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나보고 책을 읽지 말라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돌려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그 진득한 시선이 숨 막히게 고요했다.
“네? 제가 뭘…….”
“아내가 그렇게 쳐다보는데 어떤 남자가 침대에서 딴짓을 할 수 있겠어요.”
그가 묘한 한숨을 내쉬며 목 뒤를 주물렀다.
“그게 아니라 잠이 안 와서요……!”
남자는 졸음기 하나 없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연 씨가 옛날 얘기 들려주세요.”
“어떤 거요?”
“우리 두 사람 얘기요. 이를테면 첫―”
“―날밤이요?”
권채우는 아예 그녀 쪽으로 돌아누웠다. 슬쩍 꿈틀거린 그의 눈썹이 못마땅해 보였다.
“그거 말고, 첫 만남이요.”
“…….”
“빨리 싸기만 하는 애새끼 얘기는 안 듣고 싶은데.”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검은색 우비 차림으로 삽을 들고 있던 남자. 그 주위에는……. 이연은 곧장 떠오르는 이미지를 애써 지우려 노력했다.
“……산에서 만났어요. 제가 소지품을 흘리고 갔는데 권채우 씨가 고맙게도 쫓아와서 전해 줬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다행히도 장르를 바꿔 각색하는 데에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클래식하네요.”
“네, 아, 아주 고전적인 만남이었어요.”
“설마 손수건은 아니죠?”
장난치듯 묻는 남자에게 이연은 쑥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제가 좋아하는 전동 톱이었어요. 그 말은 꿀꺽 삼켰다.
“그냥 조그마한 빗이었어요.”
그가 덩달아 설핏 웃었다. 그들의 첫 만남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라도 하는 걸까. 눈매가 부드럽게 접힌 남자를 보자 문득 입 안이 썼다.
‘앞으로 이연 씨는 좀 더 충실한 모습을 보여야 할 거예요. 우리가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맞다면.’
역시 충동적으로 메꿔 가는 거짓말은 위태로웠다. 권채우는 순순히 납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끔씩 등골을 서늘하게 할 때가 있어서.
그건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더욱 성의 있고 진심인 거짓말이 필요해졌다.
산 넘어 산이었다.
* * *
“가문비 병원 왔습니까?”
드디어 1차 토너먼트 공개 심사 날이 되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이연은 짧은 숨을 복서처럼 훅훅 내쉬며 손을 들었다.
뒤로는 2차선 도로가 깔려 있는 빽빽한 비탈 숲.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30m 높이의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형적으로 뻗은 가지는 대충 보아도 위태로웠다. 게다가 주위의 다른 나무들까지 이 문제성 나무에 맞춰 조금씩 자세가 틀어지고 있는 게 심각했다.
“소이연 원장님 외 2명 맞습니까?”
“네. ……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감시관을 보았다.
“두 명이요?”
물론 그녀의 마음속에선 나무의사 소이연, 수목치료사 계추자, 화훼장식 권채우, 곤충 박사 이규백으로 이루어진 명망 높은 병원이었지만, 현실은 두 여자가 간신히 전기세나 돌려 막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추자 말고도 정식으로 등록된 직원이라니, 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여기 권채우 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장인 내가 정식으로 등록을 한 적이 없는데요……?
이연은 영문도 모르고 굳어 버렸으나 이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권채우가 바로 옆에서 이연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동요를 기민한 그가 알아챌까 불안했다.
“네, 네……. 맞습니다. 맞아요.”
이연은 얼굴을 판판하게 펴며 웃어 보였다.
사실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 몰래 손을 쓴 거라면 떠오르는 이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남자.
권채우의 형, 권기석.
이연은 창백해진 이마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잊었다 싶을 때면 한 번씩 그 존재를 드러내는 남자. 별안간 숨이 가빠졌다.
―소이연 씨,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석 달에 한 번 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이 그녀의 긴장감에 불을 계속해서 지피려는 장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날 밤의 협박이 저절로 떠올랐으니까.
통화가 쌓이면 쌓일수록, 어느 순간 이연은 진심으로 딴 마음을 먹지 않게 되었다. 완벽한 굴종이었다.
‘역시……, 날 감시하는 수단이 통화만은 아니었나.’
심장박동이 옴 몸을 두들겨 댔다.
‘대체 언제가 되어야 내 족쇄가 풀리지……?’
권채우가 식물인간이었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피로하지 않았다. 그만큼 일상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간호뿐만 아니라 비용도 전부 그쪽에서 맡았고, 드나드는 뒷문도 따로 있어서 이연의 생활 반경과 겹치지도 않았다.
