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158)

#37.

길쭉한 다리와 반듯한 어깨선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검은색의 정장을 갖춰 입은 그는 마치 본래의 피부를 되찾기라도 한 듯 잘 어울렸다.

슈트는 일상복과 달라 불편할 법도 한데, 그는 소매를 당겨 보거나, 깃을 매만지며 고개를 쭉 빼 보는 등의 머쓱한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제 이름과 나이도 몰랐던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태도여서, 오히려 숙련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썹 아래로 흐트러진 머리칼, 묶지 않고 축 늘어뜨린 넥타이, 희멀건 맨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습은 이미 그 자체로도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연은 그런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꼭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서.

번들거렸던 검은 우비도, 후줄근했던 환자복도, 문득 ‘진짜 권채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허무맹랑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믿을 건 사위뿐이 읎다.”

추자가 권채우에게 옷을 떠넘겼다.

남자는 제 손에 들린 새 옷과 입술을 불퉁히 내밀고 있는 이연을 번갈아 보더니 알 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권 서방, 자네만 믿겠네.”

“추자 씨…….”

이연이 만류하듯 눈을 흘겼으나 추자는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눈치가 빠른 만큼 모르는 척도 수준급이었다.

이연이 왜 자신을 가리려고만 드는지, 그 사연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추자는 바랐다.

언젠가는 껍데기를 탈피하고 나비가 되는 순간을 보고야 말겠다고.

벌써 십 년이 훌쩍 넘는 기다림이었으나 조급하진 않았다. 언제까지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이연 씨, 이 옷이 별로예요?”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권채우는 한쪽 눈썹을 짓궂게 올리더니 팔짱을 꼈다.

“그럼 전 이걸로 할게요.”

“뭘요?”

“소원이요.”

“……네?”

“이연 씨가 그랬잖아요. 스킨십 말고, 뭐든 하나 들어주겠다고.”

그가 이연의 품에 풀썩, 옷을 안겨 주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거기서 굳이 입을 뗐겠어요. 핥아먹을 게 얼마나 많이 남았었는데.”

이연은 입을 열었다 닫으며 벙찔 뿐이었다.

* * *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화환들이 눈을 덮쳤다. 이연은 느슨하게 껴 두기만 했던 권채우의 팔을 순간 꽉 둘러 안았다.

이연은 짧게 호흡을 내뱉으며 머릿속으로 나름의 속전속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임 회장님께 얼굴도장만 찍고 튀어야지.’

다리에 쩍 달라붙은 스타킹이 간질간질했다. 이연은 공연히 무릎을 굽혔다 펴며 쇄골까지 파인 스퀘어 넥을 만지작거렸다.

종아리를 드러내고 하이힐을 신은 제 모습이 낯설어 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긴장돼요?”

그때 이연을 에스코트하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머리는 그냥 슥슥 빗어 넘겼던 것 같은데,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는 사뭇 달라 보였다. 여유로우나 묘하게 각 잡힌 자세가 꼭 어른 같아서.

이연은 마땅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긴장이 아니라, 그냥 좀 불편해서요.”

완벽한 비율의 미간과 콧대, 절로 시선이 가는 관능적인 입술과 턱선. 그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설마 이연이냐?”

그때 반갑지 않은 인사가 다가왔다.

D 병원의 조경천 원장은 흡사 황소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이연이 원래 이런 얼굴이었던가?

반묶음 한 머리는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며 물결이 쳤고, 분처럼 하얀 피부와 단아한 이목구비가 새삼스러웠다.

조 원장은 눈에 아교가 붙은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짙은 녹색의 원피스가 가녀린 몸매와 고운 살결을 톡톡히 받쳐 주고 있었다.

“세상에, 황조윤이가 보면 놀라 자빠질 게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연은 속이 나빠져 그를 차갑게 지나쳤다.

그녀는 오랜 시간 사람들을 배척하는 방법으로 비호감을 사는 옷차림과 냄새를 이용해 왔다. 그건 이연 나름의 가시였고, 효과도 썩 좋았다.

물론, 황조윤 같은 예외도 있긴 했지만. 이만하면 부모와는 다른 인생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녀 인생에 사람과 감정은 필요치 않다고.

