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158)

#27.

“톱 이리 줘요.”

권채우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을 모양인지, 곧장 나뭇가지를 짚고 자리를 잡았다.

“……으.”

그녀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잡고 톱을 건넸다.

현재 권채우는 가장 무방비한 상태였다. 이대로 뒤에서 목을 조른다거나 머리를 내려친다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연 씨.”

“…….”

“이연 씨!”

“네, 네?!”

그녀가 화들짝 놀라 허리에 힘을 주었다.

“지시해 줘야죠.”

“……아, 네, 네.”

이연은 고개를 몇 번 털며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지이이잉, 소음을 내며 톱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톱을 쥔 손목의 각도부터 칼날의 방향, 리듬, 강약까지 세세하게 지시했고, 권채우는 그것을 기가 막히게 구현했다. 손재주가 웬만한 베테랑 아저씨들보다 훨씬 좋았다.

“―잘하고 있어요! 거기서 더 들어가 주세요.”

“이렇게요?”

“네, 지금 좋아요!”

이연은 고개를 쭉 빼고 완전히 몰입을 한 상태였다. 한껏 오그라든 미간이 심각했다.

“이제 그대로 끝까지 힘만 유지해 주세요!”

“…….”

“더요, 더, 더 세게!”

움찔한 권채우는 어깨 위로 귀를 문질러 댔다.

“……지금은 어때요?”

“좋아요, 딱 좋아요, 아―! 아직 빼지 말아요!”

“……!”

“다시 홈으로 넣어요! 내가 빼라고 할 때까진 빼지 말고, 푹푹 꽂는다는 느낌으로 밀어요! 좋아요, 그대로 손목만 조금 내릴게요!”

“…….”

“아, 거기예요! 거기! 네, 거기!”

“…….”

“하……. 거의 다 왔어요! 거의 다 왔어요! 잘하고 있어요! 조금 더요! 이제 그대로 버텨요! 거의 끝까지 왔어요!”

“…….”

“마지막으로 한 번 세게요! 됐어요, 빼요―!”

마침내 나뭇가지가 뚝,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하아, 하아……! 권채우 씨, 최고였어요!”

이연은 목청을 드높인 탓에 숨을 헐떡거렸다.

그런데 권채우의 승모근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긴장을 했나 싶어 이연은 답지 않게 칭찬을 해 주었다.

“힘들었죠? 그래도 권채우 씨 보기보다 이쪽에 소질 있는데요? 힘도 좋고, 손재주도 좋아서 엄청 만족했어요!”

문득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연 씨도 가르치는 데 소질 있어요.”

“정말요?”

“예, 앞으로 기대가 될 정도예요.”

이연은 히죽 웃었고, 권채우는 이를 앙다물었다.

드디어 골칫거리였던 나뭇가지를 제거했다. 고통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곧 아물어 틀림없이 새롭고 건강한 가지가 자라날 것이었다.

그와 함께 보는 하늘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 * *

“갑자기 맨손으로 철봉 하듯이 휙휙 올라가길래 점마 머리가 회까닥 돈 줄 알았다.”

첫 번째 심사를 통과한 기념으로 이루어진 회식 자리. 이연은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처음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니 뒤꽁무니만 쳐다보더니, 니가 휘청거리니까 무슨 표범맹키로 바로 뛰쳐 올라가는 게 열 진돗개 부럽지 않데?”

안 그래도 나무 아래쪽이 뒤숭숭하다 싶었는데.

이연은 실감 나는 후일담을 들으며 애꿎은 목덜미만 긁적거렸다. 불판의 열기 때문인지 피부가 다 후끈거렸다.

이연은 고기가 익는 족족 그녀의 앞접시에 먹이를 갖다 나르는 권채우를 힐끗 곁눈질했다.

“큰일 한 사람부터 잔 받아라.”

추자가 그의 잔에 소주를 채우려 하자 이연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무릎을 문질렀다.

“저기, 추자 씨. 아픈 사람한테 술은 좀…….”

“아픈 사람? 아픈 사라암―?”

그녀는 얼씨구, 하며 커다랗게 코웃음을 쳤다.

“아픈 사람이 그 높이에서 가시나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드나? 그기 골골대는 거면 내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

이연은 본전도 못 찾고 조용히 불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 끝에 그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술잔을 의미 없이 매만지는 길쭉한 손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만 의외로 모양이 예뻤다.

“그래도 술은 잘못 먹으면…….”

