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표정이 사라진 그는 말없이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졌다. 이연은 등에 와닿는 감촉을 잊으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권채우 씨, 그렇게 밀어 봤자 하나도 안 시원해요. 때수건 거기 내놨단 말이에요. 그거부터 껴 주세요.”
“아파 보여서요.”
“네?”
“잘못 손댔다간 이연 씨 등 붉어질 것 같아요.”
“……그러라고 목욕하는 건데요?”
이연은 딱딱한 나무와 연신 부대끼느라 얼룩덜룩 멍이 든 몸을 구부려 감추었다. 권채우가 어떠한 오해를 했는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그럼 오늘은 목욕이 아닌 걸로 해요.”
“씨, 장난해요?”
이연이 고개만 뒤로 팽 돌려 씩씩거렸다. 그를 노려보는 앙증맞은 눈빛이 퍽 매서웠다.
“그냥 나랑―”
웃음기 하나 없는 음성이 잠깐 텀을 둔다.
“간단하게 노는 걸로 쳐요.”
그의 손바닥 전체가 등에 뜨겁게 맞닿았다. 살짝 까끌까끌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느릿하게 주물렀다.
“어…….”
팔을 그대로 내려 등 중앙을 꾹꾹 누를 때에는 이상하게 허리가 움찔거렸다.
따뜻한 물과 그보다 더 뜨거운 손. 그리고 오래된 흉터. 그 어딘가에서 마찰열이 일었다. 이연은 나른한 숨이 터질 것 같아 곧장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여름날의 습기가 온 피부에 들러붙었다.
손가락 끝이 여의치 않게 가슴 아래쪽을 스쳤다. 그녀가 재빨리 두 팔뚝으로 가슴을 모아 가렸다. 남자는 담백하게 떨어졌다.
그가 엄지로 척추 선을 따라 둥글게 문질러 주면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허리 굴곡에 닿았다. 그의 두 손안에 넉넉히 허리가 잡혔다. 이연은 그대로 온수 속으로 녹아들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차라리 아프게 빡빡 밀어 주기나 하지, 이연은 오싹하게 곤두서는 느낌이 어색해 천장만 노려보았다.
푹 익어 버린 얼굴은 온수 때문이어야 했다.
* * *
한번 등짝을 까고 나니 한 침대에 오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벌써부터 팔다리가 노곤하게 풀리는 게 잠이 솔솔 오는 것 같았다. 이연은 항복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권채우 씨, 잘 자요.”
마침 그가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자 매트리스가 꽉 들어찼다. 이연은 설명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며 스르륵 눈꺼풀을 닫았다.
오늘 하루가 참 길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건가? 권채우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움직인 첫날. 까다롭긴 했지만 다행히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
“벌써 졸려요?”
“네……. 네?!”
이연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왜 그래요?”
잠깐만, 편안해?
지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했어?
미친 거 아니야?
‘저 남자는 날 죽이려 했고, 나는 톱으로 저 사람을 후려쳤어! 저 사람은…… 나쁜데다가 무섭기까지 한 사람이야!’
몽롱했던 정신이 확 현실에 내쳐졌다. 이연은 무의식적으로 해 버린 생각을 곱씹으며 머리를 콩콩 때렸다.
그러자 덩달아 일어난 권채우가 그녀의 작은 주먹을 감싸고 눈썹을 추켰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남자 옆에 눕는 게 정말 편안해?
‘정신 차려, 소이연!’
이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그 도축장을 잊지 말란 말이야……!’
상생을 원하는 이연은 살생의 가문과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살인자 옆에서 태평하게 잠이나 잔다는 게 말이 돼?
이연은 저의 안일한 태도에 하얗게 질렸다. 완벽한 안전 불감증이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느슨하진 않았었는데.
“이연 씨.”
은연중에 미간을 찌푸린 권채우가 그녀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이연은 이 사실을 부정하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눈 떠요.”
“…….”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어딜 가겠다고 한쪽 다리를 밖에 내놨어요?”
그제야 한쪽 다리가 바닥을 짚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급히 나온 행동이었다.
얼굴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가 꽉 잡고 있는 바람에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시위하듯 입술까지 꽉 닫았다.
권채우는 별안간 온몸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이연의 모습에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진짜로 눈 안 떠요? 나 안 봐 줄 거예요?”
“…….”
“나랑 얘기하기도 싫어요?”
조르는 듯한 목소리에도 이연은 현혹되지 않았다.
“이연 씨는 사람 수틀리게 해 본 적 없죠?”
