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158)

#26.

“……나 겁 많아요. 그런데 그것보단 책임감이 먼저예요. 이건 경쟁 입찰이고, 난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로프 줘요.”

“…….”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도 그가 턱을 꽉 다물고만 있자 이연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권채우 씨. 지금……, 나한테 대들어요?”

아, 이런 유치한 소리나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권채우의 유려한 눈매가 가느다래지는 순간, 속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코딱지만 한 간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는 이연을 잠시간 응시하더니 시선을 푹 내렸다.

“아니요, 이연 씨. 내가 어떻게 그래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스치듯 마주친 눈빛이 음산했다.

고분고분해진 남자는 이연의 허리에 손수 로프를 매 주었다. 막무가내로 어깃장을 놓으리라 생각했는데 제법 체계적으로 후크를 걸고 매듭을 짓는다.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에 이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밑에서 기다리는 남편 생각은 하나도 안 하죠?”

그가 로프의 이음새를 확인할 때마다 그녀의 몸은 앞뒤로 종이처럼 휘청거렸다.

아내의 생명줄을 손수 묶어 주는 남자의 심정 따위는 모른다. 그런데 빠득, 하고 턱이 갈리는 소리를 코앞에서 듣자니 그 시퍼런 서슬에 숨이 막혔다.

“방해하는 게 아니라 지키려던 거고, 장난치는 게 아니라 날 달래 주길 바랐던 거예요.”

“…….”

“불안하니까.”

터무니없이 투명한 속마음에 이연은 눈만 깜빡였다.

“난 이연 씨가 멀리 가는 게 싫어요.”

차가운 눈동자는 들끓고 있었다.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고, 나는 분명히 말했었어요.”

악의도 아니고, 증오도 아니고, 화풀이에서 오는 비이성적인 만족도 아니다. 그동안 이연이 가족들에게 받아온 그 숱한 시선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그저 순수하게, 이연에게 매달려 오는 애정이었다.

가슴 속 어딘가가 흔들렸다.

“가문비 병원, 준비 다 됐습니까?”

떨어지지 않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제야 간신히 떼어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이연이었다.

추자는 불안한 얼굴로 톱을 전해 주었고, 이연은 그것을 등에 메고 손바닥에 송진 가루를 묻혔다.

이 톱에 당신 피가 묻었었어.

이연은 조소했다.

기억 상실에 걸린 남자를 속여서 길들이기 시작한 주제에. 이연의 의도대로 잘 세뇌되고 있는 남자를 보는 게 불편하다. 그녀에겐 필요치 않은 나약한 감상이었다.

“갔다 올게요.”

이연은 달라붙는 남자의 시선을 끝까지 무시했다.

그녀의 가벼운 몸은 아주 날랬다.

동시다발적인 감탄을 들으며 이연은 능숙하게 나무를 탔다. 허벅지와 무릎, 그리고 팔꿈치가 순식간에 쓸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30m짜리 은행나무를 사십 분가량 동안 오르자 어느새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이쯤 되니 나뭇가지를 잘라야 하는 것보다 저리기 시작한 팔과 다리가 더 큰 문제였다.

그래도 오랜 시간 방치되었을 나무를 생각하며 이연은 이를 악물었다. 어디에 말도 못한 채 고충을 그저 떠안고만 있어야 했던 나무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문제성 가지에 다다를수록 이연은 조급해졌다.

마침내 꼭대기 근처까지 올라온 그녀는 기형적으로 뻗은 가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휘어 있던 나뭇가지는 역시나 이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어, 어……!

아래쪽에서 그런 웅성거림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높은 곳을 딱히 무서워하지 않았던 그녀였건만―

‘나 높은 곳 무서워하네……?’

고소 공포증이 없던 게 아니라, 이 정도 높이까지 올라와 본 경험이 없어 몰랐을 뿐이다. 막상 여기까지 올라오자 심장이 울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떻게든 잘라 줘야 하는데.

‘이래서 그린 병원 원장님도 그냥 내려오셨구나.’

굽이치는 나뭇가지에 찰싹 달라붙어 그 진동을 감당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뚝 꺾이기라도 하면 뒤편의 도로는 날벼락을 맞는다.

“후…….”

쩔쩔매고 있던 그때, 까마득한 아래에서 경악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러 사람들의 고함이 한꺼번에 뒤섞였으나 제 코가 석 자인 이연은 차마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묵직한 파동이 뒤통수를 덮치듯 밀려들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이연이 더듬더듬 톱을 잡았을 때였다. 돌연 몸이 기우뚱하더니 허벅지에서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아! 진짜 가지가지……!’

