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남자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아픈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붉어진 눈가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당황한 이연이 주춤거렸다.
“왜, 왜 그러는…….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그녀가 난간을 잡고 내려오려 하자 그가 쌀쌀맞게 손을 올려 저지했다.
“그냥, 거기 있어요.”
왜인지 달뜬 숨이 섞인 목소리였다.
“네?”
“이연 씨가 지금 내 냄새 맡으면 각방은 물 건너갈 것 같으니까, 그냥 거기 있으라고요.”
“…….”
“왜요, 나 싸는 거 더 보고 싶어요?”
이연의 시선이 얼결에 그의 하반신을 향했다. 그러자 옷 밖으로 비치는 두툼한 윤곽이 불현듯 꿈틀거렸다.
“……그건 보고 싶다는 사인이에요?”
그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나직이 물었다.
“아, 아니요!”
“아닌 게 아닌데. 관심 있어 보이는데.”
“내가 궁금한 건 바닥에 흘렸나 안 흘렸나 하는 거였어요! 나는 집주인이니까. 나무 바닥에 얼룩이 지는 건 민감한 사안이라서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는 아아, 하고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내는 음에 따라 목울대가 움직였다.
“괜찮아요. 바닥은 무사해요, 아직은.”
“…….”
“그런데 이렇게 계속 서 있다가는 흘러내릴지도 몰라요.”
이연의 얼굴이 폭발하듯 빨개졌다. 권채우는 그 선명한 색감에 군침이 돌았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얼른 떨어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그는 재깍 몸을 돌려 1층을 가로질렀다.
이연은 퍽 단호하기까지 한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라요! 오래 잘 생각이면 방을 바꿔야죠! 권채우 씨가 내 방으로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나더러 어떻게 생활을―!”
그러나 이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권채우가 쾅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고 보란 듯 문고리까지 잠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시를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권채우는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손 쓸 도리도 없이 정액을 싸질렀다. 한껏 예민해진 그에게 이연의 체취가 밴 침대란 끔찍한 극락이었고, 결국 권채우는 그녀의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터질 듯한 성기를 문대며 밤새 끙끙 앓았다.
* * *
“병원에는 이연 씨, 장모님, 그리고 나뿐이에요?”
회의 만찬장으로 향하던 길에 권채우가 물은 적이 있다.
“곤충 박사님이 한 분 더 계시긴 한데……. 요즘은 학교에 다니느라 방문이 뜸하네요.”
“교단에도 서시는 분인가 봐요.”
“초등학교요.”
그때 이연은 별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집에 살다 보면 직접 보게 될 테니까.
“원장 선생님―!”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아직 앳된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빵빵하게 터질 것 같은 배낭이 아이를 압사할 듯 누르고 있었지만, 쫄래쫄래 야무진 걸음은 믿음직했다.
아이는 투명한 곤충 박스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만 7세 이규백이었다.
“이제 큰이십팔점박이무당벌레랑 이십팔점박이무당벌레를 혼자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중국별뚱보기생파리를 기필코 잡아서 연구할 것입니다.”
늘 그랬듯 규백은 인사보다 지식부터 뽐냈다. 아이는 제 지정석에 자연스럽게 앉아 곤충 도감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오늘 가문비 나무 병원에는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하나는 <화이돔 프로젝트>의 신청서가 접수되어 드디어 1차 토너먼트 공지가 떴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병원의 객원 박사님께서 오랜만에 발걸음을 했다는 거다.
이연은 오랜만에 보는 아이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컴퓨터로 고개를 돌렸다.
총 50여 개의 업체가 참여하게 됐다는 공개 심사. 그중 가문비 나무 병원의 첫 번째 상대는 그녀도 잘 아는 <그린 나무 병원>이었다.
키가 작고 왜소하지만 수더분한 아저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그녀가 보기에도 실력, 평판, 경력 등 여러모로 안정적인 병원이었다. 객관적인 경영 지표로 비교를 해 보자면, 가문비가 많이 딸렸다.
“그래서, 대체 뭘 심사한다고 하드나?”
추자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가지치기래요.”
“그렇게 요란을 떠는 것 같더니 고작 전정(나뭇가지를 자르고 다듬는 일)이라고? 그건 껌 아이가! 내가 가위 좀 닦아 놓을까?”
“그런데 좀…….”
이연이 표정이 미묘해졌다.
“와?”
“나무가 30m래요.”
“…….”
“…….”
눈을 마주한 두 여자는 서로 짠 듯이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나무의 높이가 10층짜리 건물과 맞먹는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화양시는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복잡한 케이스들을 이번 공개 심사에 가져온 듯했다.
