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도끼 들고 웃지 말아요!”
아무리 전후 사정을 안다고 해도, 도끼 든 살인마가 나무 밑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이연은 더더욱 나무 기둥을 꼭 붙들었다.
의사의 진단에 잠깐이나마 배신감을 느꼈던 자신을 행주로 빡빡 지우고 싶었다.
모름지기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건데.
그때 권채우가 윽, 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짚었다.
“……권채우 씨, 어디 다쳤어요?”
그녀가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하기야 그렇게나 크고 광포한 멧돼지를 잡았는데, 아무리 권채우라도 멀쩡하진 않을 것이다.
“많이 아파요?”
남자는 상체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놀란 이연이 급하게 나뭇가지를 바꿔 잡을 때였다.
철컥,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끼 내려놨어요.”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한 남자가 살랑, 손짓했다.
“그러니까 이젠 이연 씨가 내려올 차례예요.”
* * *
권채우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엉망이 된 옷을 가위로 자르자 푸르죽죽한 멍이 상체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500kg가 넘는 짐승이 온 힘을 다해 그를 밀고 또 밀었으니, 숫제 교통사고와 다를 게 없었다. 목 아래에 말뚝을 박고 버텼던 손목은 이미 인대가 늘어났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다급히 응급실로 내려온 의사는 전후 사정을 듣더니, 고작 이 정도밖에 다치지 않았냐며 오히려 혀를 내둘렀다.
“조금 있다 제가 집으로 가겠습니다.”
응급 처치를 마친 의사는 알루미늄 트레이를 들고 이내 커튼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저 의사 덕분에 따로 접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급한 대로 차를 몰고 응급실로 오긴 왔는데, 하마터면 남편의 주민 등록 번호도 적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뻔했다.
“이연 씨.”
차단용 커튼이 닫히자 침대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이연은 힘이 쭉 빠져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았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 사람은 누구예요?”
“……누구요?”
“저 남자요.”
권채우는 의사가 나간 자리를 무심히 턱짓했다.
“의사 선생님이요?”
“예.”
그가 퍽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상체에 하얀 붕대를 칭칭 두르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얼굴이 상당히 불량스러웠다.
“……의사 선생님은 그냥 의산데요?”
이연이 어리벙벙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어디선가 의미심장한 콧소리가 들렸다.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명하려는 차가운 안광.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매서웠다. 순간 겁을 집어먹은 이연은 갑자기 변명하는 아내가 되어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저분, 권채우 씨 주치의예요.”
“…….”
“권채우 씨가 식물인간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전담하고 계셨어요. 집에서 병원까지 왔다 갔다 해 주는 거 봤죠? 그게 다 권채우 씨 개인 주치의라서 성심성의껏―”
“우리가 그렇게 돈이 많아요?”
불쑥 그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식물인간 뒷바라지하면서 이연 씨는 등골이 다 휘었을 텐데.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오는 주치의는 어떻게 고용했어요?”
“어…….”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삐딱하게 올라간 눈썹이 심상치 않았다.
어느 순간, 모든 일에 있어 제 발부터 저리게 된 이연은 바짝 긴장을 했다.
여기서 제대로 답을 못한다면 남자는 괜한 음모론에 빠져 거짓말의 구멍을 들춰낼지도 모른다.
“권, 권채우 씨 집에서, 그러니까 시댁에서, 권채우 씨 형님이,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주셨어요!”
“…….”
“진짜예요, 저분은 참 의사니까 걱정 말아요. 시댁에서 보내 준 사람인데 설마 수상한 사람이겠어요? 밤낮 할 것 없이 진짜 열심히 하셨어요.”
“밤낮 할 것 없이?”
“네!”
“이연 씨 혼자 있는 집에 저 사람이 드나들었어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이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네?”
“드나들었어요?”
힘이 실린 목소리가 재차 그녀를 압박했다.
“그……렇죠? 그게 장점이었는데요?”
동시에 이연은 흠칫 놀라 상체를 뒤로 물러야 했다.
나무를 닮은 아맛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부패한 미라처럼 꽉 바스러진다. 한 사람의 눈이 어디까지 메마를 수 있는지, 그녀는 그 모든 찰나를 빠짐없이 목도했다.
“그래서 급할 때는 저 남자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권채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권채우 씨는 다쳤고, 저분은 주치의니까―”
“밤낮 할 것 없이 뭐 했는데요.”
