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158)

#20.

“지금 무슨 말을―!”

황조윤이 언성을 높이자 규백은 호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거품을 잘 무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이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러나 황조윤은 머리가 좋은 만큼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도 뛰어나서 어떤 이유로 발작할지 아무도 몰랐다.

이연은 창문을 확 닫고 규백이를 소파에 앉혀 놓은 뒤, 현관문으로 나갔다. 역시나 문 앞엔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서 있었다.

“또 엿보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서, 설마 저거 네 애는 아니지?”

그 말에 담긴 뉘앙스가 오묘하다.

“……내 애면 어쩔 건데요?”

규백이는 몸집이 작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하면 지나가던 주민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다시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참견이었고, 더 나아가 통제를 벗어난 소이연을 질책하고 있었다.

“소이연!”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너…… 그때 그렇게 사라진 게 애 때문이었어?”

“사라진 게 아니라 선배 때문에 잘린 건데요.”

“남자랑 배 맞을 시간은 없었을 텐데……! 내가 널 얼마나 철저하게 잘 관리했는데! 어떻게 애가 생겨, 어떻게 네가 그래!”

역시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안간 황조윤의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키자 그는 익숙한 듯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연은 군말 없이 핸드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신고할 거예요.”

“……이연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결혼한 게 믿기지 않아서 그래. 혹시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면 그건 내가 어느 정도 참작해 줄 수 있어.”

아, 저런 눈빛이 정말 싫었던 거다. 누군가의 구원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져 혼자서 영웅 놀이에 심취한 샌님.

그러나 속을 까보면, 그저 제 영향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병든 좀생이에 불과했다. 저런 옹졸한 사람의 타깃이 됐다는 게 새삼 치욕스러웠다.

“네, 거기 경찰서죠?”

이연은 그의 눈을 정면에서 쏘아보며 통화를 했다.

“스토커가 가택 침입을 해서 신고했습니다.”

“이연아, 나는 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

그가 과장스럽게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쳤다.

“음주를 했는지 헛소리에 난동까지 부리고 있어서요.”

그녀는 죄목을 하나 더 추가했다.

“소이연!”

그는 철저히 배신당한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너를 위했다는 죄밖에 없어!”

그 말에 이연이 핸드폰에서 잠깐 귀를 떼고 받아쳤다.

“아니요, 선배는 그냥 개미 죽이는 데 맛 들인 거죠.”

황조윤은 번득이는 이연의 눈이 낯설다 생각했다. 그가 기억하는 소이연은 고독하고, 안으로 쉽게 침잠하여 굴복시키기 쉬운 애였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지금, 소 원장은 그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이연은 생매장을 목격했다 죽을 뻔하고, 그 살인자를 2년 동안이나 제집에 숨기고 있기까지 했다.

또 그 남자가 깨어나선 어떻게 했게?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샌님 따위야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 이연의 간은 이미 충분히 넙데데해졌다.

“고작, 개미 갖고 놀면서 왕 행세하는 게 웃겨요. 여덟 살인 규백이도 그렇지는 않거든요.”

황조윤의 입매가 움찔움찔 비틀렸다.

“너, 너, 네 남편이란 놈은 제대로 알고 있는 거야? 그때 보니까 성질이 보통이 아니던데, 사기 결혼 당해서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니야?”

꼭 그러기를 바라는 투였다.

“내가 뭐 큰 걸 바래? 그냥 동사무소 같이 가서 서류 한 장만 보여 주면 깔끔하게 끝나는 문제잖아. 나는 그걸 안 보여 주는 네가 더 수상하다고!”

“선배.”

“네 그런 태도가 날 미치게 하는 거야, 모르겠어?”

그가 침을 튀기며 허공에 삿대질을 했다.

“내가 정신병자인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 가는 네가 더 못된 년인 거야!”

진짜 혈압이 올라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 선배랑은 차라리 육탄전이 낫겠다. 이연은 수레에 쌓아 두었던 흙을 한 움큼 집어 들어 던질 것처럼 팔을 올렸다. 그러자 그가 움찔 뒤로 물러선다.

“내 사생활엔 신경 꺼요. 식물보다 나은 점이 단 한 개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네.”

이연이 D 병원에서 쫓겨난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황조윤은 그렇게까지 일편단심이 아니다.

그동안 다른 여자들에게 뻥뻥 차이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이연을 보니 만만하고 쉬웠던 것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는 다시 무례를 저지르는 거겠지.

