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158)

#16.

“이연아, 이연아.”

느릿하게 곱씹는 이름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선배가 헐레벌떡 말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였다. 권채우는 머리가 아픈 듯 눈썹 뼈를 꾹꾹 눌렀다.

“남의 아내 이름 좀 그만 불러요, 죽여 버리기 전에.”

싸늘하게 쏘아보는 눈빛이 칼날 같았다. 표정이 씻겨 나간 자리엔 아무 의미도 없는 인두겁만 남았다.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흠칫 얼어붙어 숨도 쉬지 못하는 황조윤의 꼴을 보니 이게 단순한 착각만은 아닌 듯싶었다.

이연은 사제 폭탄을 목격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에게서 과거의 잔상이 엿보였다.

권채우를 너무 밖으로 일찍 내보냈나? 두통이 온 거면 기억 찾는 건 순식간 아냐?

이연은 미치도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심장이 요동을 쳤다.

권채우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유리잔을 향하는가 싶더니, 이연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아, 아, 안 돼! 뭐가 됐든 안 돼!

이연은 느슨해진 그의 팔을 붙잡아 다시 안전 바처럼 제 허리에 둘렀다. 권채우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마주친 눈이 고요했다.

“나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

“눈이랑 손은,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이연 씨가 다시 한번 잘 골라 줘요.”

그는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부드럽게 풀린 얼굴이었다.

“오른쪽 불알이에요, 왼쪽 불알이에요?”

이연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보단 선택지가 유해졌어요?”

더 이상 황조윤은 그녀의 머릿속을 흔들지 못했다.

* * *

이연은 유해한 것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권채우를 데리고 정신없이 카페를 나섰다. 그러는 와중에도 심장은 콩닥콩닥 무섭게 뛰었다.

‘―죽여 버리기 전에.’

느닷없이 과거가 넘어오는 순간은 속수무책이었다. 곱씹을수록 등줄기가 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의 존재가 권채우의 어딘가를 세게 건드린 것 같았다.

……아니, 아니다.

그건 너무 간단한 결론이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연의 얼굴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선배와 뭇사람들이 권채우를 자극한 게 아니라, 그는 이연의 분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거였다.

이연이 조금이라도 불쾌해할라치면, 남자는 선을 훌쩍 넘을 것처럼 기민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 말인즉,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관리를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적어도 내가, 내 계획을 망칠 수는 없어……!’

그런고로 권채우의 앞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계속 보이는 건 위험했다. 그의 기억 상실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선 그녀부터가 단단하고 의연해져야 했다.

이연이 뒷걸음을 칠 때마다 권채우의 발을 밟는 꼴이 되니까. 그리고 그건 뛰쳐나가 날뛰라는 신호밖에 되지 않았다.

“……나, 황조윤이랑 꼭 한판 붙을 거예요!”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눈에 힘을 주고 선언했다. 그 말에 조용히 따라오던 남자가 자못 서늘한 낯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이연 씨.”

“권채우 씨는 걱정할 거 없어요. 내가 공적으로, 합법적으로 잘 해결할게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다 두통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마지막 말은 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덧붙였다. 권채우는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딴 남자랑 붙어먹겠단 소리를 그렇게 크게 하면 듣는 남편은 세상이 무너지는데요.”

“그게 아니라요……!”

이연은 펄쩍 뛰었다.

“공개 심사요! D 병원만큼은 내가 눌러 주고 싶어졌어요.”

이연이 주먹을 들어 올리고 각오를 되새기는 동안, 어느새 밀짚모자며, 겉옷이며, 권채우의 자연스러운 손길에 따라 술술 벗겨지고 있었다.

“그 선배란 새끼가 이연 씨한테 무슨 짓 했어요?”

“뭐…….”

눈동자를 돌리는 모습을 보니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냥 귀찮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도와줄 건 없어요?”

“……앞으로 예쁘고 좋은 것만 보기?”

그가 정답을 고르듯 미간에 옅은 선을 그었다가 한층 깊어진 눈으로 사르륵 입매를 올렸다.

“그건 어렵지 않죠.”

