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158)

#31.

이연은 수술을 마친 나무들의 경과를 체크하기 위해 왕진 가방을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구불구불한 길이 나왔다. 그녀는 고르지 못한 땅도 익숙하게 피해 가며 척척 나아갔다.

“이연 씨.”

그리고 몇 번이나 집에 데려다주려 했지만 고집스레 여기까지 따라온 권채우가 이연의 왕진 가방을 뺏어 들었다.

“잠깐만요.”

“왜요?”

앞만 보고 걷던 그녀가 맥없이 멈춰 섰다. 눈이며 입매가 도토리 껍질처럼 딱딱했다.

“표정이 아직도 안 좋잖아요.”

“…….”

“어디 아파요? 아니면, 혹시 화났어요?”

이연의 안색을 꼼꼼히 살피는 눈이 예리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요―”

그녀는 얼버무리려 했지만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기세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싸늘한 의지가 그의 눈에 맺혀 있어서. 방어적으로 입씨름을 해 봤자 그를 이기는 건 요원할 것 같았다.

병원을 나설 때부터 굳어 있던 표정이 자포자기라도 한 듯 풀어졌다.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그래요.”

“누구한테요?”

“…….”

“의사예요?”

그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가자 이연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저요! 제가 저한테요!”

이연은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남자의 모든 행동이, 그녀의 거짓말에서 비롯된 맹목이 아니라 병의 증상 때문이라면. 오히려 이연은 퇴로를 하나 더 만들어 둔 셈이었다.

최소한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 기분에 따라 충분히 마음의 짐을 덜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약빠르게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우롱당한 기분을 느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중앙선을 넘어온 무언가가 쾅, 하고 그녀의 등을 들이받았다.

“제가, 잠깐 그냥, 팔자를 잘못…….”

“팔자요?”

“아직도 인생의 구렁텅이를 우습게 알고…….”

이연은 정수리를 주먹으로 얕게 치며 횡설수설했다.

“그만해요.”

그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덮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이연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더없이 시끄러웠다. 덩달아 이연의 잔머리도 바람에 나부꼈다.

“저……, 둘러볼 나무가 많은데. 권채우 씨는 이제라도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요?”

“그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에요?”

이연이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남자는 그녀의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하듯 눈꼬리를 올렸지만 결국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뒤에서 따라가기만 할게요.”

“신경 쓰이는데요.”

“나 돌아가는 길을 잘 몰라요. 버스 타는 것도 어렵고요. 이연 씨 말고는 머리에 든 게 없어서.”

꼭 이럴 때만 약하고 아픈 척이다.

그걸 증명하듯 그의 입매는 살짝 내려가 있는데, 살쾡이 같은 눈초리는 희번덕거렸다.

그때, 권채우가 예민하게 고개를 돌렸다.

“……!”

이연을 향해 느슨히 열려 있던 동공이 한순간 조여들었다. 귀밑에서부터 쇄골까지 이어진 목선이 잡아당긴 줄처럼 팽팽했다. 급변한 남자의 분위기에 이연은 덩달아 침을 삼켰다.

그의 미간에 점점 짙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아닌 다른 곳에 집중하는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해서, 이연은 찰나였지만 밖으로 밀쳐진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요? 권채―”

“내가 신호 주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네?”

그가 이연의 손목을 바싹 잡아당겼다.

“나무 잘 타잖아요. 잠깐만 위에 올라가 있을래요?”

어리둥절해 있는 찰나, 권채우가 그녀의 등을 힘껏 밀었다. 그 손길이 자못 뜨거워 이연은 파드득 놀라 줄달음을 쳤다. 등에 찍힌 손자국이 욱신거렸다.

―꿰에에에―!

땅이 울렸다.

오싹한 괴성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저쪽 오르막길에서 웬 집채만 한 멧돼지가 미친 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잔뜩 흥분했는지 새카맣고 억센 털이 꼿꼿했다.

“권채우 씨!”

이연은 아연실색했으나 도리어 그가 핏대를 세웠다.

“소이연, 올라가라고!”

후려치듯 거친 음성이었다. 사납게 구겨진 그의 눈매가 무서워 그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쪼르르 나무 위로 올라갔다.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벌벌 떨렸다.

권채우는 그녀의 왕진 가방을 펼쳐 망설임 없이 손도끼와 말뚝 여러 개를 끄집어냈다.

“악……! 권채우 씨, 나서지 말아요! 그, 그거는 나무 벨 때나 쓰는 거지, 짐승 잡는데 쓰는 게 아니에요! 구조 센터에 신고할 테니까 일단은 이리 올라와요!”

