 텅 빈 곳으로 떨어져 준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놓치지 않을 텐데.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별안간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을음 같은 얼룩이라고? 소이연이?”
차갑게 식은 눈빛이 왜인지 가슴을 후벼 팠다. 동시에 고요하게 이연을 부추기는 시선이 꼭 싸움을 거는 것 같아 이상한 오기가 피어났다. 이연으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거울 같은 눈동자.
그 동공에 비친 것은 송연이 아니었으므로.
싸늘했던 양육자, 사촌들의 훼방, 직장 선배의 집요한 괴롭힘에서도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자생한 여자가 바로 소이연이다.
그녀가 두 손을 맞잡았다.
“……권채우 씨, 그거 알아요? 산불이 난 후에도 나무는 가장 먼저 숲을 만들어요.”
“그런데요?”
“나는 송연이었지만, 지금은 나무의사고요.”
“…….”
“나한테는 이제 풍경이 있어요.”
코끝이 찡해져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었다. 물기로 부푸는 유약한 눈동자마저 지금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좀처럼 뿌리 내릴 수 없던 척박한 어린 시절. 무럭무럭 자라야 할 시기에, 이연은 썩고 말라비틀어지고 파내졌다.
그녀를 찌르기만 하는 가시들 틈에서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법만 배웠을 뿐, 깊이 파고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토록 아프고 서러웠던 기억들뿐인데, 이연은 그런 부스러기마저 제 안으로 가져와 덮었다.
이런 땅에서 꽃은 피지 못하겠지.
그러나 누군가는…….
묻고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 없었던 이연의 어설픈 솜씨에도 수고했다 말해 줄 것이다.
“예쁘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만들었어요.”
펑―! 또 한 번 폭죽이 터졌다. 그제야 설산도 단번에 녹일 듯이 환하게 미소 지은 권채우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와 맞댔다.
“그럴 줄 알았어요.”
“……네?”
“떨어진 꽃잎도 소중하게 주워 모으는 사람이, 자기를 더럽다고 생각할 리 없어요.”
“…….”
폭죽이 잇따라 터지고, 사람들의 환호가 들려오는데도 이연은 귀가 먹먹해졌다. 문득 모든 것이 차단된 공간 안에 단 두 사람만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내리치듯 크게 울리는 심장박동이 무섭다.
권채우를 대할 때면 으레 겁을 먹고 뛰어대던 맥박과는 그 소리와 의미가 완전히 달라서.
이연은 땀이 맺힌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다.
“……나, 나는 떳떳하게 살고 싶었어요. 사람은 무서웠고, 규범이든 도덕이든 내 출생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죽었다 깨나도 없을 테니까. 나는 사람을 포기하고 나무를 택했어요.”
“…….”
“아무런 말 없이, 편견 없이, 나를 받아줬거든요. 쫓아내거나 상처 주지 않는 건 정말 숲이 유일했어요.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권채우는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고, 손을 조금도 가만히 두질 못하는 이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꾸 권채우 씨가…….”
“…….”
“권채우 씨가 자꾸만 나한테…….”
“예. 제가 이연 씨한테요.”
“……독이에요. 이런 건 독이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휙 건너뛰는 말에 권채우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럼에도 그는 기민하게 냄새를 맡았다.
소이연이 또, 그의 속을 한바탕 뒤집어 놓으리라는 것을. 권채우는 이어질 사냥을 준비하듯 숨을 죽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침착하게 묻는 말에 이연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저는…….”
불꽃이 쉬지 않고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진짜로 후처를 들인 거네요.”
“예?”
그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알던 그 권채우 씨가, 더는 안 보여서요.”
이연은 꼭 뒤통수를 맞은 아이처럼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 * *
“너거들 뭐 있제?”
커피 잔에 입을 대던 이연이 멈칫했다.
