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연 씨?”
“네, 넵!”
“아내 시중이라도 안 들으면 남자로서 효능감이 떨어질 것 같아요. 이연 씨는 나를 남편으로서 전혀 이용하질 않잖아요.”
“…….”
“내가 이 모양이니까 이연 씨도 일주일 동안이나 날 방치하고 안 깨운 거죠. 살아가는데 내가 썩 필요치 않으니까. 내 말이 틀려요?”
“……!”
이연은 가슴 한편이 선득해졌다.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감추고 싶던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게 왜인지 수치스러웠다.
“그, 그건 의사 선생님이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고,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권채우 씨가 잠들었을 때에도 계속 옆에 있었고…….”
변명이 구차하게 길어졌다. 쭉정이처럼 텅 빈 자기변호는 그녀가 듣기에도 궁색했고, 그 결과 목소리는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알아요.”
“…….”
“이연 씨가 내 아침이에요.”
남자가 이토록 맹목적인 만큼, 반대로 이연은 성의 없게 비쳤다. 그 격차가 묘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백번을 양보해도 불성실한 아내는 그의 의심을 부추기는 요소였다.
이연은 나름대로 계산을 하느라 권채우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연 씨가 날 가르칠 자신이 없다면, 내가 남편 노릇 하려는 걸 거부하지만 말아요.”
“……그 노릇 중에 하나가 씻겨 주는 거구요?”
이연이 미심쩍다는 듯 되묻자 오히려 이맛살을 찌푸린 권채우가 손가락 두어 개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이상하네요. 섹스할 땐 더한 짓도 했을 텐데.”
“…….”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 부부가 섹스에 재미를 못 붙인 건,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려는 습성 때문인지도 몰라요. 나한테 좀 더 무례하게 굴어 봐요.”
그가 저런 식으로 문제를 확장시키면 이쪽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저 민망한 저 주둥이를 얼른 틀어막고 싶었다.
“……그, 그럼 등만 밀어 주세요. 딱, 등만이에요.”
그는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차르륵, 하고 움직이는 물소리가 곡성처럼 무섭다.
미쳤지, 미쳤어.
욕조에 몸을 담근 이연은 철저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를 속이는 주체는 그녀인데 왜 자꾸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똑똑.
그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드, 들어오세요.”
이연은 과거, 그의 생매장을 목격했을 때와 옷을 홀딱 벗고 있는 지금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미친 듯이 심장이 내달리는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누가 브레이크 좀 걸어 주면 안 돼? 코점막에 달라붙는 습기가 더해져 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연 씨.”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목소리였다. 내내 따뜻한 공기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불현듯 어깨에 찬기가 닿았다. 드르륵, 하고 욕조 밖에 놔 두었던 의자가 끌렸다.
“몸은 좀 풀렸어요?”
“……네.”
“정말 등이면 돼요?”
“네, 네.”
이연은 일부러 욕조에 거품을 많이 풀었다.
그녀는 권채우가 들어온 순간부터 더욱 고집스럽게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렵고 무서운 남자 앞에서 가슴을 보이느니 차라리 등짝을 희생시키는 게 백배 나았다.
일부러 부항도 뜨는데, 이건 별것도 아니다.
“팬티 입었어요?”
가까이에서 미약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네?! 그, 그게 보여요?”
이연이 움찔하며 구름보다 더 풍성한 거품들을 한가득 끌어모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시선이 아래에 꽂히는 거 같아 엉덩이 쪽이 간질거렸다.
“부끄러워서 입은 거예요?”
“……나, 나보다는 권채우 씨가 더 창피하지 않을까요? 권채우 씨는 기억이 없으니까 이런 상황도 처음일 거잖아요. 나, 나는 꽤 익숙하지만 권채우 씨가 여자 알몸 보고 깜짝 놀랄까 봐서……!”
“그래요?”
그가 욕조 안으로 불쑥 손을 넣었다. 차르륵, 물소리가 나자 그녀의 등줄기가 뻣뻣이 굳었다. 말과 행동이 영 딴판이었다.
“이연 씨 진짜 귀엽네요.”
오로지 청각에만 의지해 그의 행동을 짐작해야 하는 상황은 그녀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딴 걸 배려랍시고 하고 있어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리며 물을 휘저었다.
이연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차마 가려지지 않는 가슴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꾹 참았다.