속수무책으로 미끄러졌다.

로프를 매달아 둔 덕분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한 높이의 작업 환경이 애초에 처음이었던지라 이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덮쳐 올 반동에 대비했다.

‘떨어진다……!’

그렇게 시야가 반쯤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허리를 낚아 올리는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몸이 꽉 붙들렸다. 갈비뼈가 부러질 듯 아팠다.

“……잡았어요. 내가 잡았어.”

“……!”

목덜미에 닿는 음성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권채우는 그녀의 배를 큰 손으로 감싼 채 빈틈없이 꽉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궈, 권채우 씨?”

이연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렸다.

거칠게 일렁이는 목젖과 날카로운 코끝을 지나, 한껏 예리해진 눈매가 보였다. 그는 장비 하나 없이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미쳤어요?!”

“괜찮아요. 이연 씨 다치게는 안 둬요.”

남자는 그녀가 겁에 질린 줄 알고 달래기부터 했다.

“그게 아니라요……!”

이연은 숫제 기가 막혔다.

“맨몸으로 무슨 짓이에요, 이게! 내가 진짜 권채우 씨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요!”

생각해 보면 첫 만남부터 쭉 그랬다.

사람을 생매장하질 않나, 죽이려고 쫓아오질 않나, 갑자기 깨어나질 않나, 생닭을 뜯질 않나, 다시 긴 잠에 빠지질 않나, 그러다 눈물을 흘리질 않나.

하다 하다 이제는 죽으려고 작정을 했는지 요령도 없는 사람이 맨손으로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사람이 왜 이렇게 극단적이에요?”

흘끗 본 남자의 손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장갑이나 장비를 전부 갖춘 이연과 달리 권채우에겐 비이성적인 집념만이 있었다.

“글쎄요, 내가 왜 그럴까요?”

꽉 맞닿은 몸에서 둥둥 거칠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이연의 어깨로 얼굴을 내렸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이연 씨가 정해요.”

“뭘요?”

“이대로 끌려 내려갈 건지, 끝까지 할 건지.”

그러자 널을 뛰던 심장 박동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각오는 순식간에 세워졌다.

“난 끝까지 할 거예요.”

나뭇가지가 기형적으로 자라 균형이 어그러진 몸은 뿌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머릿속에서 심사 따위는 지워진 지 오래였다. 오로지 이 나무만을 도와주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업혀요.”

“……네?”

“내가 자를 테니까 이연 씨가 지시해 줘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연은 얼이 빠져 버렸다.

“안 돼요!”

“왜요?”

“권채우 씨는 로프도 없잖아요. 뒤로 빠져 있어요!”

“괜찮아요, 내가 떨어져도 이연 씨는 사니까.”

“……!”

이연은 그의 극단적인 논리에 열이 확 올랐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요! 권채우 씨가 심하게 다치면 그날부로 내 인생도 끝나요!”

권채우 씨 집안이 얼마나 무서운 덴 줄 알아요? 권채우 씨가 죽으면 난 협상의 여지도 없이 바로 드럼통행이라고요! 이연은 숨을 씨근덕거렸다. 차마 토해 내지 못한 말들이 속에서 회오리를 쳤다.

“사실은 여기에 올라온 것도 충분히 미친 짓이에요!”

“……미안해요. 화내지 마요.”

그의 우뚝한 코가 목덜미에 문질러졌다.

“그리고 설령 안전했더라도 나무의사는 나예요. 당연히 권채우 씨보다 내가 더 톱질도 잘할 거고요!”

“…….”

“까, 까불지 마요.”

성대가 바르르 떨렸다. 이연은 붉어진 얼굴로 자존심을 세웠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아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칠 수 있었다.

그녀가 턱을 들고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목덜미로 뜨뜻한 콧바람이 내려앉았다. 그가 웃은 것도 같았다.

“벌은 내려가서 받을 테니까, 꽉 잡아요.”

“무슨―”

이연의 시야가 홱 바뀌었다. 권채우가 예고도 없이 그녀를 짐짝처럼 안아 어깨 뒤로 보내 버린 것이다.

“힉……! 권채우 씨!”

이연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30m 높이에서 느닷없이 자리가 바뀌자 필사적으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살기 위해 퍽 애절하게 매달린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널찍한 등은 놀랍게도 아늑했다.

한 번도 안겨 본 적 없는. 누군가의 등이었다. 그에게서 시원한 땀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워 심장이 쉬지 않고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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