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58)

#14.

“아무래도…… 같이 나가기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내가요, 아님 이연 씨가요?”

푹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이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라는 대로만 할게요.”

“……!”

“이연 씨가 시키는 것만, 허락한 것만 할게요.”

그게 뭐냐고, 그런 건 이상하다고. 갑자기 덜컥 손에 들어와 버린 목줄이 생생해서. 대범하지 못한 이연은 눈꺼풀을 떨었다.

거짓말쟁이의 기만과 살인자의 복종 중에서, 더 힘이 셌던 쪽은 약 오르게도 후자였다. 사람을 벙찌게 만드는 데에 권채우만한 게 없었다.

“난 핥으라면 샅샅이 핥아요.”

녹진한 볕처럼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긴 여운을 남겼다.

* * *

화이도 그랜드 호텔 회의 만찬장 로비.

“저기 봐, 가문비도 왔네.”

누군가 그렇게 수군거렸다.

이연의 밀짚모자를 보는 순간,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던 사람들의 음성이 찰나나마 뚝 그쳤다. 안 그런 척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이 자못 노골적이었다.

업계 사람들에게 <가문비 나무 병원>은 한 마디로 딱 정의 내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소위, 적인지 아군인지 애매하다는 소리다.

특히나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가 세트로 다닌다는 점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다.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현장에서 가끔은 웬 어린아이까지 매달고 다녔다.

새파랗게 젊은 나무의사는 가끔은 홀아비보다 더한 냄새를 풍기며 사적인 틈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고, 수목치료사인 계추자는 그 옛날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었다.

평균 나이 오륙십 대가 판을 치는 이 업계에서, 왕년의 브룩 실즈 계추자를 모르면 그건 간첩이었다.

한 명은 고목이고, 한 명은 시들지 않는 꽃이다.

그런 품평이 담긴 복잡다단한 시선들이 동시에 쏟아지자 이연은 속이 울렁거렸다.

‘이래서 사람 많은 곳이 싫었던 건데.’

눈동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여과 없이 투과되는 날 것의 감정을 마주할 때면 이연은 항상 체기에 시달렸다.

그렇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손부터 차갑게 식어가는데, 불쑥 뜨거운 무언가가 잡혔다.

“……!”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뿌리쳤지만 상대는 꼼짝도 안 했다. 권채우가 이연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면서요.”

이연이 순한 눈으로 노려보자, 남자는 천천히 음미하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럴 거예요. 하나 골라 봐요.”

너무 차가워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인상이 웃으며 허물어질 땐 더없이 순박해 보인다.

“눈이에요, 입이에요?”

“……네?”

“이연 씨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들이요. 저 사람들한테 없었으면 하는 게 눈인지, 입인지. 말하기 힘들면 손가락으로 짚어도 돼요.”

머리가 얼얼해졌다. 그 때문일까,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코를 찔렀던 불쾌감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저 사람들, 이연 씨 유부녀인 건 알고 있어요?”

“네? 아, 아니―”

“몰라요?”

날카롭게 되묻는 그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역시 데리고 온 게 실수였나.

권채우는 계기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기억을 찾을 것처럼, 과격한 사고를 자연스레 해냈다. 그 사실이 이연으로 하여금 어떤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그……. 권채우 씨가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으니까요. 제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주위를 훑는 그의 눈이 매서웠다. 이연은 바깥의 모든 자극들이 그에게 나쁜, 그러니까 기억의 문을 여는 트리거가 될까 무서워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원하는 게 그거예요?”

“분명 약속했어요. 내가 허락한 것만 하겠다고.”

그는 왜인지 굳어 있는 그녀의 뺨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방금 안 착했어요?”

“……네?”

“보통은 개가 물어뜯어 오면 주인이 쓰다듬어 주던데.”

대체 어느 집이 개를 그렇게 버릇없이 키워요……?

권채우는 길게 내려온 이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콧잔등을 구기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연은 적당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남자의 투명한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의 눈동자에는 불순물이 전혀 끼어 있지 않았다. 맹목은 무지와 닮아 있어서, 순수한 만큼 위험했다.

