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158)

#33.

“실례지만 두 분은, 어떤 사이십니까?”

그때 주동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때마침 필요한 질문이었다. 이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의 고집스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제…… 직원인데요.”

그의 모든 행동이 증후군의 증상 때문이라면, 그녀는 진짜 열정과 병증의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 했다.

“밤마다 같이 자고 있다는 건 왜 빼요?”

권채우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 짤막한 비웃음이 어찌나 신랄하던지, 주동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를 볼 정도였다.

별안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 그렇습니까. 젊으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필수임다.”

그러나 잠깐 굳는 듯했던 주동미는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단단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럼 제가 명함이라도 좀 받아 볼 수 있겠습니까.”

“직원은 아직 명함이 없는데,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그녀가 쏘아 올린 시험의 시작이었다.

이연은 급한 대로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주동미는 허리를 재차 숙이며 공손하게 명함을 받았다.

“아……! 나무의사셨습니까?”

그녀가 눈을 크게 키우며 반갑게 이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정확히는 입맛을 다시는 눈으로 권채우를 한 차례 훑었다.

“나무 병원 직원이 어떻게 멧돼지를 도끼로 때려잡습니까? 함부로 재능을 낭비하시는 거 아님까? 실례지만 나무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꽃 다듬어요.”

남자는 가시 같은 시선을 여전히 한 사람에게만 깊숙이 찔러 넣은 채 무심히 대꾸했다.

“꼬, 꽃 말씀이십니까.”

주동미의 얼굴에서 푸시시, 무언가 식는 게 보였다. 눈썹을 찌푸리던 그녀가 돌연 이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산에서 구조를 하다 보면 가끔씩 나무를 훼손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연은 이런 식으로 고객을 주워 담았던 적이 없어 당황했지만 애써 의연한 척 굴었다.

“네, 얼마든지요.”

추자 씨, 나 한 건 했어요……!

그러는 동안에도 주동미의 열렬한 시선은 여전히 권채우에게 꽂혀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의 손목을, 눈을, 집요하게 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동미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연은 이성 관계에 밝지 못했지만 주동미가 보여주는 태도는 퍽 명확했다. 그건 자신감이었다.

시험을 치러야 할 사람은 분명 권채우였을 텐데도, 그녀 또한 휘말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럼 빨리 쾌차하시길 빌겠슴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꼭 이름부터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주동미는 폭풍처럼 왔다 갔다. 한쪽에 모여 있던 동료들이 그녀의 등을 마구 두드리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이연 씨.”

“…….”

“직원?”

곱씹듯 나직이 묻는 음성이 스산하다.

“날 소개하는 말이 그딴 것밖에 없어요? 내가 어떤 타이밍에 눈깔이 뒤집히는지 잘 알면서, 왜 또 등을 보여요?”

경고하듯 노려보는 시선이 범상치 않았다. 이연은 가까스로 침을 꿀꺽 넘겼다.

“내가 쫓아가서 무슨 짓을 할지 알고요.”

“……주동미 씨가―”

―하고 이연이 부연하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봤다고 벌써 주동미야.”

권채우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연의 정수리에 기어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낮게 웃었다.

“이연 씨는 나무만 만져 봐서 모르죠?”

동공만 슥 움직여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선 기이한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개를 아주 좆 같이 다루네.”

* *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권채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보고 있었고, 이연은 하릴없이 운전대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냉기가 폴폴 흐르는 차 안.

은근슬쩍 그를 곁눈질하던 이연은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훔쳐보다 들킨 건 권채우일 텐데.

그는 눈썹 끝만 살짝 올렸다 내렸을 뿐, 냉랭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힐끗 본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에 어둑한 희열이 스며드는 게 똑똑히 보였다.

오히려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한 건 이연이었다. 괜스레 가슴이 쿵쿵 뛰고 입 안이 말랐다.

그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한쪽 뺨이 간지러웠다. 꽃가루처럼 유해한 시선이 자꾸만 달라붙는 통에 살갗이 부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불가해한 감각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숨 막히는 귀로였다.

권채우는 의사가 급한 대로 내주었던 환자복을 목 뒤에서부터 잡아당겼다. 현관문을 넘자마자 등, 머리, 팔 순서대로 옷을 잡아 빼는 동작이 허물을 벗듯 자연스러웠다.

손목에 두른 간단한 깁스, 상체를 가로지르는 두툼한 붕대. 피가 말라붙은 머리와 얼굴.

별안간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씻겨 주세요.”

“……제, 제가요?”

“개가 실컷 나가 놀다 더러워졌으면 주인이 깨끗하게 씻겨 줘야죠. 털도 말려 주고.”

