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삐, 삐, 삐―
이윽고 도어 록 버튼이 눌리고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젠 번호까지 알아요?”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의사가 집을 방문했을 때에는 권채우가 의식이 없었거나, 이연이 문을 열어 줬을 경우여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악의적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빨았다.
“그만, 그만요!”
“싫어요.”
마침 비밀번호가 틀렸는지 요란하게 삐빅 삐빅, 소리가 났다. 의사는 재차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고, 이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만하라고 했어요!”
그의 머리통을 가볍게 치며 경고하자, 권채우가 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만두면요?”
“네?”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뭐 해 줄 건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삐, 삐, 삐―
신중하고 느릿한 소리가 잇따라 들린다. 그러나 이연에게만큼은 그게 말채찍보다도 더 안달이 나는 재촉이었다.
이연이 잠시 갈팡질팡하는 동안, 권채우가 다시 음부를 애무하려는 듯 자세를 잡자 그녀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알았어요!”
“…….”
“스킨십 말고, 뭐든 하나 들어줄게요!”
“뭐든?”
그녀가 문 쪽을 힐끗대며 다급히 끄덕거렸다.
그에 남자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리며 이연의 몸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권채우가 침대 밖으로 일어선 순간,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연은 하반신을 미처 가릴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한발 앞서 그녀를 이불로 덮어씌운 권채우가 으쌰, 소리를 내며 그 솜뭉치를 공주처럼 안아 들었다.
“어, 어…….”
마침 문가에 선 의사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벅거렸다. 권채우는 혹 그녀의 머리카락이라도 보일세라 정수리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초등학교에서 도덕 안 배웠습니까?”
침입자를 쏘아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그는 괜한 시비를 걸며 1층으로 내려갔고, 의사는 침대에 널브러진 이연의 바지와 레이스 팬티를 보고 허옇게 굳어 버렸다.
* * *
“내려 줘야죠!”
이연은 방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안고 서 있는 남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불 안이 덥고 답답했다.
그러자 머리 위를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이 쑥 내려가더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
“…….”
권채우는 눈썹을 구긴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난 아직 이 집 비밀번호도 몰라요.”
예민하게 날 선 미간이 더욱 깊이 파였다.
“근데 저 새끼는 당연하다는 듯 누르고요.”
“…….”
나도 뒷문 번호는 몰라요.
이연은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싶어 눈동자만 도로록 굴렸다.
뒷문은 의료진들만 썼었고, 또 2층 자체를 권채우 씨 형님이 올려 준 거기 때문에…….
“비밀번호가 뭐예요.”
그가 따지고 든다면 할 말이 없어서―
“만약 우리 결혼기념일이거나, 이연 씨 생일이거나, 이연 씨 핸드폰 번호를 저 새끼가 자연스럽게 누르고 들어온 거면 진짜 가만 안 둬요.”
“……!”
누, 누구를요……? 이연은 바짝 어깨를 굳혔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하나도 모르네요.”
그가 힘겹게 침을 넘기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리 결혼기념일, 이연 씨 생일, 핸드폰 번호.”
“…….”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가 이연을 힘껏 껴안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머리를 얼마나 세게 비벼 오는지, 이불이 쿠션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어깨가 얼얼했다.
“내가 남편인데 남보다도 이연 씨를 몰라요. 그럴 때마다 조급증이 나서 돌아 버리겠어요.”
귓가를 스치는 그의 뺨이 후끈후끈했다.
“원래는 전부 알고 있었을 텐데.”
아뇨, 그때도 몰랐어요……. 이연은 얼이 빠지려는 듯한 표정을 애써 정리하며 그를 달래 보기로 했다.
“……괜, 찮아요. 권채우 씨는 다쳤잖아요.”
“그래도 용납이 안 돼요.”
그가 웅얼웅얼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뒷문 비밀번호부터 시작해요. 나는 이연 씨 생애 주기를 전부 꿰고 있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요.”
“어…….”
혓바닥이 바짝바짝 말랐다.
……안 돼.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아지면 안 된다.
권채우는 집안일에 적당히 무관심해야 좋았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나’에 대한 적응기가 끝나자, 그의 관심사는 필연적으로 넓어졌다.
이연과 그 주변으로.
그의 과거나 가족, 취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이연에 대해서만큼은 기이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권채우가 모든 것을 알고자 할수록, 이연의 부실한 논리는 금방 탄로가 날 것이다.
골치가 아파 왔다.
