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158)

#21.

살인자는 살인자. 그 단순한 생각은 부동이어야 했다.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권채우를 농락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조금은 옅어지니까. 

그런데 추자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라 한다.

“이연아, 저놈은 기억이 읎다.”

“…….”

“네가 그때 보았던 그 사람이 아이다. 너도 모르고, 권채우도 모르는 완전히 마 미지의 사람이다.”

내내 방문을 향해 있던 시선이 힘없이 뚝 떨어졌다.

권채우를 구슬리는 건 요 근래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깨우기만 하면 복잡한 상황들이 알아서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맹목성과 본성에 기대 보자고.

권채우가 껐다 켤 수 있는 스위치도 아닌데. 그녀는 제 민낯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아침까지 사무실에 박혀 있을게요.”

“지금부터?”

“마음을 좀 비울 필요가 있어 보여서요.”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별안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이연이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주섬주섬 끼고 있었다. 지금부터 밤새 새로운 비료를 제조해 볼 생각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테이블 위에 투명한 비닐을 깔고 소형 냉장고에서 시커먼 통을 꺼냈다. 

이윽고 끼익― 방문이 닫혔다.

한편, 거실에 남은 추자는 염려스럽던 표정을 싹 지우고는 이연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권채우…….’

고요히 잠든 청년을 내려다보는 추자의 얼굴이 복잡하다. 

최근, 그녀는 권채우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의뢰를 넣었던 흥신소로부터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다.

“계추자 씨? 저희 손 뗍니다! 잔금은 안 주셔도 되고요! 아니, 예약금까지 싹 다 돌려드릴 테니까 다시는 그 이름 석 자 가지고 연락하지 마세요!”

전화는 도망치듯 뚝 끊겼고 두 번 걸려 오는 일은 없었다. 벙찐 추자가 다시 통화를 시도했을 때 그 번호는 이미 결번이었다.

그전까지 그녀가 보고 받은 사항은 딱 하나다.

가문비 나무 병원의 뒷산, 그 관리되지 않은 광활한 땅을 포함하여 몇몇의 크고 작은 산, 그 외의 여타 둘레길들을 전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

그 모든 면적을 합하면 화이도의 4분의 1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라고.

“이연아 대체 뭘 주워 온기고…….”

권채우가 바로 그 산주(山主)였다.

* * *

권채우는 이번에도 긴 꿈을 꾸었다.

그러나 눈을 딱 뜬 순간, 불길에 던져진 필름처럼 남는 게 없었다. 그는 짜증스레 미간을 좁혔지만 아쉬움은 금세 휘발되었다.

“……이연 씨.”

품을 간질이는 온기가 허망한 속을 꿰찼다. 그녀는 남자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등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권채우는 곧장 그녀의 소매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소매 끝이 진하게 젖어 있다. 이쯤 되니 한심한 꼴을 부추기는 자신의 꿈도 탐탁지 않다.

“이연 씨.”

시간관념이 희미했다. 허기처럼 그녀가 보고 싶어 다소 조급하게 작은 몸을 흔들었다. 얼른 이연의 눈동자에 제가 깃들고, 이곳이 현실임을 확인받고 싶었다. 

“으음…….”

그녀가 몸을 꼼지락거리며 더욱 달라붙어 왔다.

깨어 있을 땐 잘도 긴장하는 주제에 잠결이라고 뻔뻔하게 답삭 안긴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연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있었다. 눈두덩이가 샐룩거리고 속눈썹이 흔들렸다. 남자는 유유히 턱을 괸 채 새싹이 움트는 순간을 지켜보듯 숨을 죽였다. 그녀가 스르륵 눈을 떴다.

“…….”

“……!”

활짝 커지는 그녀의 눈망울이 햇빛에 비쳐 투명했다. 저것은 제가 가진 유일한 것. 그 빠듯한 만족감이 배 속을 채웠다.

“잘 지냈어요?”

“아……!”

이연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얼굴에 소리를 높였다.

늘 누워만 있어 정물화 같던 그가 살아 움직인다. 눈을 깜빡거리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매끈한 뺨이 알맞게 도톰해지면서. 그런 사소한 움직임이 새삼스러웠다.

“……바, 반가워요.”

이연이 비몽사몽간에 멍하니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난 며칠 만에 석방됐어요?”

“……어, 음. 오늘이 팔 일째예요.”

“왜 이렇게 빨리 깨웠어요? 더 혼내도 되는데.”

그가 이연의 목에 붙어 있던 커다란 밴드를 단번에 뜯었다. 불그죽죽한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자 그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멍 안 빠졌잖아요.”