그녀는 숫제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나무만 만져봐서 그런가, 역시 손버릇이 별로네요.”

“언제는 봉사하지 말라면서요……!”

“봉사는 대가 없는 행위지만―”

그가 미약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이연 씨가 해 주는 거라면 그게 뭐든지 배로 돌려줄 생각인데. 나를 얼마나 염치없는 새끼로 본 거예요?”

“…….”

“씻겨 주세요.”

자분자분한 어조였음에도 소리 없이 아래를 향하는 동공 때문에 몸이 바짝 굳었다.

욕조가 좁았다.

권채우는 방만하게 풀어진 자세로 두 다리를 욕조 끝에 올려 두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미지근한 물이 한 움큼씩 타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씻겨 나간 연한 핏물이 욕조 깊숙이 잉크처럼 퍼졌다.

고개를 뒤로 젖힌 남자는 이연이 들어오는 소리에 눈동자를 돌렸다. 툭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들썩였다.

“…….”

“…….”

습기가 살갗에 눌어붙는다.

이연은 기본도 지키지 않고 물에 푹 잠겨 있는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붕대가 다 젖었잖아요!”

“어차피 다시 온다면서요, 그 의사.”

나른한 음성 위로 차르르 물소리가 떨어졌다.

“그럼 대체 바지는 왜 입고 들어갔어요?”

“손이 아파서 버클을 못 풀었어요.”

“……그걸 누가 믿어요!”

누가 들어도 황당한 변명이었다. 조악한 연장으로 멧돼지도 도살한 사람이 고작 손목이 아프다고 바지 버클을 못 푼단다.

“거기 멀쩡한 손 있잖아요.”

“해 봤는데 자꾸 헛손질만 해서 비참했어요.”

그가 욕조 테두리에 툭 걸쳐 놓은 팔뚝 위로 뺨을 문질렀다. 그러나 이연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는 눈빛은 시무룩한 음성과 달리 형형했다. 그 선명한 시선엔 웃음기마저 고여 있었다.

“식물인간으로 지낸 시간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무섭고 불안해요.”

그렇게 아주 대놓고 약한 척을 한다.

“이연 씨, 얼른요. 빨리 씻고 쉬고 싶어요.”

이연은 문을 박차고 나가질 못했다.

방죽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는 판에, 이미 기억의 실마리를 찾은 남자를 자극해 봤자 득 될 게 하나 없었다. 한번 균열이 난 벽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난 수건파예요. 수건으로 씻겨 줄게요.”

“버클부터 풀어 줘요.”

이연은 망설이지 않고 욕조 안으로 손을 넣었다. 따뜻한 온도가 바짝 언 그녀를 단번에 녹였다. 조심스럽게 그의 바지춤을 만지는데 그가 아, 하고 짤막한 소리를 냈다.

“……!”

그제야 이연은 자신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꺼풀을 올리자마자 관자놀이를 괴고 있던 그와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거기 아닌데요, 이연 씨.”

“네?”

“거긴 내 불알인데. 좀 더 위로 올라와야죠.”

그녀가 기겁하며 손을 떼자, 권채우는 뭐에 심기가 상했는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연의 겨드랑이를 낚아 올려 욕조에 빠뜨려 버렸다.

“……악!”

정확히는, 그의 몸 위에 올려놓았다.

눈 깜짝할 새에 옷이 젖었다. 이연은 남자의 가슴팍을 짚고 매섭게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장난해요?!”

그녀가 소리치자 권채우는 느른하게 웃었다.

“장난질은 이연 씨가 먼저 했죠.”

“내가 언제요……!”

“내 아내가 날 가판대에 올려놓고 중매를 서는데 피가 거꾸로 안 솟아요?”

그건 다 끝난 얘기 아니었어?

하지만 권채우의 비틀린 입매를 보는 순간, 이 순간을 위해 그가 심통을 참아 왔음을 깨달았다.

언쟁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이다.

“가끔 이연 씨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게 무슨…….”

“개 목줄만 쥐고 있으면 뭐 해요. 엉덩이는 있는 대로 다 빼는데.”

그럴싸한 지적에 이연은 벙어리가 되었다.

“고작 버클 푸는 것도 벌벌 떨면서, 날 아래에 까는 것도 이렇게나 서툴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한테 팔 생각을 해요?”

“……!”

“아깝지도 않았어요?”

이연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남자가 이연의 젖은 가슴을 물었다.

브래지어 위로 올라온 말캉한 살을 쭉 빨아들이자 높다란 콧대가 젖가슴을 납작하게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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