“어……, 치료요?”
“누가, 누굴, 어떻게 치료하는데요.”
그가 티셔츠의 목을 잡아당겨 턱을 닦아 냈다. 볼 안쪽을 짓씹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쯤 되니 이연도 남자의 이상을 조금씩 알아차렸다.
“우리 지금, 같은 의사 선생님 가지고 대화하는 거 맞아요? 사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
“의사 선생님 다시 부를까요? 인지 능력이 살짝 떨어진 것 같은데…….”
이연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권채우 씨가…… 머리 쪽이 많이 취약하거든요.”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힐끗거리자 권채우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비로소 끊어질 것 같던 신경이 누그러지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미안해요.”
다소 길게 감았다 뜬 눈이 명징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아서.”
대충 알코올로 닦아 냈다지만 그는 여전히 피로 얼룩덜룩했다. 그 모습이 분장을 지운 대기실의 배우 같아서,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이연 씨가 묘하게 저 의사를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산에서도 갑자기 혼자 있으려는 게, 저 남자랑 얘기한 다음부터고.”
“…….”
이연은 하릴없이 옷자락만 문질렀다. 꿰뚫어 오는 시선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건 너무 속이 빤히 읽히는 일이었다.
“내가 병신처럼 누워 있는 동안, 저 새끼는 신체 멀쩡하게 이연 씨 집을 들락거렸다고 생각하니까.”
이연의 입이 차츰 벌어졌다.
“속이 미치게 끓었어요.”
그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다친 새처럼 흉통을 미약하게 부풀렸다 꺼뜨렸다.
이연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억이 없다 보니 생각이 과해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는 유달리 이연과 엮인 상대에게 지나치게 굴었다.
이게 정말 증후군의 증상 때문이라고?
그녀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힐 때였다.
“멧돼지 잡으신 분, 여기 계십니까?”
별안간 커튼이 확 젖혀지고 아나운서처럼 단단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얼굴을 쏙 들이민 여자는 권채우의 몰골을 보더니 매력적인 덧니를 드러냈다.
“아, 맞네.”
그녀가 안쪽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여자는 ‘야생 동물 구조 센터’라는 로고가 박힌 큰 잠바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주근깨가 보이는 화장기 없는 얼굴. 그리고 턱까지 기장을 맞춘 단발머리가 명랑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녀가 씩씩하게 허리를 넙죽 굽혔다.
“멧돼지 사체는 저희가 잘 수습하고 오는 길입니다. 혹시 몰라 ASF 바이러스 검사도 마쳤슴다.”
이연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커튼 뒤로는 같은 색의 잠바를 입은 남자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소 거리를 두고 서 있었지만, 빛나는 안광으로 이쪽을 흥미롭게 주시했다.
“잡아다 주셔서, 아니, 신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위에서 압박이 심했거든요. 사람들을 자꾸 물어 죽여서 식인 멧돼지라고 악명까지 붙은 놈이었지 말입니다.”
기강이 잡힌 말투였으나 묘하게 느슨했다.
“덩치가 보통이 아니길래 엽사 팀까지 따로 꾸려서 대비 중에 있었는데 저희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네요.”
그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소리 내 활짝 웃었다.
“게다가 경동맥이 찢겨서 사냥당한 건 처음 봤슴다.”
이제 여자는 권채우를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두 뺨이 사과처럼 물들고, 입가에 걸린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보니까 도끼랑 말뚝으로 잡으셨던데. 맞슴까?”
옹골찼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초롱초롱한 두 눈망울에선 숨길 수 없는 호의가 넘실댔다. 이연은 그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
“…….”
권채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침묵이 사정없이 길어지자 보다 못한 이연이 “네.”하고 대신 대답을 했다.
“아, 제가 너무 흥분을 해서 실례를 범했슴다. 저는 구조 센터 포유류 팀에서 일하고 있는 주동미라고 합니다.”
갑자기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같은 잠바를 입은 동료들이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리를 보내고 있었다.
등을 움찔거린 주동미는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는 이내 배짱 좋게 외쳤다.
“연락처 좀 알려 주십시오!”
주동미의 당당한 기세에 이연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찰나를 귀신같이 알아챈 권채우가 그녀의 손목을 빠르게 낚아챘다. 올가미처럼 꽉 붙들린 곳이 얼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