“…….”

그때 이연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는 듯 바짝 힘이 들어간 입매가 어색하다. 그 작은 일그러짐에 권채우는 목울대가 콱 조여들었다.

“왜 그래요?”

그가 괴고 있던 손을 빼고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이제 보니 소이연의 얼굴이 많이 상했다. 눈 밑도 거뭇거뭇하고, 볼살도 쭉 빠졌다. 

권채우는 그녀의 손목을 가늠하듯 한번 쥐어 보고, 툭 불거져 나온 손목뼈를 못마땅하게 문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확 낮아진 목소리가 성대를 긁는다.

“말 안 해 주면 앞으로는 절대 혼자 안 자요. 이연 씨가 싫대도 무조건 낚아채서 방으로 들어갈 거니까 똑바로 얘기해요.”

그가 엄포를 놓자 이연은 그제야 어물어물 입을 뗐다.

“……귀찮은 일이 조금 있었어요.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려고 했는데요. 이쪽은 진짜 준비 만반이었는데……. 깔짝깔짝 지나치기만 하는 게 미칠 것 같아서…….”

그녀는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권채우는 그녀의 손목 안쪽을 조용히 눌렀다. 맥박이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이연 씨, 진정해요.”

침착하게 눈을 맞춰 오는 남자 덕분에 이연은 미뤄 두었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었다. 권채우가 그녀의 눈 밑을 엄지로 슥 훔쳤다.

“……황조윤이요.”

뜬금없는 이름에 권채우의 낯이 확 차가워진다.

“그 새끼가 왜요?”

“어젯밤부터 우리 집 마당에 계속 서 있었어요.”

황조윤은 이연이 아니라 권채우를 살폈던 건지도 모른다. 설명회 이후로는 본 적도 없고, 남자가 집에 드나들지도 않으니 그는 거리낄 것이 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연은 손을 벌벌 떨며 증거 사진을 남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황조윤은 뻔뻔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비죽이 올라가는 입매가 끔찍했다. 

신고를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커튼을 치고 있어도 시선이 달라붙었다. 뼛속까지 시린 기분에 턱이 떨렸다. 결국 이연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물론 권채우는 껐다 켤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손에 총이 들렸는데도 쏘지 못하는 건 바보라고. 

그가 필요해졌기에 태세 전환을 하는 자신은 약아빠졌다. 그 이기심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남자라면, 권채우라면. 

텅 빈 공권력보다 더 실속 있게 마침표를 찍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건 게으른 보호가 아니라, 사나운 개 한 마리였으므로.

더 이상 갈피를 못 잡고 주춤대는 이연은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고생 많았어요.”

한편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권채우는 간신히 그 한 마디만 내뱉을 수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욕은 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들끓는 속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이연을 확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부딪힌 작은 콧방울이 강처럼 파문을 만들어 냈다.

“이런 건 남편한테 맡기고 이연 씨는 좀 쉬어요.”

“아…….”

“밥 먹고 늘어져 자는 걸 딱 세 번만 반복해요.”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니. 아니에요!”

그런데 이연이 팔다리를 버둥대며 열심히 그를 밀어냈다. 마지못해 몸을 떼자 마주친 눈동자가 왜인지 곤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새하얀 볼을 긁적였다.

“그 벌레는 이미 내가 잡아 놨어요.”

* * *

황조윤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성격 하나로 사는 내내 전교 1등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물고 늘어지는 성격 덕분에 연구 실적도 좋았다.

문제는 이성 관계에서도 그랬다는 거다.

끈기 있게 파면 안 되는 건 없다.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5년간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혹 밤길이 무서울까 늘 ―뒤에서― 에스코트를 했다. 순진한 소이연이 질 나쁜 도시 친구들과 어울릴까 봐 오빠 된 마음으로 단속도 해 주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가 잠을 설칠까 보디가드처럼 불침번을 섰던 적도 수두룩했다. 그런 자신의 순애보를 그녀는 쓰레기처럼 취급했다.

그녀가 섬으로 내려가 코딱지만 한 병원을 개업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동시에 장사가 잘 안된다는 소식도.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소이연은 반골 기질이 다분했으니까.

그 후 황조윤은 곧장 앞집을 사들였다. 그곳은 오직 소이연을 위한 작업실로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새끼랑 결혼을 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소이연은 사람을 싫어했다. 그건 오래 지켜보면 자연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보다 요령이 없던 이십 대에는 그 증상이 너무 심해 초록색이 아닌 것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런 막내에게 정신과나 가 보라고 모욕하기 일쑤였지만 그마저도 이연을 상처 주진 못했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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