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연아, 왜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고 그래.’
낯짝만 반반하던 새끼는 머리카락 한 터럭도 안 보였다. 늘 그렇듯 자신이 옳다. 역시나 그의 생각은 빗겨 나간 적이 없던 것이다.
자, 이제는 그녀를 돌려받을 때였다.
그런데…….
황조윤은 몸을 움직여 봤으나 사지가 밧줄에 꽉 묶여 일어서는 게 불가능했다.
그가 뱀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인중에 꼼꼼히 묻은 비료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으……. 으으으……!”
그는 재갈을 문 채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흐릿한 의식 사이로 마구 쑤셔 넣어지던 걸레 조각이 생생하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그것은 연신 구역질을 유발했다.
“잘 묶어 놨네요?”
남자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매듭을 유심히 응시했다.
“혹시 쓸 일이 있을 거 같아서 배워 뒀어요.”
“잡는 건 어떻게 했어요?”
“페퍼 스프레이 건으로요. 저런 벌레들한테 효과가 좋다고 해서 미리 구비해 뒀었어요. 황조윤이 한 번은 집에 들어올 것 같았거든요. 순 식물성 최루액이라 개인적으로 흥미롭기도 했구요.”
“이연 씨 대견하네요.”
그가 무릎에 팔을 걸치고 따뜻하게 올려다보았다.
황조윤은 이 태평스러운 분위기에 눈을 부릅떴다.
“으으으……!”
저 새끼가 왜 집에서 나와……?!
“으으으읍!”
“…….”
“…….”
벌레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기울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짜 맞춘 듯 똑같았다.
특히나 당장이라도 내장을 푹 쑤실 것처럼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선 인간미가 빠져 있었다. 옅은 색의 눈동자가 꼭 누런 말벌의 껍데기 같아 식은땀이 났다.
“여기서부턴 나한테 맡겨요.”
그가 황조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일어섰다. 이연은 권채우의 옷자락을 쥐고 당부했다.
“경, 경찰은 안 돼요! 분명히 풀려날 거예요. 마당에 CCTV를 달아 두긴 했는데 제가 공격하는 것도 전부 찍혔어요. 아무도 내 정당방위를 알아주지 않을 거예요!”
“…….”
“특히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요…….”
이연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권채우를 향했다.
남자는 불안해 보이는 이연의 머리통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그녀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신고 안 할게요.”
“…….”
“잊었어요? 난 이연 씨가 시키는 것만 해요.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줘요. 나한테 뭘 원해요?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요?”
그가 소곤소곤 그녀를 부추겼다.
어릴 적 식육목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이연은 그것이 식물의 한 종류인 줄 알았다. ‘육식을 하는 나무일까?’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며.
그러나 식육목은 육식을 하는 동물군을 통칭하는 말이었고, 지금 그 언어가 형체를 드러낸 것 같았다.
연한 담갈색의 눈은 무언가를 앗아 가고 할퀴기만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연 씨가 핥으라면 핥고―”
“…….”
“뼈를 발라 오라 하면 그렇게 해요.”
흠칫 어깨가 떨렸지만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그, 그냥…….”
“예.”
“다시는 내 앞에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권채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좋겠네요.”
“……그렇다고 주, 죽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권채우를 사용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안전한 선에서 딱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실탄이 아닌 공포탄만을 쓰는 것.
남자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안 죽여요.”
순순히 나온 상식적인 말이었다. 이연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곧장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이 돌아왔다.
그래, 어쩌면 추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권채우는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릇. 그 안에 무엇이 담길지는 앞으로의 환경에 따라―
“여기서 어떻게 그래요.”
“…….”
“죽이기 좋은 장소는 아니잖아요, 여기가.”
긍정적으로 돌아가던 이연의 사고가 딱 멈추었다.
“나, 난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긴 싫어요!”
그녀가 피를 토하듯 외치자 권채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잘 알아듣게 타이르기만 할게요. 이연 씨는 집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있어요. 나도 금방 들어갈 거니까.”
이연은 걸음을 망설이다 그에게 당부를 했다.
“……권채우 씨, 저거 내가 잡았어요. 잊으면 안 돼요.”
권채우가 한쪽 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의중이 쉽게 잡히지 않아서였다.
“권채우 씨한테 대신 화내 달라고 떠넘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심하게 흥분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두통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면 안 돼요……!”
그는 왜인지 소리 내 웃고 싶었다.
“권채우 씨 아직 환자예요. 예쁘고 좋은 것만 보자고 약속했는데, 먼저 어겨서 그건 내가 미안해요…….”