부드러운 눈빛이 이연의 이목구비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이연은 목덜미를 긁으며 살짝 시선을 비꼈다.

“권채우 씨, 그런데요…….”

“예.”

“아까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왜 한 거예요?”

그녀는 진지하게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사과를 듣겠다는 게 아니라, 놀라서 그래요. 권채우 씨가 그러는 건 처……음 보거든요. 네, 아마도 처음…….”

힘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에 권채우는 속이 타들어 갔다.

“그 새끼가 이연아, 이연아, 하고 부를 때마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어요.”

“……그, 그랬어요?”

“그 입을 확 찢어 버리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았는데.”

권채우가 그때를 곱씹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내 눈엔 이연 씨가 꼭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여서.”

이연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부딪치자 권채우는 그제야 막혔던 숨이 뚫렸다는 얼굴을 했다.

“거기서 그 남자는 이미 한 번 죽었어요, 이연 씨.”

권채우가 이연의 마른 눈가를 톡 건드렸다.

“나는 이연 씨가 아니면 다정은 턱도 없어요.”

그 말을 증명하듯 남자는 봄처럼 웃고 있었다.

* * *

“하겠다고?”

병원으로 돌아온 추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이연이 얼마나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지 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이연을 따라다녔던 건 친구가 아니라 소문이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폭로되는 상황을 죽기보다 무서워했다.

그런데―

“참말로 하겠다고?”

“네.”

“카메라 올지도 모른다는데?”

“……그 전에 탈락할 수도 있어요.”

이연은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일단은 D 병원이 목표예요.”

그러나 퍽 다부지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추자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런 기특한 다짐을 하필 권채우의 등짝을 보면서 하는 건지.

추자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걸 알아내기 위해 두 사람을 엄밀히 주시했다.

“미안해요. 내가 이연 씨 도와주지도 못하고.”

“아니에요, 권채우 씨는 원래 그랬어요!”

도무지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 말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연 씨는 대체 내 어디가 좋았던 거예요? 낮일도 못해, 밤일도 못해.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놈인데요.”

“식물이라 좋았어요.”

“예?”

아차차. 이연은 제 입을 탓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되게 과묵했단 소리였어요. 불러도 대답 안 할 때가 더 많을 정도로요. 그러면 저는 혼자서 주절거리고. 그 조용한 시간이 좋았어요.”

저건 아마도 식물인간일 때의 권채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참말 유교적이기도 하지. 거짓말 하나 기똥차게 치는 거 보소. 추자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렇게 점점 권채우 씨 옆이 편해졌지만요.”

문득 추자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일부러 거짓과 진실을 반반 섞어 가며 쓰는 건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온 건지 추자로선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듣는 사람도 헷갈리는데 말을 하는 이연이야 오죽할까.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되고, 거짓말만 하다가는 자신도 속여 넘기게 된다. 추자는 다소 심각해진 얼굴로 그녀를 힐끗거렸다.

“이젠 대답이 됐어요?”

이연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권채우는 이연을 깊고 까맣게 응시하고 있었다. 나무를 닮은 담갈색의 홍채였음에도 일순 컴컴한 구덩이가 발을 잡아채는 듯했다.

그것이 탐색하는 시선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 낌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 *

“잘까요?”

해가 지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연은 자신이 되지도 않는 동정심으로 그를 깨웠을 때부터, 잠자리를 거부할 명분이 점점 더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도무지 활로가 보이질 않았다. 이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남자에게 각방을 쓰자고 한다면 도리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권채우가 의문을 품는 순간, 이연의 거짓말은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다.

“씻고…… 올라갈게요.”

“씻겨 줄까요?”

“네?!”

이연이 파드득 놀라며 턱을 벌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저, 저, 보수적이에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서……! 어릴 적에 사회를 잘못 배워 가지고 교정이 잘 안 돼요.”

“남편한테도?”

“결혼이 그렇게 막, 다 되는 프리 패스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권채우가 순진한 표정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연 씨가 가르쳐 주세요. 제가 까먹은 게 많잖아요.”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소리랄 게 나오지 않았다. 이연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미션을 맞닥뜨리자 퓨즈가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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