그녀가 나뭇가지를 잡고 한쪽 손을 쭉 내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입술을 물어뜯던 그녀는 결국 급하게 핸드폰을 켰다.

한편 권채우는 나무 기둥에 도끼질을 해 대고 있었다. 몇십 번을 내려치는 데 그가 쓴 시간은 고작 찰나였다. 처음과 똑같은 힘으로 지치지도 않고 몰아치더니 기어이 나무에 홈을 만들었다.

“권채우 씨, 뭐 해요! 피해요!”

멧돼지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데 남자는 나무만 패고 있다.

“그만, 그만하라고요! 그거 내려놔요!”

“…….”

“내려놓으라고, 이 자식아!”

“거기 가만히 있어요.”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그러자 하하, 하고 그가 소리 내 웃는다.

“개가 등을 돌리는 이유는 딱 하나예요.”

그 느긋한 태도에 이연은 힘이 다 풀렸다.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권채우―! 너, 너, 배만 잘 까뒤집으면 뭐 해!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데!”

그녀가 제 가슴만 퍽퍽 치고 있는 사이, 남자는 몸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멧돼지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짐승의 시야에 인간이 잡히자 이미 한껏 흥분한 동물은 더욱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이연은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보기만 해도 살벌한 송곳니가 권채우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순간.

“……!”

끝까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남자는 쥐고 있던 말뚝을 반 박자 빨리 겨누었다.

그리고 돌진력에 의해 차마 속도를 줄이지 못한 멧돼지는 그대로 말뚝에 박혀 버렸다.

목 아래에서 울컥울컥 피가 솟구쳤다. 치명상이었지만, 멧돼지는 아주 잠시만 멈칫했을 뿐, 꿰뚫린 상태 그대로 다시 권채우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 이연이 올라간 나무까지 몰렸다.

‘죽으면 안 돼요……!’

와들와들 떨며 신고 전화를 마친 그녀가 처음으로 남자의 무사 안위를 바라고 또 바랄 때였다.

이연은 그의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권채우는 방금 전까지 만들어 놓은 도끼 자국 사이로 말뚝을 끼워 넣었다. 말뚝 손잡이가 아귀 사이에 딱 맞게 들어가자, 내내 돌진만 하던 짐승의 몸에 뾰족한 날이 쑤욱 꽂혀 들어갔다.

꾸에에에-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에 산새가 날아갔다.

“으……!”

이연은 쿵, 쿵, 나무에 부딪치는 진동을 견디면서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온몸이 넝마가 된 권채우는 즐거운 놀이를 하듯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굳게 쥐고 있던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가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었다. 특히나 툭 돌출된 송곳니를 잡고 그 안의 경동맥을 찢었을 땐 권채우 또한 피를 흠뻑 뒤집어써야 했다.

“으……!”

남자는 새빨갛게 페인트칠을 한 것 같았다. 치아 사이사이로 붉은색 물이 스며들었다.

끔찍한 소리를 내지르던 짐승은 이제 힘이 다 빠졌는지 몸만 들썩댔다.

“이제 내려와요, 이연 씨.”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려가면 안 될 것 같다.

‘죽으면 안 돼요’와 ‘죽이면 안 돼요’를 넘나들게 하는 남자 때문에 호랑이를 피해 올라온 오누이가 된 심정이었다. 또 다른 동아줄이 필요해졌다.

“내가 올라갈까요?”

“아니요!”

그녀가 단호히 일축했다.

“다리가, 다리가 떨려서요. 잠깐만 숨 좀 고르고 내려갈게요. 권채우 씨도, 그……, 진정 좀 하고…….”

“내가 흥분한 것 같아요?”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팍을 조금 들썩이고 있다는 것만 빼면 권채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안개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푹 젖은 앞머리와 축축해진 옷이 그 느낌에 무게감을 더했다.

“이연 씨는 내가 이 꼴로 흥분하길 바랐나 봐요.”

그가 스트레칭하듯 한쪽 어깨를 돌렸다.

“말만 해요. 여기서 좆 세워 줘요?”

“아니요!”

“이연 씨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다니까요.”

“그래도 변태는 아니에요!”

이연은 훗날을 위해 지금부터 필사적으로 못을 박아 두었다. 동시에 심각한 낯으로 우려를 표하던 의사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행동 이상, 공격성, 과다 성욕…….

지금의 권채우, 그 자체였다.

그녀가 문득 숨소리도 내지 않자 권채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아 냈다.

“많이 무서웠어요?”

“저는, 지금 권채우 씨 얼굴이 더 무서워요.”

그 말에 권채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피칠갑을 한 얼굴인데도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어떤 모양으로 굽어지는지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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