“…….”
아, 목에서부터 달큼한 신음이 맴돌았다.
“황조윤이 자꾸 우리 결혼을 못 믿으니까 남편 보여 준 거예요. 딱 거기까지만이에요. 내 말 알아들었죠?”
“잘 알아들었어요.”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엄지로 눈썹 끝을 긁었다. 그렇게라도 얼굴을 단속하지 않으면 하릴없이 웃음이 샜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새끼 원숭이처럼 그녀를 답삭 안아 들어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들어갔거나.
그 어느 쪽도 이 상황과 어울리진 않았다.
이연은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휘청휘청 뒤뜰을 벗어났다.
“으으읍……. 끄으읍!”
한편, 황조윤은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악을 질러 댔다. 대체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건지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가 이 집 마당까지 뻔뻔히 들어올 수 있었던 건, 그래봤자 소이연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벌벌 떠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창문 너머로 하얗게 질린 그녀를 즐겁게 마주 보았었다.
‘거봐, 이연아. 난 아직도 이렇게 파급력이 있다고.’
그런데 예상은 그때부터 빗겨 갔다.
뚜벅뚜벅 걸어 나온 그녀가 별안간 스프레이 건을 눈에 대고 가차 없이 뿌린 것이다. 눈알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자 곧장 삽으로 두들겨 맞기까지했다.
그때 소이연의 눈빛이 어땠더라.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형형한 두 눈 만큼은…….
“황조윤 씨.”
그래, 눈앞의 이 남자 못지않았다.
식물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순했던 애가 왜……!
그러나 뒤늦은 불만은 여유롭게 이어지지 못했다.
“집이 어디예요?”
다시 눈높이를 맞춘 권채우가 그의 턱을 꽉 움켜쥐었다. 자못 평온하기까지 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악력이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상대의 악력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조윤은 제 어금니가 까드득, 뒤틀리는 소리를 분명 들었다.
“으으……. 으으으……!”
“집이 어디냐고 물었어요.”
권채우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품이라도 할 것 같은 무료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나른한 얼굴과는 정반대로 손목에선 칼 같은 힘줄이 무더기로 돋아나고 있었다. 턱관절을 이대로 으스러뜨릴 모양이었다.
“으으……!”
“아, 말을 못 하시는구나. 이제 보니 재갈도 목구멍 끝까지 야무지게 물려 놨네요. 이연 씨가 살림을 참 잘해요. 그렇죠?”
권채우가 턱에서 손을 떼고 재갈을 빼내 주었다.
“컥……. 컥컥……!”
황조윤은 밀어 두었던 욕지기를 뱉으며 침을 흘렸다.
“……그런데 입에 넣을 땐 목구멍 깊이 물려야 한다는 건 어디의 누구한테 배웠을까.”
그가 고개를 뚝뚝 꺾으며 중얼거렸다. 탐탁지 않음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너……, 너네…….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황조윤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남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 네가 정말 소이연 남편이 맞아?”
“…….”
그제야 허공을 향해 있던 남자의 눈이 소리 없이 이쪽을 향한다. 요란한 동작 없이도 그는 분위기를 손쉽게 가져왔다. 황조윤은 엉덩이걸음으로 물러서며 끝까지 어깃장을 놓았다.
“……증거 가져와. 서류 뭐라도 떼 와서 보여 봐!”
“세 번 묻기는 싫은데. 집이 어디예요.”
“내 말 못 들었어? 종이 쪼가리 가져오라고! 네가 소이연 남편일 리 없잖아.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맞춰 볼까요?”
이윽고 남자는 손발이 묶여 있는 황조윤의 뒷덜미를 붙들고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악……! 이거 놔! 놓으라고!”
“시끄럽네.”
“이연아, 이연아! 이연아―!”
황조윤이 부르짖자 권채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남의 아내 이름은 그만 부르라고 했을 텐데.”
“이연아―!”
그가 발작하듯 몸을 마구 버둥거렸다. 쯧, 하고 혀를 찬 권채우는 이내 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한 움큼 쥐더니 그의 입을 벌려 와르르 쏟아부었다.
“끄……, 으읍……!”
“착하게 경고해 주면 귓등으로도 안 듣지.”
“악……!”
“이연 씨 잠 깨우지 말고 주둥이 닫아요.”
권채우는 돌멩이 때문에 볼이 울퉁불퉁해진 남자의 얼굴을 재차 꽉 움켰다. 입 안에서 압력을 받은 돌멩이들이 치아에 치대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대침이 연한 점막을 푹푹 찌르는 고통이었다. 황조윤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