고독만이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연 씨, 속 안 좋아요?”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나갈까요?”

권채우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왔다. 이연은 별안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그의 손을 퍽 단호히 뿌리쳤다.

“……아니요, 안 나갈 거예요.”

나는 선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시큼하게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키며 웃고 떠들기 바쁜 사람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어? 원장님!”

그때 마침 웬 여자가 길쭉한 팔을 좌우로 흔들며 다가왔다. 몸에 딱 붙는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누구…… 신지…….’

사회적인 모임에 참석한 병원의 원장으로서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도 없었다. 이연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일 때였다.

“저 주동미임다!”

“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펑퍼짐한 잠바를 입고 만났던 그때의 주동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안녕하세요.”

“와―! 여기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슴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우아한 메이크업, 그리고 올백으로 넘긴 단발이 상당히 도회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자리가 의외로 익숙한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지나가던 서버에게 물 흐르듯 건넸다.

응급실에서의 수수했던 모습보다, 화려한 육식계 미녀 같은 지금의 주동미가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면 그건 착각일까.

그런 이연의 의문을 읽었는지 그녀가 능숙하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오늘 주인공이 제 외삼촌이시거든요.”

“임 회장님이요?”

그녀가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주동미는 말끔한 차림의 권채우를 보고 입꼬리를 진하게 올렸다. 이연은 그럴 때마다 편도가 부은 것처럼 침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다시 만나면 이름 알려 주기로 했었는데.”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권채우는 조금 전부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연만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 그 한결같은 시선을 간파한 주동미는 이내 타깃을 바꿨다.

“직원분이랑 단둘이 얘기 좀 나눠도 될까요?”

그건 자리를 비켜 달란 소리였다.

안면이 굳어지려는 것을 애써 미소로 무마하며 이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할 때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죠.”

권채우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온갖 아름답고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 찬 이 파티 홀에서 권채우의 음성만이 천둥처럼 그녀를 흔들었다.

“유부녀로서 똑똑하게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번에도 실수하면 그땐 정말 얄짤 없을 예정이라서요, 이연 씨.”

“…….”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빳빳이 세웠다. 귀밑에서부터 쇄골까지, 가녀린 뼈대가 툭 불거졌다.

그리고 이연은―

조경천, 황조윤, 하이힐, 드레스, 조명, 샴페인, 사람들, 주동미, 다시 권채우로 이어지는 버거운 생각에 그대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 * *

밖으로 나오니 갑갑했던 숨이 조금은 트였다.

멍하니 정원을 걷고 있자니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 좋게’ 잘린 둥그런 나무들이 즐비했다.

이연은 가슴을 누르던 잡생각도 일순간 잊어버린 채 그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연아.”

지긋지긋한 목소리에 등이 우뚝 굳는다.

쓸데없는 물기와 기름기가 찌꺼기처럼 음성에 끼어 있는 사람은 그녀 주위에 딱 한 명뿐이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뒤를 돌자, 아니나 다를까 이마와 코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목발을 짚고 있는 황조윤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연의 옷차림을 본 그는 잠시 멍해졌다가 확 인상을 썼다.

“너 옷이 그게…….”

그러나 처참한 꼴의 그를 보면서도 이연은 일말의 감정조차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시퍼렇게 멍든 눈가가 아주 잘 어울렸다.

안타까워야 한다면 차라리 작은 전구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나무들에 몇천 배는 더 마음이 쓰였다.

전구 장식은 그들의 생장에 해를 끼친다. 조직을 조금씩 건조시키므로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한다. 그러다 조금씩 말라 죽는―

“이젠 아예 모르는 척이니?”

생각이 뚝 끊겼다.

“이연이 넌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해?”

“……제가요? 왜요?”

황조윤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와 다트를 꽂듯 손가락질을 했다.

“네 남편, 그거 정상 아니야.”

“선배도 그래요.”

“뭐?”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남의 집 창문을 볼따구니로 쓸고 닦는 거, 그건 뭐 정상이에요?”

이연이 건조하게 받아쳤다. 황조윤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눈을 부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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