이연은 메일에 첨부돼 있는 사진을 골똘히 보았다. 기형적으로 잘못 뻗은 가지 하나가 도로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휘어 있었다. 혹여나 뚝 부러진다면 주행 중이던 차체 위로 떨어져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잠깐 이게 뭔 말이고.”
그때 눈으로 메일을 읽던 추자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사다리차 사용 금지라고?”
재미있는 점은, 상황을 더욱 꼬아 놓음으로써 주최 측의 의도가 눈에 보인다는 점이었다.
“직접 나무를 타길 바라는 거 같죠?”
나무의사의 원초적인 자질과 체력을 보는 시험이었다. 그들은 의외로 몸을 많이 쓰는 직업이었고, 업무상 나무 위에 올라가 외과 수술을 진행해야 할 때가 잦았다.
쉽게 말해, 얼마나 나무를 무서워하지 않느냐의 문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저찌 올라간다 해도 사람 무게 때문에 가지가 휘청거릴 낀데!”
“…….”
물론 추자의 말처럼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연이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무심결에 시선을 돌린 그녀가 다급히 팔을 뻗었다.
“아악, 규백아……! 거긴 들어가면 안―!”
어느새 활자를 다 읽은 규백이 이연의 방문에 손을 대고 있었다. 눈이 튀어나온 이연이 곧장 내달렸지만, 아이가 문을 여는 게 훨씬 빨랐다.
기묘한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
꼼꼼히 닫힌 커튼 아래, 반듯하게 누운 한 남자가 이연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곱게 감긴 속눈썹만으로도 이곳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수놈입니다.”
규백은 바둑알 같은 동공을 확 넓히며 중얼거렸다.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물건의 존재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어린 소년은 조심스레 이불을 젖히고 감탄을 했다.
“이 수놈은 머리, 몸통, 다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팔 두 개 다리 두 개로 완벽한 신체를 자랑합니다.”
규백이 백과사전에 기입하듯이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처음 본 사람을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목차와 색인이 중요한 규백이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운율이 부족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침대를 훌쩍 넘는 길이에 손과 발이 크고, 코가 우뚝한 것이 특징입니다.”
규백은 괜스레 자신의 콧대도 더듬거려보며 말했다.
“수컷의 생식기는―”
“그만, 그만!”
이연이 아이를 끌어내며 방문을 닫았다. 규백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연을 올려다보았다.
“원장 선생님 남자 친구 생겼습니다.”
“그런 거 아니야.”
“수컷은 발정기를 함께 보내거나 알을 지키기 위해 암컷의 둥지에 들어옵니다. 동물 백과 백구십삼 페이지.”
이연은 헛기침을 하며 목 뒤를 긁적였다.
“그런 거 아니래도?”
“원장 선생님은 수놈을 잡아다 박제했습니다.”
“뭐어?”
“희귀종입니다. 저 수놈은 희귀종입니다.”
이연은 또랑또랑한 규백의 얼굴을 뚱하게 바라봤다.
“수놈 모양이 좋습니다. 멋집니다. 힘도 세고, 몸도 좋고, 사냥도 잘할 겁니다. 이빨이 단단합니다. 뒷다리가 튼튼합니다.”
규백의 눈동자에 강한 수놈에 대한 선망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연이 한숨을 푹 쉬며 허리를 굽혔다.
“규백아, 저건 희귀한 게 아니고 위험한 거야.”
“강한 수놈은 원래 위험합니다.”
이연은 이마를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규백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수놈이 깨어나지 않습니다. 낮인데도 잠을 잡니다. 선생님은 식물만 좋아합니다. 고로, 독초를 써서 수놈을 잡았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장 선생님이 수놈을 채취했습니다.”
이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 과열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그녀가 거실 커튼을 확 열어젖혔을 때였다.
“꺅!!”
예기치 않게 새된 비명이 터졌다.
창문에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황조윤 때문이었다. 창문에 짓이겨진 볼이 부침개처럼 팍 눌려 있었다. 그녀가 거칠게 창문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요, 선배?”
“……이연아.”
혼자서만 애절한 황조윤의 시선이 곧장 달라붙었다.
“웬 어린 애가 네 집으로 들어가길래.”
“그게 왜요?”
황조윤이 힐끔 이연의 뒤를 쳐다보았다. 규백이가 그런 그를 건조하게 훑으며 또다시 백과사전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 배, 다리로 이루어진 수놈의 배는 모양이 매우 이상합니다. 보기에 좋지가 않습니다.”
“규백아.”
이연이 아이를 제지하듯 말렸다.
“팔 두 개 다리 두 개로 간신히 그 구색은 갖추고 있지만 창밖에 붙어 있는 꼴이 변변치 못하고 눈망울이 맛이 갔습니다. 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