“……권, 권채우 씨.”
그런 남자의 신경을 돌릴 수 있는 건―
“근데 나, 그런 소리는 살면서 처음 내 봤어요.”
지금으로선 섹스뿐이었다.
“……!”
고개를 치켜든 그의 동공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시선이 확 멍해지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적중한 것 같았다.
“권채우 씨는 나랑 계속 그러고 싶은 거예요?”
이연이 꼬물꼬물 손을 빼내 그의 입술을 건드렸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우습게도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그러려면 권채우 씨가 얼른 나아야죠. 나는 나무만 만져 봐서, 평범하게 딱딱한 거 가지고는 별로 놀랍지도 않거든요.”
“…….”
“얼른 제대로 붕대 감고, 빨리 회복해요.”
“……지금 일부러 이래요?”
그는 턱을 꽉 악물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남자의 목울대가 초조한 듯 일렁였다.
“이연 씨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한심한 종자로 만들 셈이에요. 이젠 하다 하다 나무한테까지…….”
그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말끝을 흐렸다.
권채우는 침대 위로 이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럼 기대해도 되는 거죠.”
“네?”
“나무만 만져 봤다는 이연 씨 손바닥.”
“……!”
“나 빨리 나을게요.”
그가 웃음을 참듯 입꼬리를 미묘하게 꿈틀댔다.
권채우가 자리를 뜨고 남은 자리.
이연은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 한편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죽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진짜로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요…….”
이연은 역시나 악몽을 꾸는지 흐느끼는 남자를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낮에는 사납고, 능글맞으며, 매사 극단적으로만 구는 사람이 밤만 되면 세상 약한 소년으로 변한다. 그녀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가.”
“…….”
“—올게…….”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이었지만 이연은 어느새 덤덤해진 얼굴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권채우의 밤을 훔쳐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이 가슴이 무거워졌다.
대체,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서러운 걸까.
어느 날은 누군가를 찾았고, 어느 날은 숨겼고, 어느 날은 도망쳤다. 이연은 잘게 떨리는 남자의 입술을 보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늘따라 우는 남자를 그대로 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갔다.
흙과 허브 냄새가 가득한 사무실은 온통 투박한 물건투성이였다.
그녀는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고 한참을 뒤적거리다 마침내 맨 밑바닥에서 오래된 CD를 하나 꺼내 들었다.
“아…….”
돌연 반가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감돌았다.
그건 이연이 타인에게 처음으로 받아 본 선물이자, 첫 번째 나무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다. 바래진 CD 표면을 쓰다듬어 보는 손길이 떨렸다.
클래식 음반이었다. 그녀는 뒷면에 적힌 제목 중 하나를 핸드폰에 받아쓰고는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2층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연은 다시 권채우의 옆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찾아 재생했다.
『Bach : Suite For Cello Solo No.1 In G, BWV 1007 - 1. Prelude』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수면 등만이 고요히 켜진 방 안.
남자의 앓는 소리만이 달빛처럼 고여 드는 밤에 나긋한 멜로디가 섞여 들었다.
이연은 다른 의미로 그가 푹 잠들기를 바라며, 오랜만에 그리운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자의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 * *
“가서 웃기만 하면 된다 안 카나!”
“그래도 저건 절대 싫어요.”
이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추자는 투명한 비닐 백에 싸인 이브닝드레스를 흔들며 스읍―! 하고 눈을 부라렸다.
오늘은 농업 회사 법인인 (주)주림 묘목공원 대표의 40주년 축하연이 있는 날.
농업이나 산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임 회장은 빠뜨릴 수 없는 저명인사이자 지역 유지여서, 이런 날엔 꼭 얼굴을 내비쳐야 한다는 게 추자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연이 학을 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추자가 들고 있는 옷에 있었다. 그 시선을 간파한 추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와 그러는데. 노출된 곳도 없고 깔끔하다.”
이연이 워낙에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기를 선호했던 지라, 추자는 더욱 신중하게 옷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차분한 스퀘어 넥의 머메이드 원피스.
짙은 녹색은 우아했고, 종아리까지 적당히 떨어지는 기장과 허리선을 강조하는 라인은 고급스러웠다.
그것을 무표정하게 보던 이연이 제 침실을 가리키며 비딱하게 맞섰다.
“저도 옷장에 입고 갈 옷 많아요.”
“그건 옷이 아이고, 거적때기다.”
추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을 희번덕였다.
때마침 2층에서 권채우가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