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래서 안 할 끼가?”
가까운 카페에 들어온 이연은 내내 침체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홱홱 바뀌는 사람들의 욕망을 방사능처럼 쐬고 왔다. 그렇게 진이 다 빠진 와중에도 권채우를 힐끔거리는 시선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게는 호기심부터 크게는 환심을 사고 싶단 욕심까지, 여자들의 다양한 눈짓이 오고 갔다.
“카메라가 찍을지도 모른다잖아요…….”
추자는 방어적인 이연의 모습에 일단은 말을 삼켰다.
“이연 씨, 카메라가 왜요?”
그러나 권채우는 참지 않았다. 그는 이연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이연은 그 진솔한 눈빛을 보며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그냥…… 되도록 조용히 살고 싶어서요. 혹시나, 방송을 타면 시끄러워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권채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이연이 무언가를 꺼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입력했다.
“어이, 소 원장!”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그녀를 경박하게 불렀다.
이 목소리. 이연의 낯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러나 금세 속을 감추고 얼굴을 편편하게 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게 얼마 만이야! 같은 지역 살면서 너무 왕래가 없는 거 아닌가?”
D 병원의 원장, 조경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남자이자, 한때는 이연의 상사였던 사람이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그 뻔뻔한 낯짝을 보니 운도 지지리 없다 싶었다. 그가 싫은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자, 자, 인사해. 두 사람도 오랜만이지?”
조 원장은 옆에 있던 제자의 등을 툭, 앞으로 밀었다.
이연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화이도에 오기 전, 서울에서 살았던 4평짜리 작은 자취방. 무심코 그 반지하를 떠올리자 있지도 않은 폐소 공포증이 그녀를 와락 덮치는 것 같았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이번에 화이도로 불러들였거든. 두 사람, 옛날엔 사이좋았잖아. 서로 아는 척도 하고 다시 잘 지내야지.”
“…….”
“젊은 사람들이 너무 나무 껍데기만 만지고 있지 말고, 경치 좋은 데 가서 같이 커피도 좀 홀짝이고.”
조 원장은 예나 지금이나 참 눈치가 없었다. 아니, 눈치 없는 척을 해야 사는 게 편리해서 그런 걸까.
그의 제자 황조윤은 여전히 샌님 같은 얼굴로 숱 없는 눈썹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동공은 여전히 께름칙했다.
“이연아, 오랜만이다.”
“네, 선배님도 잘 지내셨어요?”
이연은 의례적인 말만 한 뒤 곧장 시선을 돌렸다.
화이도에 내려오기 전, 이연은 조경천 밑에서 5년간 실습을 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어린애는 그 바닥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계층이었다. 좋은 말로도 업무 환경에 존중이 존재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조경천이 가장 아끼는 제자 황조윤.
학부 시절부터 손꼽히는 엘리트였다는 그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이연이 만만했는지 틈만 나면 스토킹을 했다.
축축하고 날카로운 두 눈이 반지하 창문에 바짝 붙어 있는 걸 목격했을 때. 참다못한 이연이 그 사실을 병원에 밝혔을 때, 직장에서 잘린 건 그가 아니라 이연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못다 푼 회포나 푸시고. 나는―”
조경천의 시선이 추자를 향했다.
추자는 흔쾌히 일어나 이연에게 몰래 윙크를 보냈다. 그건 뭐라도 정보를 캐내 오겠다는 신호여서. 이연은 숨통을 트듯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비켜 줬을 때.
“저기, 이연아.”
황조윤이 그녀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권채우가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당기며 자리에 다시 앉혔다. 황조윤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고, 이연은 영문을 몰랐다.
“이연 씨, 나 불안해요.”
권채우가 바짝 달라붙었다. 아지랑이처럼 와 닿는 그의 체온이 뜨끈뜨끈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고만 있자 그의 팔이 답을 재촉하듯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널찍한 어깨를 접어 그녀 뒤로 숨는 행동을 했다.
불안인지, 경계인지, 이연은 알 수 없었으나 별안간 움찔 놀라는 황조윤의 얼굴을 보자 후자인 듯싶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 한 마디에 이연은 지금 남자가 내보이는 불안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이라면 기억을 잃은 권채우는 곤란함을 느낄 테니까. 그러자 말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별 무리 없이 술술 나왔다.
“제가 옛날에 일했던 병원 선배예요. 권채우 씨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긴장 풀어도 돼요.”
“……아아.”
그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허리를 조이는 팔은 왜인지 그대로였다.