그날 밤은 정말 꿈이었다는 듯 이연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때로는 평화롭기까지 했다.
그 도축장에서 손가락 하나 잘리지 않고 나온 게 용해서. 가끔은 2층의 식물인간이 구명줄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형에게는 이연이 인질이었고, 이연에게는 권채우가 인질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깨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권채우가 깨어난 이후, 이연은 이제 권기석을 향해 의심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만한 인물이 2년 동안 성과 하나 없을 수가 있을까.
실은 만들어진 감옥 안으로 그녀가 멍청하게 걸어 들어간 건 아닐까.
“이연 씨.”
권채우의 손이 부지불식간에 이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손바닥이 굳어 있던 그녀의 뺨을 살살 녹였다.
“고개 들어야죠. 심사 시작했어요.”
“……아.”
정신을 일깨워주는 온기에 그녀는 혀끝을 조금 깨물었다. 곧장 “그린 나무 병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신호탄이 떨어졌다.
이연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팔을 쭈욱 뻗었다. 답 없는 문제를 지금 고민해 봤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윽고 기록용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린 병원의 원장은 직원 한 명과 함께 허리에 로프를 둘렀다. 준비를 마친 그는 이내 전정에 필요한 톱을 챙겨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린 병원 측은 거침없이 나아갔고, 이연은 그 모습을 보며 바지를 스리슬쩍 움켜쥐었다.
그때 송곳 같은 한숨이 이연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내가, 지금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딱딱하게 끊어지는 마디마디가 회초리처럼 엄했다.
“저걸 이연 씨가 하겠다는 거예요?”
마주 본 그의 얼굴이 파삭 일그러져 있었다.
권채우에게 심사 내용을 얘기해 준 적이 없으니 그는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이연은 어깨를 으쓱한 뒤 손차양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자못 진지했다.
“저 고소 공포증 없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해야죠. 저 원숭이처럼 나무도 잘 타는데.”
“…….”
권채우의 눈썹이 가파르게 꺾여 올라갔다. 그는 들불처럼 번지는 신경질적인 말들을 가까스로 구겨 삼켰다.
나무를 잘 타기는. 하얗게 질려 있는 주제에.
긴장을 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이연은 괜찮은 척 고집을 피웠다. 지금 그녀가 쥔 바지가 얼마나 꾸깃꾸깃해졌는데.
“……!”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별안간 위쪽에서 웬 소란이 났다. 그린 병원 원장이 가지 쪽으로는 방향을 틀어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린 병원 직원들은 아쉽다는 듯 탄식을 했지만, 원장은 단호하게 고래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싱거운 기권이었다.
“이건 뭐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가 그렇게 읊조리며 이연을 바라보았다.
“소 원장도 잘 생각하고 해. 가지가 생각보다 더 많이 휘어 있어서 그 위로 올라탈 수가 없어.”
이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 옆에 있던 추자도 이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원장아, 우리도 기권하는 게 낫지 않겠나.”
“…….”
“괜히 달려들었다가 사고라도 나면 우짤 낀데. 돈은 못 벌어도 최소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그냥 우리도 똑같이 기권해서―”
“그럼 바로 탈락이에요.”
이연의 두 눈이 퍽 단호했다. 그에 추자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과거를 상기시켜 주었다.
“카메라 온다고 싫다던 사람이 누꼬!”
“……제가 충분히 할 수 있어서 그래요.”
이연이 추자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꼭 이런 식으로 위험을 감수해야겠나. 니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만 조금 지껄여 주면 고객들은 줄줄이 사탕처럼 딸려 올 낀데!”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여요…….”
아니라고, 너도 할 수 있다고. 너는 저 권채우도 구워삶은 여자이지 않냐고. 추자가 비밀스레 눈짓을 하자 그 의미를 알아차린 이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가문비 준비되셨습니까?”
태블릿에 필기를 하던 담당자가 이연을 불렀다.
권채우는 발을 떼려는 그녀를 막아서며 머리 위로 로프를 뺏어 들었다.
“이연 씨,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내놔요!”
그녀가 발뒤꿈치를 올리며 팔을 뻗었다.
“이대로 나랑 집으로 돌아가면 줄게요.”
“장난해요?”
“차라리 장난이면 다행이죠. 왜 이렇게 겁이 없어요?”
권채우가 빈정대듯 입매를 비틀었다.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인 적은 드물었기에 이연은 주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