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퍽!
그가 바닥에 얼굴을 찧으며 고꾸라졌다.
그곳에는 한껏 짜증이 배인 표정으로 황조윤을 다시 일으키는 권채우가 있었다.
“권, 권채……, 하아……. 윽…….”
“됐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숨 쉬어요.”
그는 넥타이를 입에 물고 황조윤의 목에 초크를 걸었다. 황조윤은 숨이 막히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권채우의 팔뚝을 필사적으로 두들겼다.
불구덩이에 빠진 듯한 혈색과 혹한기에 접어든 권채우의 얼굴은 지독히도 상극이어서.
이연은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규칙했던 호흡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남자는 황조윤을 질질 끌어 강제로 일으킨 뒤, 나뭇가지에 두 손목을 결박했다. 물고 있던 넥타이로 빠르고 능숙하게 칭칭 휘감아 묶었다.
“이거 놔, 이 깡패 새끼야……!”
“손 말고 모가지 매이고 싶어?”
황조윤만이 들을 수 있게 속삭이자 그가 바짝 얼어붙었다. 황조윤은 어떻게든 까치발을 세우고 중심을 잡아 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내가 저번에 알아듣게 설명했던 거 같은데.”
“으…….”
“네가 이럴수록 나만 더 신나는 거 몰라? 난 너처럼 멍청하고 질긴 새끼들 좋아해.”
조여드는 동공이 기이했다. 알 수 없는 섬뜩함이 검은 늪처럼 황조윤을 집어삼켰다.
권채우에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던 그날 이후, 황조윤은 소이연의 남편을 기필코 감방에 처넣겠노라 이를 갈며 진단서부터 끊었다.
그리고 새벽녘 즈음.
느닷없이 조경천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대체 네가 이분을 어떻게 아니?
조경천은 “나도 어려워하는 분이니 혹여나 실수하지 마라.”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반복했다.
씨팔, 이 새벽에 무슨……! 대체 누군데 그래.
그렇게 나간 술자리에서 황조윤은 끽해야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를 만났다.
장소가 무색하게도 술은 한 병도 보이지 않았다. 꼭 군인처럼 바짝 깎은 머리에, 웃음기 없는 얼굴……, 어?
“너……!”
그 옆집 남자였다!
황조윤이 질질 끌려갈 때 자신의 구조 요청을 면전에서 듣고도 무시했던 새끼!
그때 툭, 누런색 봉투가 발치에 떨어졌다.
“이사님 전언이십니다.”
이사? 이사가 누군데?
황조윤은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만 부라리다 이윽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그는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황조윤을 확인한 후에야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조용히 사십시오.”
“니, 니들이 대체 누군데, 이런 걸……!”
황조윤은 학부생 시절, 몰래 키웠던 대마 묘목을 십대들에게 팔았던 적이 있다. 하마터면 철창신세를 질 뻔했지만 조경천 교수의 도움으로 기록 자체가 말소되었다고 들었는데.
대체 이게 왜, 여기서…….
“조경천은 똑똑한데 당신은 영 아니네.”
“……!”
“엎드려야 되는 방향까지 내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합니까? 우리 도련님이랑 재밌게 놀았으면 집에 가서 발이나 닦지, 진단서는 왜 뗍니까?”
“도련님이라니 그게 무슨―”
남자가 턱짓으로 그의 엉망인 얼굴을 가리켰다.
“이사님이 황조윤 씨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수국제약, 권기석 대표이사.
조경천에게 들을 바로는 오래전부터 권 가(家)의 후원을 받아 교수가 되었고, 여전히 후원자라는 명목 아래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좋게 말해 보호지, 자릿세 받는 조폭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나이는 갓 사십쯤 됐을까.
제약회사 브랜드 평판 1위를 달리고 있는 수국제약은 젊고 잘생긴 대표이사 때문에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기업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황조윤은 얻어터진 자국을 볼 때마다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권 이사란 놈이랑 ‘도련님’이 가족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도련님은 무슨, 순 깡패새끼 같은 게……!
가지고 놀아야 하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어야 했다. 황조윤이 이를 악물고 입술을 비틀었다.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나는 그래도 같은 남자로서 널 도와주려고 했는데!”
권채우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등을 돌렸다. 황조윤은 낚시찌에 걸린 생선처럼 있는 힘껏 몸통을 버둥거렸다.
