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158)

#38.

“내 꼴을 봐!”

“우리 남편이 많이 봐줬나 봐요.”

그녀가 입매를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 그나마 요즘이 정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선배가 지금 그나마 멀쩡하게 산소를 들이마실 수 있는 거예요.”

이연은 숫제 따분할 지경이었다.

황조윤을 직접 잡은 이후, 막연했던 두려움은 파리채에 찌부러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퍼석한 눈으로 그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네 남편이란 작자가 나보다 널 더 잘 알아?!”

그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그 새끼가 네 가정사는 아냐고!”

이연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른다면 그건 사기 결혼이지.”

“…….”

“세상에 어떤 남자가, 어떤 시댁이 너 같은 애를 순순히 받아 줘?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들일수록 가정 환경을 얼마나 예민하게 따지는 줄 알아?”

“…….”

“그게 가장 객관적인 데이터고, 척도니까!”

이연은 수그러들려는 고개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짤막한 손톱이 깊이, 더 아프게, 손금을 파고들었다.

“너 이거 숨기고 결혼했으면, 혼인 무효 소송까지도 갈 수도 있어.”

“…….”

“네 출생을 미리 알았다면, 네 남편이란 인간은 아마 지금과 같은 선택은 안 했겠지. 네가 정상적으로 가정을 잘 꾸려 나갈 여잔지 의심부터 했을 테니까.”

이연은 지금 이 순간, 온몸을 다 가려 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필요했다. 그런 나무 그늘에서, 불순물 하나 없이 깨끗한 공기를 허겁지겁 마시고 싶었다.

“불륜한 연놈들의 자식이랑 어떻게 살아, 찝찝하게.”

황조윤이 쯧, 혀를 찼다.

“네가 그냥 혼외 자식도 아니고.”

“…….”

“네 아버지가 원래는 이모부라고 했나?”

이연은 구역질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부터 엉망으로 태어난 걸 그래도 나만큼은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이래서 근본도 없는 것들은……!”

결국 이연은 그대로 허리를 굽혀 시척지근한 물을 토해 버렸고, 황조윤은 이맛살을 구기며 다리를 슥 피했다.

그녀의 모친에게는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직접 업어 키웠다는 열다섯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각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씩 낳으며 두런두런 살아가던 자매는, 언니가 돌연 늦둥이를 낳으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불륜. 그것도 딸처럼 키웠던 여동생의 남편과.

까마득하게 어린 제부와의―

사랑.

그 사실이 발각된 후, 당사자인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했고 갓 돌이 지난 아기만이 산산조각 난 집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평생을 엄마처럼 믿고 따랐던 언니의 막내딸.

첫사랑이었던 남편이 외도해서 낳은 아이.

그건 잘못된 결실이었다.

소이연은 그렇게 길러졌다. 친모의 남편에게, 친부의 아내에게. 죄인들이 간단히 버리고 도망친 자리를 어린 몸으로 메워 가며.

두 집에 남은 거라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배우자와 자녀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폐허처럼 움푹 파인 곳에서 소이연은 열일곱까지 자랐다.

화풀이 대상.

심지어 연하고, 질긴, 아주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살펴 줬다 미워하고, 밥을 먹여 줬다가도 회초리를 들고, 안고 재우다가도 대문 밖으로 쫓아내는 변덕스러운 이모는 오히려 괜찮았다.

실수로 이모라고 부르기라도 하는 날에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 아래에서 몇 시간씩 반성문을 써야 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잘못된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동복, 이부형제들은 이연이 조금이라도 웃는 꼴을 견디지 못했다.

같은 비극을 공유하며 더욱 끈끈해진 사촌들은 이연에게 그 죄를 대신 묻곤 했다.

그들은 매년, 이연이 새로운 학급으로 올라갈 때마다 암암리에 돌던 소문을 은연중에 부추기고 앞장서 날랐다.

“있잖아, 쟤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부모가 불륜해서 애만 낳고 도망쳤대.”

“그런데 그냥 바깥에서 낳아 온 자식보다 더 끔찍하다며. 누가 누구랑 배가 맞았냐면…….”

“으악, 더러운 피!”

“야―! 쟤랑 눈 마주치면 사고 나 죽는대!”

“존나 불행의 씨앗이다!”

“쟤랑 이야기하면 우리 엄마 아빠도 바람난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된 소문은 이연이 성인이 되어 직장을 세 번이나 옮길 때까지 쭉 이어졌다.