추자는 요 근래 자주 생각에 잠기는 이연과 전보다 훨씬 집요해진 권채우의 시선을 지켜보며 어떤 확신을 가졌다.
“뭐, 뭐가요?”
찻잔을 든 손이 떨린다. 추자는 한껏 느른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점마랑 했나.”
“네?”
“배 타고 홍콩까지는 갔고?”
“……추자 씨!”
“내 말이 뭔지는 알아듣는 갑네.”
추자가 놀리듯 키득거렸다. 그녀는 붉어진 뺨을 지우듯 벅벅 문지르는 이연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야반도주를 했다던 친부모가 한날한시에 죽었을 때, 이연은 열일곱이었다. 추자는 삐쩍 마르고 귀신처럼 머리를 기른 소녀를 그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왼쪽 방에는 친부가, 오른쪽 방에는 친모가.
하지만 소녀는 어느 쪽으로도 들어가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소녀를 보며 꼭 한 번씩 얼굴을 찌푸렸다.
당시 추자는 이십 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과 살림을 차리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먼 친척이라는 남자 쪽에 함께 부조를 넣으러 온 참이었다.
추자는 일손을 도와 육개장을 나르면서도 연신 소녀를 힐끔거렸다. 이연은 다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그렇게 내리 몇 시간을 서 있었다.
마치 죽은 나무처럼.
아무도 그런 소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저 상복을 입은 가족들만이 몇 번씩 소녀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다 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정말 베어 버리는 일만 남았다는 듯, 소녀를 둘러싼 분위기가 기이했다.
그러나 눈칫밥 하나로 숱한 남자를 정복해 온 추자는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저 소녀야말로 이 분해된 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썩은 뿌리라는 것을.
사랑이 아닌 증오.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랐을 소녀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녔을 생명력이랄 게 없었다.
누구는 감처럼 주렁주렁 달렸다는 도화살을 누르기 위해 추할 추(醜)자까지 써가며 색스러운 기운을 눌렀는데, 정작 푸르러야 할 소녀는 다 죽어 가는 고목이었다.
그 상극의 힘이 추자를 끌어당겼던 걸까. 자꾸만 소녀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래도 스치고 말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집에서 축출됐다는 소녀는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 집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추자와 그 연인의 집까지 떠밀려 오게 되었다.
가난한 시인이었던 남자가 돌연 암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지냈다.
추자가 진심으로 온 마음을 내어 주었던 이는 그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므로. 짧지만 행복했던 순간을 전부 지켜봐 준 소녀에게. 화양연화 같았던 찬란한 때의 증인이 되어준 이연에게.
“이연아.”
“네?”
이번엔 추자가 그리해 주고 싶었다. 그녀의 마지막 사랑을 소녀가 함께해 줬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지켜봐 주고 싶었다.
이연의 첫사랑이 움트는 순간을.
“겁먹지 말래이.”
“……!”
이연이 우뚝 굳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도 햇빛도 없는 데서 쎄빠지게 구른 거치고 니는 구김살도 별로 없는 편이다.”
애초에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전무해서 그런 거겠지만.
가끔 추자는 이연이 강한 건지 바보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또한 편안히 숨만 쉴 수 있으면 족하다는 이연이 검소한 건지, 체념해 버린 건지도.
하지만 추자는 이연이 그 이상의 무언가까지 욕심내길 바랐다. 몸을 둥글게 말고 색색 호흡만 하는 게 아니라, 파도처럼 밀려드는 꽃잎에 맞서 그 너머를 보았으면 했다.
화이도도 아니고, 이 병원도 아닌 곳.
생각만 해도 그리워지는 무형의 고향 땅을 찾아내길.
“사랑이 마 자연재해인 건 맞지만은, 꼭 니 부모맹키로 끝나는 건 아이다.”
부모란 말에 불현듯 이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랑하는 기쁨을 니는 이미 알고 있대이.”
“……네?”
“노래하는 나무 맞나.”
“……!”
이연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