“꽃뱀한테 물리기 전에 도와주려는 건데, 씨발! 너 소이연이 어떤 년인 줄 알아?!”
권채우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이연을 말없이 훌쩍 안아 들었다. 허리와 무릎 뒤쪽으로 배려 없이 들어간 손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저거 완전 콩가루 집안 출신이라고! 그것도 같은 식구끼리 눈 맞고 배 맞아서―”
“알아.”
“……안다고?”
황조윤의 눈이 흔들렸다.
“남편이니까 당연히 알지. 내가 모르는 건 없어.”
권채우는 표정을 굳히며 일축했다. 그는 마취당한 사슴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는 이연을 깊이 끌어당긴 채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황조윤이 악을 써댔지만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다.
“……권채우 씨.”
“예.”
“……나무요. 사람 매달아 놓으면 가지 상해요.”
그가 픽, 바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마구 두들겨 맞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할 일은 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곧 직원들이 발견하고 풀어 줄 거예요. 그런데 이연 씨가 지금 나무나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요.”
“네?”
“내가 얄짤 없다고 했잖아요.”
“……!”
“도망쳤으면 잡히지나 말든가.”
그는 정원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갔다. 권채우를 찌르던 두통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싹 가신 후였다.
“너, 너, 너……!”
황조윤은 별안간 나타난 사람을 보고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이마 쪽으로 한껏 올라붙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조용히 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도련님을 운운하며 황조윤을 협박했던 그 옆집 남자. 그가 파티 홀에서 막 나왔는지 서버의 차림새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 씨팔, 권 이사는 무슨.”
“…….”
옆집 남자, 장범희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통, 준……
“너네 깡패지? 입만 열면 협박질인 놈들이야 뻔하지. 출신 냄새가 그렇게 간단히 덮어질 것 같아?”
“…….”
“그럼 소이연 남편은 뭐야? 그 새끼도 사람 썰던 놈이야?”
문자를 치던 장범희가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퇴역 군인처럼 각은 잡혀있되 어딘가 무던해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매서운 기세를 흘렸다.
“도련님은 우리랑 다릅니다.”
통 준비해. 그가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나뭇가지에는 주인 없는 넥타이만이 달랑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 *
“미안해요. 잘 알아듣게 잘 설명했는데, 그 새끼가 이연 씨 앞에 또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화이도 그랜드 호텔이 자랑하는 이곳, 비너스 가든은 꼭 유럽의 신전처럼 신비로웠다.
남자는 이연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나무가 가장 울창한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가장 커다란 나무 앞에 기대앉았다.
“……혹시 황조윤이 하는 말 들었어요?”
“무슨 말이요?”
“내…… 가족 얘기요.”
그녀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권채우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녀의 목덜미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 싶어 안달이 났을 뿐이다.
“부부인데, 당연히 알고 있었겠죠. 남편인 내가 아내 가정사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그러니까……, 결국 모른다는 뜻이잖아요.
들을수록 황당한 논리였다. 아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어리광을 부렸을 땐 언제고, 지금은 오기로 똘똘 뭉친 듯 했다.
“……나는 말 안 했었어요. 결혼 전에도.”
“…….”
“말하기 싫어서, 작정하고 권채우 씨를 속였거든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연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엉망인 기분으로 털어놓았다. 그녀가 짜놓은 거짓을 말하는 건지, 진실을 말하는 건지 어느 순간 경계도 모호해졌다.
그때 권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
이 상황과는 젼혀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소리. 이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등 뒤로 두 손을 짚은 채 몸을 느슨히 풀고 있었다. 부드럽게 반쯤 접힌 눈과 마주하자 이연은 불현듯 속이 간지러웠다.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는 뭔데요.”
“……네?”
“전남편보다 내가 더 믿음직하다 이거예요?”
“…….”
“고백이에요?”
그게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데요……?
그는 햇빛을 맞은 사람처럼 눈매를 달게 구겼다. 조금씩 진해지는 눈빛이 이연의 온 얼굴에 달라붙는다.
“이연 씨가 갑자기 이러면 나 흥분해요.”
“……그런, 그러는 거 아니에요. 권채우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정사 복잡한 여자한테 꿰인 거라고요……! 분위기 파악 좀 해 봐요!”
“백치라 그런 건 모르겠고―”
그가 건조한 입술 표면을 슬쩍 적셨다.
“좋아해요, 꿰이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