영원히 이 천형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녀가 어디에 숨었든, 어떻게 연락을 끊었든, 이 거머리 같은 사촌들은 기어이 그녀의 인생을 뿌리째 뽑아 놔야지만 두 발을 뻗고 잤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언제나 추문을 경계했고, 남자를 조심했고, 사람과 거리를 두었고, 혼자이고자 했다.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지긋지긋한 사람이 아니라 고독이었다.

조용한 삶이 계속되는 것. 그녀가 끝끝내 일군 일상을 유지하는 것. 나무처럼 혼자서도 완성된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더더욱 자연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녀의 더러운 피가 조금이라도 정화되는 순간은 나무 아래에 머물 때뿐이었으므로.

탄생부터 부자연스러웠기에 나무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만이 이연의 유일한 안식이자 회개였다.

“처음엔 내가 미울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네 남편도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황조윤이 승리에 차 미소를 지었다.

또다시 발밑이 흔들렸다.

* * *

권채우는 별안간 낙뢰처럼 꽂히는 두통에 한쪽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녀를 잡으려고 뻗었던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꼼짝달싹도 못 했던 건 귀찮게 달라붙는 주동미의 손길 때문이 아니다.

별안간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드는―

“―데요.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바흐.”

“네?”

주동미는 제 말을 흘려들었는지 웬 엉뚱한 답이나 내놓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홱 돌렸다. 꿈틀거리는 미간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주동미도 덩달아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현악 삼중주가 연주되고 있었다. 권채우는 숨도 쉬지 않고 그쪽을 서늘하게 주시했다.

주동미는 매번 궁지에 몰려 발톱을 드러내는 야생 동물이 퍽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쪽 눈썹을 가파르게 꺾어 올리고, 상대의 신체를 속속들이 해체하는 남자의 눈빛에는 속수무책으로 심장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Cello Solo No.1 Prelude.”

권채우가 능숙한 발음으로 나직이 중얼거리자 그녀가 깜짝 눈을 떴다.

“이 곡 좋아하세요?”

“…….”

기억을 잃은 권채우는 안개 속에서 툭 튀어 오르는 제목만 붙잡았을 뿐, 선호의 감정은 알지 못했다.

그는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어긋난 것처럼 뛰었다.

백지상태에서 아내를 봤을 때에는 아귀가 딱 들어맞듯이 흡수가 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저 소리.

마치 찢어질 듯 진동하는 저 얇은 현들의 앙상블에는 속이 메슥거리고, 기도가 붓듯 숨통이 조여들었다. 그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단추를 끌렀다.

“저기, 이런 말 진부한 거 아는데요.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흔한 얼굴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쪽 낯이 많이 익습니다.”

“…….”

“……어, 괜찮으세요? 지금 땀이…….”

권채우는 흔들리는 동공을 감출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소이연을 찾아 기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 그녀를 봐야만 이 일렁이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서.

천장 끝까지 유리로 되어 있는 벽 너머의 아늑한 정원. 때마침 입을 틀어막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는 이연을 목격했다.

“……!”

그리고 그 뒤를…….

모든 청각이 차단되고 주먹이 빠득 쥐어졌다. 산산이 흩어졌던 정신이 순식간에 응집되었다.

그는 곧장 등을 돌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주동미는 어설프게 손만 뻗었다.

“다음번엔 꼭 이름 좀……!”

그러면서도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진짜로 어디서 본 거 같은데.

* * *

이연은 정원 중앙에 자리한 분수대에서 샘솟는 물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렇게 여러 번 입을 헹군 그녀는 또다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커다란 나무를 찾아 그 뒤편에 주저앉았다.

엉망인 호흡을 고르고 싶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숨은 점점 더 가빠지기만 했다.

이연은 제 가냘픈 목덜미를 힘주어 쓸어내리며 꺽꺽, 억지로라도 숨을 토했다. 오랜만의 과호흡이었다.

‘네 아버지가 원래는 이모부라고 했나?’

“하아……. 하아……. 하아…….”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순간 몰아치는 호흡을 통제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으…….”

잔디를 꾹 밟는 목발의 고무 패킹이 시야에 박혀 들었다. 꽉 막힌 콧구멍으로 간신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보니, 황조윤이 희열에 찬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알던 소이연이지.”

“하아……. 하아…….”

“보고 싶었다, 이연아. 이런 게 정말 그리웠어.”

그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학자들이 아무리 식물도 지각력이 있네, 감정이 있네, 지껄여 대도 나는 그게 참 우스워.”

“윽……, 하아…….”

“그냥 풀때기잖아. 내가 살리고 죽일 수 있는.”

황조윤이 이연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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