그러나 권채우는 이연의 생각처럼 편히 웃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의 가녀린 어깨와 오목한 등허리를 보는 순간, 불쑥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고 싶단 충동이 치솟았다.
조붓한 몸이며 매끈한 살결이며 그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 부분이 없었다.
탐욕스러운 개가 되어 그녀를 깔아뭉갠다면 놀랄까, 울음을 터트릴까. 아니면 벗어나려고 몸을 파닥파닥 움직일까.
그는 끓는점을 훨씬 웃도는 눈으로 낙인을 찍듯 이연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젖은 목선, 연약해 보이는 날개뼈, 잘록한 허리.
앞섶이 끝도 없이 부풀었지만 그는 건조하게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내버려 두었다.
진짜 권채우는 그녀를 마음껏 만져 봤을 것이다. 거부하지 않는 여자를 벌리고, 빨고, 속속들이 핥으며 짓쳐 들어가 모든 것을 가져 봤겠지.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권채우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기억을 찾고 싶었다. 지금만큼 간절하게 잃어버린 기억을 갈구했던 순간도 없었다.
“……이연 씨, 이거 뭐예요?”
그때 거칠어진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권채우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그녀의 등을 훑는다. 움직이는 손길에 맞춰 움찔움찔 몸을 떨던 이연이 외쳤다.
“때수건 껴야죠, 때수건!”
“…….”
그러나 권채우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의 오래된 흉터를 살살 만지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요철을 전부 흡수해 가겠다는 듯이 푹 파인 흉터의 모서리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혹시 맞았어요?”
“별거 아니에요.”
거품과 물이 섞여 미끈거리는 손길이었다. 기분이 묘해진 이연은 은근슬쩍 몸을 뒤틀었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요, 이연 씨.”
“뭐…….”
그녀가 무릎 위로 고개를 숙였다.
푹 꺾인 목선이 애처롭다. 동시에 그 사슴 같은 목선을 꽉 물고 싶다는 광포한 마음이 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가 드륵, 하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누가 이랬어요?”
이 흉터는 폭력의 흔적이다.
딱 떨어지는 명제는 권채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정보였다. 답지를 펼쳐 본 것 같은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저런 흉터는 펜촉이나 가위 끝으로 오랜 시간 찍혀야만 가능한 모양이라고. 그는 본능처럼 돌아가는 익숙한 도출 감각에 눈썹을 찌푸렸다.
“말하기 싫어요?”
이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처음 받아 본 질문이라 그랬다. “누가 이랬어?”라는 단순한 걱정을, 그녀는 이 나이 먹도록 처음 받아 보았다.
옛날부터 그녀의 생활에 관해서라면 다들 그러려니 하는 면이 있어서.
쟤는 그래도 되는 애라고. 불쌍한 건 어린 애가 아니라 살면서 저걸 계속 봐야 하는 가족들이라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족들은 전부 미칠 거라고. 모두가 공감하며 쉬쉬했다.
이연은 거품이 섞인 욕조 물을 얼굴에 부었다. 눈이라도 확 따갑길 바랐다.
“가족이요.”
“…….”
권채우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동시에 불쾌한 가정이 축축하게 눌어붙고 있었다. 그녀가 착하고 다정하다며 반복적으로 주장한 ‘권채우’에 대한 의심이.
흉터뿐만이 아니었다. 멍이 주기적으로 드는 몸인지 흰 살결에 거무죽죽한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괜찮아요, 안 믿어 줘도 돼요.”
이연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그 관성적인 무마에 권채우는 툭 밀쳐진 듯 답했다.
“믿어요.”
이번엔 이연의 어깨가 움칫, 튀었다.
“그 가족이란 인간은 어지간히도 쓰레기였나 봐요.”
권채우는 낮게 읊조렸고 이연은 덤덤히 받아쳤다.
“글쎄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때리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그는 속이 끓는다는 얼굴로 이를 악다물었다.
“너무 사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요.”
“……!”
깨어나자마자 달려들었던 동물적인 행동, 그녀의 까무러치던 반응들,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믿고 싶진 않지만 얼추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권채우는 이마에 총부리가 닿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애정이 분노가 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사람은 나무랑 달라서 대가 없이 주고 또 주지 않거든요. 그래서 열매가 잘못 맺히면 사람들은 못 견뎌 해요.”
묵묵한 목소리는 타일을 때리고 다시 돌아왔다.
권채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제야 소이연의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녀에게 끔찍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