그 순간 권채우가 이연의 목덜미를 콱, 물어 버렸다. 고집스레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이고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이렇게 겁이 없지.”
그는 더욱 고개를 숙여 그녀의 살점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입술을 크게 벌릴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집요하게 물고 긁느라 콧날이 뭉개졌다. 사람을 홀리는 체취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고 통증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피만 더 빠르게 돌았다. 점막에 들러붙는 이연의 순한 살냄새가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시뻘건 충동으로 머릿속이 점차 뿌예졌다.
한 손으로 그녀의 턱과 귀를 감싸고, 나머지 손으로는 뒤통수를 꽉 붙들었다. 잇몸 사이사이에 그녀의 모든 것을 처바르고 싶었다. 설령 그게 피라도 상관없었다.
“……아!”
그녀가 한 차례 더 바르작댔지만 웃음만 샜다. 이를 세워 보드라운 살점을 콱 박고 짓씹었다.
권채우는 갓 씻은 과일 같은 그녀를 마음껏 탐닉했다. 어쩌면 아침부터 발화했을 이 이름 모를 갈증.
그는 고개를 비틀어 더욱 파고들었다. 뱀처럼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습윤한 목덜미에 난장질을 쳐 대고 싶었다. 가난한 머릿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기억이었다.
드로어즈가 조금씩 젖었다. 빳빳이 곧추선 성기 끝에서 쿠퍼액이 길게 흐르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행위에도 억눌린 신음이 샜다.
“하아…….”
머리에 낙뢰가 꽂혔다. 이런 거 말고, 더. 더. 무언가가 갈급하게 그를 부추겼다.
거칠게 문대고 헤집지 않으면 이 욱신거림이 잦아들 것 같지 않았다. 짐승처럼 허리가 튄다. 기껏해야 목이 아니라, 온몸을 다 발라먹고 싶어서.
“……기, 기억이 난 거예요? 그런 거예요?”
그때 이연이 벌벌 떨며 물었다.
충성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다짜고짜 사람을 무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미쳤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이연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권채우 씨. 기억이…… 돌아왔어요?”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순간 권채우는 불쑥 옆구리가 찔린 사람처럼 모든 행위를 멈추었다. 이갈이하는 동물도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을 것이다.
목에서 입술을 떼고 보니 점점이 곰팡이가 핀 듯 빨갛게 멍이 들었다. 가히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아니요, 이연 씨. 아니요.”
경계와 공포, 그리고 의심을 담아 이연의 동공이 찢어질 듯 흔들렸다. 공격력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이 털을 바짝 세워 이쪽의 기색을 필사적으로 살핀다.
그건 숫제 괴물을 보는 표정이었다.
그 시선 하나에 권채우는 자신의 과거를 엿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는 문구멍이었다. 그 볼록한 렌즈는 불행한 소이연과 난폭한 자신을 흑백으로 보여 주었다.
비정상적인 흥분이 식자 자괴감이 신물처럼 넘어왔다.
“이연 씨, 내가 잘못했어요.”
“…….”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실수했어요.”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완전히 가려 버린 모습에서 죄악감이 드러났다.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권채우는 동시에 뱃속이 부글부글 끓기도 했다.
스킨십을 하자마자 기억이 났냐고 묻는 건 뭐야.
‘권채우’ 그 새끼랑 대체 어떤 식으로 섹스를 했길래 이렇게 학을 떼고 무서워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흉포한 감정은 어렵고 낯선 것이어서. 그는 진정하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턱 근육이 툭 불거졌다 사라졌다.
“이연 씨, 오늘은 따로 자는 게 좋겠어요.”
“……네?”
“나름의 벌이에요. 아침은 반납할게요.”
“…….”
“뭣하면 한 달, 두 달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이연 씨 마음이 풀릴 때까지는 깨워 주지 마요.”
그리고 권채우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이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처음 든 생각은 다행이라는 거였다. 혼자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기억을 찾은 게 아니라 다행이다.
이연은 무심코 욱신거리는 목에 손을 댔다가 화들짝 놀랐다. 조금만 자극을 줘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몸서리치게 아팠다. 이 정도라면 목을 완전히 씹어 놓은 게 분명했다.
“아……!”
침대에서 빠져나온 이연이 그를 뒤쫓았다.
“권채우 씨, 잠깐만요!”
다급한 부름에 계단 맨 아래쪽에 선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소리 없이 욕설을 내뱉는다. 대충 입 모양만 읽어도 몹시 상스러운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