진짜 모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차마 털어놓지 못한 진심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 추자는 이연의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흥에 취해 권채우에게 재차 술을 따라 주었다.

“권 서방, 받아라.”

권채우가 허락을 구하듯 이연을 바라보는 순간.

술병을 날렵하게 낚아챈 그녀가 꿀꺽꿀꺽, 바닥에 남은 몇 방울까지 깡그리 다 털어 마셨다.

“니 뭐 하는데!”

추자가 기겁을 하며 헐레벌떡 그녀를 말렸다.

“앞으로 권채우 씨 술은 제가 다 마셔요!”

“술도 못하는 가시나가 뭔 소리고!”

“머리가 아픈 사람도 아픈 사람이에요! 신체적인 활동만 보고 그렇게 차별하면, 안 그래도 부족한 뇌세포가 더 삐뚤어진다고요! 술은 제가 다 마실게요!”

이윽고 급하게 넘어간 알코올은 이연의 기억을 싹둑 끊어 놓았다.

이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발이 둥둥 공중에 떠 있었다. 구름인 양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다리를 조금씩 흔들었다.

“이연 씨, 가만히 있어요.”

“응?”

이연은 잠꼬대를 하듯 판판하고 딱딱한 곳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생각보다 단단한 뼈대가 광대를 압박하자 그녀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칭얼거림에 권채우는 이연의 몸을 한 차례 얼렀다.

“이연 씨.”

짜부라든 뺨을 통해 익숙한 음성이 웅웅 전해져 왔다.

“내가 술 마시는 게 싫어요?”

이연은 지금 자신이 권채우에게 업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실실 웃음만 흘려 댔다. 오랜만의 술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끝도 없이 들떴다.

“네.”

“왜요?”

“……술 마시면 혹시나 기억이 날까 봐.”

“…….”

묵묵히 걷던 권채우가 돌연 멈칫했다. 입가에 가볍게 걸치고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그라졌다.

술만 마시면 홱 돌변해 행패를 부리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썩은 담배꽁초만큼이나 흔했다. 그는 이연의 몸에 난 오래된 상처들을 아직 잊지 못했다. 낯빛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자괴감을 떨쳐 내기 위해 애써 걸음을 떼려는데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그거 알아요? 이 관계는요, 비정상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히 미쳤어요.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예요. 애초에 받아들이면 안 됐는데…….”

혀가 풀려 느슨해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권채우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녀의 진짜 속내였다. 소이연의 경계가 마침내 풀린 순간이지 않나. 하지만 만족은커녕, 목이 콱 졸려 왔다.

저열한 승리감조차 들지 않는 초라한 결말.

그녀는 결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그 점은 항상 변하지를 않아요. 도망치고 싶어도 나는 칠 수가 없거든요.”

“시도해 본 적 있어요?”

“그럼요, 경찰서 앞까지도 가 봤어요.”

그의 눈매가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졌다. 결혼을 논하는 자리에 왜 경찰서가 끼어든단 말인가. 권채우는 최악을 상정하며 어금니를 밀어내듯 악물었다.

권채우 이 씹새끼.

그는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자신을 몇 번이고 짓밟았다. 아예 관짝에 넣고 땅 깊숙한 곳에 묻었다. 절대로 기어 나와서는 안 될 자아라는 것이 지금 확실해졌다.

“언젠가는…… 전부 끝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가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미약한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희망이나 설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연 씨, 내가 무서웠어요?”

“……응.”

“그래서 나 보내고 후련해지고 싶었어요?”

“……응.”

졸음기 가득한 음성이 그의 어깨에 또다시 비벼졌다.

대체 자신은 왜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고통스러운 기억은 전부 그녀에게 맡겨 두고, 왜 자신만 까맣게 잊었을까. 끝까지 염치도 없었다.

“내가, 물리적으로 아프게 한 적도 있어요?”

“응.”

주저하지 않고 나오는 대답에 그는 싸늘하게 굳었다. 몸이 떨리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상습적으로?”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익숙해 보이긴 했어요.”

그는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화를 삼키고 또 삼켰다. 목울대가 사정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식도를 태우고 남은 재가 점막에 달라붙어 조금씩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기회라면. 엉망이었던 결혼 생활을 고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

권채우는 손이 닿지 않는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그가 바꿔 나갈 수 있는 내일을 기민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제 아침을 쥐고 있는 이연에 관해서라면 본능처럼 몸이 움직였다. 혹여나 그녀를 놓칠까 손아귀에 와락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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