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 다쳤을 때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버리지 그랬어요. 어차피 깨어나지도 못하는 식물인간. 그 면상에 침이나 뱉고 튀어 버리지.”
그가 자조하듯 말을 이었다. 비웃음은 명백히 과거를 향해 있었다.
짐을 내다 버린 소이연은 훨훨 날아가 잘 살 것이다. 게다가 아직 젊고 능력 있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낚아채 갈 남자는 수두룩했다.
그런데 권채우 자신은 이연이 없으면―
깨어나지 못한다. 즉, 평범하게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간단한 진리였다.
권채우는 그런 절대적인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손 놓고 지켜만 볼 바에야, 차라리 계획적으로 그녀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겪은 그녀가 다시 제 발로 돌아오게끔,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라 믿게끔, 그 어떤 곳보다 권채우의 품이 안락하다는 것을 깨닫게끔.
그는 언제라도 혹독한 시험지를 내밀 준비가 됐다.
“이연 씨가 그때 도망쳤대도 나무랄 사람은 없어요.”
권채우는 어둑어둑한 눈으로 잘도 사려 깊게 굴었다.
“……그치만, 우리 사이는 엄연한 약속이잖아요.”
“……!”
“어기면 안 되는 의무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계약서에 사인할 때는 신중하라고 하는 거예요. 저는…… 비록 후회도 했고, 고생도 하고 있지만요. 다시 돌아가도…… 권채우 씨에 대해 사인을 했을 거예요.”
“…….”
“당시에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어요.”
권채우는 목이 꽉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그녀가 약속을 운운할 줄은 몰라서.
대체 사람이 얼마나 정성스러우면 그럴까.
부표도 없이 둥둥 떠다니던 남자가 비로소 촘촘한 그물에 걸려 멈춰 섰다. 그건 뿌리부터 그녀에게 얽매이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런 강한 소속감이 그를 휘감았다. 텅 비어 있던 인생이 더는 불안하고 허탈하지 않았다. 바닥부터 천천히, 그녀가 무겁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연이 제 안위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서약, 그 말 하나에.
“이연 씨는 날 좋아해요?”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권채우가 조르듯 그녀의 몸을 한번 얼러 봤으나 미동도 없었다.
대답은 집이 가까워질 무렵 흩어지는 숨소리와 함께 나왔다. 나무를 만지느라 까칠까칠하게 상한 손이 그의 목을 스쳤다.
“……그런,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요.”
정말로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
신은 내 편이었다.
그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부여잡고 일어나니 이미 아침이었다. 이연은 회식 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른 채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욕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수건으로 하반신을 두른 남자가 뚝뚝 물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선명하게 각진 어깨, 음영이 분명한 가슴과 배.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기가 어떻게 피할 새도 없이 이연의 시야에 빠듯이 들어찼다.
“잘 잤어요?”
“그, 그게 왜. 그게 뭐예요?”
“뭐가요?”
“아니 왜 이렇게 그게…….”
이연은 아직도 뜨뜻한 김이 올라오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눈치 없는 관찰이야말로 매너가 아님을 알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생각보다 질겼다.
숙취가 싹 날아간다.
하반신을 두르고 있는 수건이 비죽 튀어나와 있어서. 누가 봐도 흉한 모양새였으나 천 아래로 미묘하게 윤곽이 잡히는 게…….
“이연 씨, 내가 어제 술 먹고 한 말 기억나요?”
“……네, 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마주쳤다. 태연한 척 머리카락을 넘겼으나 붉어진 눈가는 감출 길이 없었다.
“권채우 씨가 뭐…… 라고 했는데요?”
“기억이 조금 났다고.”
남자는 묘하게 눈썹을 구겼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네?!”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허공을 부유하던 먼지들이 돌연 그녀의 콧속을 틀어막았다.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무, 무슨……. 지금 뭐라고…….”
목소리가 보잘것없이 떨려 왔다.
그의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연의 무릎을 적셨다. 점점이 젖어 드는 잠옷이 축축했다.
권채우는 벌벌 떠는 그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고해했다.
“나는 죽으려고 했어요.”
“……!”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눈동자가 벌어졌다.
죽으려고…… 했다고?