오히려 이연을 더 제대로 둘러 안고 옆구리 부근에서 두 손을 맞잡기까지 했다. 리본으로 포장을 마무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완전히 포박된 꼴이 됐다.
그녀는 그런 권채우의 행동에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이연아, 옆에는 누구야?”
황조윤이 이연의 허리를 힐끔대며 다급히 물었다.
“그래요, 이연 씨. 나도 소개해 줘요.”
문득 옷 너머로 느껴지는 뜨끈한 손길에 이연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꽉 잡힌 허리가 제 것이 아닌 양 어색했다.
“……이쪽은 권채우 씨. 저랑 같이 사는 남자예요.”
결혼보다는 동거가 낫겠지? 이연은 슬쩍 구멍을 파 놓았으나 은근히 노이로제를 달고 사는 황조윤은 그 말을 태연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묵묵했던 눈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너, 결혼, 결혼했어?”
그녀가 속으로 혀를 찼다. 동시에 권채우가 귓바퀴 가까이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끄덕여야죠.”
“……!”
―끄덕여야지.
그가 재차 부추겼다. 살갗 어딘가에 소름이 돋았다. 이연의 허리를 도닥이는 손길 때문이었다.
아, 거긴 간지러운데……! 이연은 몸을 비틀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쐐기를 박듯 권채우의 목소리가 곧장 뒤따랐다.
“남편입니다.”
황조윤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재차 확인했다.
“소이연, 네가 결혼을 했다고?”
그럴 리 없다는 당연한 의심에 기분이 나빠졌다.
생각해 보면 황조윤은 늘 그랬다. 제아무리 미칠 것 같다고 속내를 토로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부류였다.
“아니, 이연아. 잠깐만. 내가 안 믿겨서 그래. 네가 무슨 결혼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너 괜찮은 거 맞아?”
황조윤의 입꼬리가 처절할 정도로 떨렸다.
이연은 선배가 화단에 몰래 침을 뱉을 때도, 어릴 적 화초를 가위로 자르고 놀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모든 순간이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특히나 저런 점을 제일 싫어했다.
황조윤은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입가를 파르르 떨며 이쪽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렸다.
어찌나 간편한 사고방식인지.
이연은 그런 입씨름에 질려 순순히 병원을 그만두었다.
“너 그런 애 아니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넌 남자랑 사귈 수 있는 애가 아니잖아……! 아니, 애초에 사람들이랑 엮이는 것도 싫어했잖아! 이연아, 내가 널 몰라?”
“…….”
“밤마다 나무 보러 가고, 주말에도 집에서 비료나 만드는 애를 누가 이해해. 그런 거 받아 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어!”
어떻게 이 선배는 사람이 변하지를 않지?
“역시 내가 네 곁에 없어서, 그래서 네가 그런 실수를…….”
황조윤이 눈을 홉뜨고 분노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연은 새삼 밀려드는 스트레스에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녀는 황조윤이 퇴근 시간만 되면 뒤를 따라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없어 집을 옮기지 못했다.
딴 길로 새는 날에는 그가 폭발하듯 발작을 했다. 침을 튀기며 무작정 제 감정을 쏟아 내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연은 역시 제 출생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출생이 그 모양이라, 업보가 쌓인 거라고.
그럼에도 나무 병원을 차리기 위해선 실습 시간을 꼭 채워야 했고, 이연은 이를 악물고 다녔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진 버텨 보자고. 그녀의 지난 삶에 비하면 이까짓 지질한 샌님은 우스울 뿐이라고.
그리고 끝내 여기까지 스스로 올라왔다.
“선배, 왜 엊그제 만난 사람처럼 호들갑이에요?”
“아니, 이연아. 우리 사이에 그깟 시간이 중요해?”
“내가 그 병원에서 나온 지가 벌써 몇 년인데요. 나는 보다시피 남……편도 있고, 병원도 차려서 잘 살고 있는데. 선배는 아직도 내가 만만한가 봐요.”
“이연아.”
그가 초조한 듯 자신의 입술을 빠르게 핥았다.
“후배 남편 앞에서 지금 진상 부리고 있잖아요.”
“저거 진짜 남편은 맞는 거야?!”
쩔쩔매던 그가 돌연 빽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가족 관계 증명서라도 떼 와! 그러기 전엔 난 못 믿어!”
“…….”
이연은 얼어붙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정곡이 제대로 찔려서.
모든 것이 탄로 날까 무섭고, 황조윤에게 또다시 겁을 먹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미약한 코웃음이 들렸다. 가까이 있는 이연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