자아가 탈색된 남자는 때때로 기준선을 몰랐고, 그것이 몹시 위태롭고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이연은 그를 탓하기보다 정확하게 허용하고, 허용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안 돼요.”

그녀가 제법 단호하게 말하자 권채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압정처럼 박히는 시선에도 웬일로 무섭지가 않았다. 눈꼬리는 당겨졌으나 물결처럼 흔들리는 동공 때문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무섭게 입력하고 있었다.

이내 알았다는 듯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소로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겼다.

그 더디고 성실한 자세에 이연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왓……!’

이연은 자신의 충동에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앞차를 들이받은 초보 운전자처럼 당황하고 말았다.

“……권채우 씨 손, 너무 후끈후끈해요.”

“싫어요?”

“그, 그게 아니라 몸에서 열나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필사적으로 제 생각을 돌렸다.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걸 수도 있단 말이에요.”

누군가의 걱정이 이렇게나 단 것이었는지, 권채우는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쳐다보기 바빴다. 이연의 이목구비를 느릿하게 훑는 눈빛이 기다란 혀 같았음을 그녀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좋아요.”

“네?”

“이연 씨 볼 때마다 피 쏠리는 느낌이 미치게 좋아요.”

“……그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이연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지만 대답은 묵직했다.

“아주.”

그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는 순간, 사람들이 바글바글 깔려 있던 로비에 적막이 깔렸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권채우를 향해 돌아갔다는 것도 이연은 알았다.

185cm는 족히 넘는 큰 키. 살집은 없으나 다부진 체형. 높은 콧대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시원하게 다듬은 머리. 그린 듯한 눈썹과 차갑고 미려한 눈매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씩은 머물렀다 갔다.

때마침 회의장이 문이 열렸다.

“갔다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일행에게 눈인사를 한 뒤, 이연은 사람들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손가락이 아프도록 꽉 잡혔다가 훅 풀려났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권채우의 손을 내내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화이돔(dome) 프로젝트.

화이도에 들어설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원.

인공 폭포, 열대돔형 온실, 야외 생태 공원, 공중 정원, 열대 우림 재현 등의 다양한 볼거리는 현재 화양시가 관광 도시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는 공공사업이었다.

경쟁 입찰을 위해 모인 각 병원의 원장들은 화이돔의 3D 시뮬레이션 조감도를 보며 탐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발표 책임자의 길었던 프레젠테이션이 모두 끝나자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군가 디귿 자의 기다란 책상에 붙어 있던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그에 책임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경쟁 입찰을 공개 심사로 보겠다고 했습니다.”

회의장 안에는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국어인데도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들이었다.

“지금 우리더러…… 오디션을 보란 말입니까?”

화를 꾹 눌러 참는 목소리에 모두의 표정이 함께 언짢아졌다. 이러한 적대적인 반감에도 불구하고 책임자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문제 있습니까? 가장 뛰어난 나무의사에게 일을 맡기려는 겁니다. 화이돔에 들어올 식물들은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나무들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술과 돈으로 그 자리를 꿰차려는 사기꾼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연은 사기꾼이라는 단어에 지레 흠칫거렸다.

이 입찰에서 가장 자신만만했을 대형 D 병원의 원장까지도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역시나 전혀 듣지 못한 정보인 듯했다. 조용히 폭탄을 터트린 책임자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개 심사는 토너먼트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렇게나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일개 공무원 입장에서도 상당히 수고스럽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린 뉴딜 정책을 표방하고 있는 정부의 지침 때문에, 자연에 대한 관심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워야 했다.

“내년 식목일에 맞춰 개관하는 만큼 여러분의 토너먼트가 홍보 영상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종종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심사에 동행하게 될 예정이니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책임자는 밀려드는 피로를 쫓으며 가장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병원은 화이돔과의 10년 계약이 보장됩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

수군거림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그 뒤로 신청서니, 메일이니 하는 말이 들렸지만 이미 참석자들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국내 최대의 식물원. 가장 귀하고 값비싼 나무들. 이건 엄청난 고객이자 숫제 연금이 될 계약이었다. 항의를 하려던 사람들의 눈빛이 홱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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