그건 이연이 모르는 이야기였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얼굴이 아무래도 이연 씨 같아요. 맞아요?”
이연은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연은 진실을 감추고 조작하는 쪽이었으므로, 권채우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언제나 우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농락하는 자리를 빼앗겼다.
“2년 전에, 나는 사실 죽었던 거예요.”
권채우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꼭 용서를 비는 것 같은 자세였으나 이연은 그가 군림하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벌어진 무릎 사이로 이연의 두 다리가 속박되었다. 갈라진 근육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들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죽었어요.”
그가 이연을 세뇌하듯 강하게 반복했다.
“그 권채우는 죽은 사람이에요.”
“…….”
“한 번도 깨어나길 원한 적이 없어요.”
기억의 공백을 이용하는 건 이제 이연뿐만이 아니었다. 권채우는 자신의 과거를 전부 말살하는 형태로 이연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남자는 이제 없다고. 그때 죽어 버렸다고.
이연의 닫힌 마음을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싹이 될 수만 있다면. 거짓말에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정말, 정말로 기억이 난 거예요?”
“안 믿겨요?”
이연의 멍한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사람을 파묻고 있던 사람이 죽으려고 했다고?
그럴 리 없다.
이연은 대번에 눈가를 가늘게 찌푸렸다.
그녀는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올곧게 쳐다보았다. 권채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눈씨름은 끝도 없이 길어졌다.
문득, 그날 밤의 산속에서 권채우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를 보고 놀란 것 같았어.’
생각해 보면 이연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밤마다 무슨 악몽을 꾸는 건지, 권기석의 말마따나 귀가 좋다던 사람이 왜 기습을 당했는지도.
그의 고백을 의심해보기엔 애초에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모든 시도가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런 면에선 기억 상실인 권채우와 아는 게 없는 자신은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남자는 결백을 주장하듯 티끌 하나 없는 동공을 꿋꿋이 고정해둔 채였고, 결국 이연의 눈동자가 먼저 흔들렸다.
“지금부터 기억해야 할 건 딱 하나예요.”
잠깐이라도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건만, 남자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긋한 음성임에도 이상하게 식은땀이 났다.
“이연 씨가 나더러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기에 하루빨리 그런 남편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머릿속 구멍을 전부 아내 말로만 채웠어요.”
“…….”
“그것만이 내 이정표니까.”
그는 선명했고, 다부졌고, 또 매서웠다.
그리고 이번엔 권채우가 그녀에게 이정표를 세워 주고 있었다.
“똑똑히 새겨 둬요. 첫 번째 남편은 2년 전에 죽은 거예요. 나는 그 전남편이 아니에요. 아직 반지가 있다면 버리고, 사진이 남았다면 태워요.”
이연은 휘몰아치는 말들에 넋이 쏙 빠졌다.
“이연 씨는 새로 후처를 들인 거고, 난 이연 씨가 기억하는 ‘그 권채우’한테 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가 매캐한 소유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길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이연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다 사레가 들렸다.
스스로 족쇄를 목에 두른 남자는 웃고 있었고, 이연은 이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 * *
굴곡이 파이지 않은 판판한 미간과 산뜻해 보이는 눈매. 권채우는 창가로 비쳐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그 누구보다 태평스럽게 앉아 있었다.
그건 식탁에 앉아 함께 아침을 먹고 있는 이 순간만큼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어서, 이연은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지? 기억이 나기 시작한 거면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권채우는 정말로 죽으려고 했을까?’
그러나 권채우의 관심은 오로지 현재뿐이었다. 아침부터 콩나물국을 끓여 대령한 남자는 신수가 아주 훤했다.
이연은 제 밥풀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눈앞의 남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앉은 자세는 반듯했고, 정갈하게 쥔 젓가락은 각도부터 위치까지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완벽했다.
식기가 부딪치거나 음식물 씹는 소리 또한 전혀 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고즈넉함이 권채우로부터 흘러나오자 이연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의미 없이 제 뺨을 문지르며 수저를 놓았다.
“권채우 씨.”
“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곧장 눈을 맞춰 왔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궁금한 거라든지…….”
“별로요.”
“왜요?”
이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탁, 하고 그가 젓가락을 소리 내 내려놓았다. 그건 권채우가 식탁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낸 소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