“그리고 나 무서운 남편 생겼어요.”

“이연아.”

그가 속이 문드러진다는 얼굴로 애원했다.

“경험담인데, 남편이 사람을 되게 잘 물거든요.”

그녀는 문득 그날 밤이 떠올라 헛기침을 했다. 이연이 목소리를 낮춰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그런데 묻는 것도 얼마나 잘하던지.”

그녀가 고갯짓으로 삽이 한가득 놓여 있는 마당을 가리켰다.

“괜히 눈에 띄지 마세요.”

이연은 손을 탁탁 털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침침했던 스물둘의 이연만 기억하고 ‘방황하는 어린 양의 영혼을 내가 잘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한 황조윤은 그녀의 경고를 쉽게 잊고 말았다.

봄바람이 싸늘하다.

이연이 커튼을 닫는 순간, 이쪽을 서늘하게 쳐다보는 황조윤과 눈이 마주쳤다.

카메라의 새까만 렌즈처럼 이쪽을 관찰하듯 주시하는 기이한 눈. 질릴 정도로 익숙한 시선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부터 황조윤의 스토킹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 * *

권채우를 깨우고 싶다.

이연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드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이 온통 그의 이름으로 꽉 차 무거웠다.

“또 신고하셨더라고요?”

현관문 앞에 선 경찰의 얼굴이 덤덤하다.

그러나 표정 없이 서늘한 건 이연도 만만치 않았다. 먹히지 않는 신고와 경고만이 구겨진 빨랫감처럼 늘어나자 피로는 전부 이연의 몫이었다.

현관문 앞에는 죄 없는 장미꽃이 매일 아침 꽂혀 있고, 어디를 가든 집요한 눈길이 느껴졌다.

하루에 세 번 이상은 스치듯 황조윤과 만났고, 그는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긴가민가할 정도로만 우연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렇게 조금씩 신경 쇠약이 왔다.

차라리 저번처럼 창문에 달라붙어 그 징그러운 눈동자를 파충류처럼 굴리고 있었다면 현장을 잡기가 더 수월했을 것이다.

이연은 창문에 묻은 지문을 매일 같이 테이프로 수집했고, 동물을 잡을 때 쓰는 덫까지 사 두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CCTV만 봐서는 얼굴과 신원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담벼락을 너머를 힐끗 쳐다보기도 했고요.”

“……장미꽃은요?”

“그 시간대에 황조윤 씨는 이미 출근을 마쳤다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이연이 피로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거무죽죽해진 낯은 아무리 얼굴을 문질러도 원래의 혈색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좀 안될까요? 분명 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단 말이에요……!”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경찰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은근히 탓하는 말이었다. 거기서 이연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더는 호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별다른 대책 없이 경찰은 물러났다. 그때 한 발짝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앳된 여경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경찰차에 올라타는 사수를 힐끔거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지역 유지가 끼어 있어요.”

“……네?”

“그 황조윤 씨 말이에요. 알리바이 확인하려고 D 병원에 갔었는데요. 위에서 바로 저희 파출소로 연락 오더라구요. D 병원 귀찮게 하지 말라고.”

“…….”

“죄송합니다.”

순경은 두 손을 모았고, 이연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조 원장이 그 대단한 인맥으로 또다시 장난을 치려는 거라면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소이연 씨가 2년 전에 허위 신고한 파일이 아직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순경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마당을 벗어났다. 한마디로 전적이 있는 이연의 요청보다도 지역 유지의 헛기침 한번이 더 중하단 소리였다.

‘나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오늘따라 그렇게 묻던 퍽 순진한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 * *

“깨우려면 마음 단디 먹고 깨워라.”

권채우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데 추자가 묘한 조언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연은 푸석해진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추자는 며칠 새 얼굴 살이 쭉 내린 이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금마를 이용할 거면, 너도 하나는 내려놓으라고.”

“……네?”

“하나만 하라는 기다. 하나만. 금마를 끝까지 살인자로 대할 거면 똑같이 독해져도 상관은 없지만, 만약 진심으로 도움을 받고 싶으면…….”

문득 추자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쓸었다.

“권채우를 새사람 취급 정도는 해 줘라.”

“……!”

“지금 점마는 암것도 안 담긴 텅 빈 그릇이다.”

부러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추자가 꼬집고 들어오자 이연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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