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것 보라지.
소이연은 금세 경계 어린 눈빛으로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뛰는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은근히 치켜세웠다.
‘권채우’는 정말 착하고 다정했을까.
“이연 씨, 잘 지냈어요?”
“……아.”
“몸이 찌뿌둥한데 나 얼마나 잤어요?”
소이연은 그 나긋한 음성에 비로소 안심이 됐다는 듯 천천히 어깨를 내렸다.
“어제가 일주일째였어요.”
그가 뻣뻣해진 목을 돌리자 뚝, 뚝, 하고 뼈마디가 풀어졌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뭘요?”
“이연 씨가 내 아침을 쥐고 있는 거.”
전문적인 소견이니 검사니 그딴 건 모른다. 그저 함께 자 보니 해가 뜨고 지듯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뻥 뚫린 머리를 빈틈없이 채워 주는 건 그녀의 존재라고.
우습게도 이 통나무 같은 여자가 없으면 일어날 수도 없는 병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밤도 완전히 맡기고 싶은데 어떡하죠.”
소이연은 경직된 낯으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단 얼굴을 필사적으로 감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들켰는지도 모른 채 어색하게 입꼬리만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꼴이 가관이었다.
소이연은 역시 도망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그녀의 방문처럼.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그건 앞으로 차차 알아 가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겁에 질린 소이연을 순순히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미쳤다고 유일한 기억을 놔줘.
소이연은 그가 이 세상에서 지닌 최소한의 단위이자 전부였다. 그리하여 권채우는 철저히 ‘착하고 다정한’ 남편이 될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을 원한다면.
그는 몸을 한껏 낮추고 하나뿐인 아내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춰 줄 준비가 됐다. 그녀가 경계심을 낮추고 모든 것을 실토할 때까지.
소이연이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과―
권채우가 그녀를 잡아 앉히는 것.
둘 중 누가 더 능숙하게 해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이연 씨, 오늘부터 방 옮겨요.”
오밀조밀 천진하게 붙어 있는 이목구비는 탐스럽고, 애써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우스웠다.
권채우는 새카만 속내를 감추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젖은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어쩐지 눈가가 따갑더라니.
공허한 가슴속에 작은 온기가 스몄다. 남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감추었다.
* * *
“권채우 씨, 오늘은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이연은 깔끔한 슬랙스 바지에 라운드 면 티셔츠를 입은 권채우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수하게 입으니 꼭 대학생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실수할까 봐 걱정돼요?”
“그게 아니라…….”
이연은 뚱하게 나오려는 입술을 집어넣었다.
‘저런 게 신분 세탁이지!’
2년간 자르지 않아 지저분했던 머리는 이마까지 윤기 있게 떨어지는 모양으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탓에 이목구비가 한결 두드러졌다.
평범한 빛 아래, 이연을 충성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이연이 기억하는 그 살인자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불현듯 베이지 톤의 옷 위로 번들거리던 우비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 현격한 격차에 이연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진짜 혼자 가도 되는데요.”
이연은 얼굴을 가리듯 밀짚모자를 눌러 썼다.
이 모든 게 추자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환자복 말고는 입고 나갈 옷이 하나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추자가 새 옷은 물론이고 손수 머리카락까지 잘라 주면서 권채우를 확 탈바꿈해 놓았다.
그렇담 신발을 몰래 숨겨 놓을까, 하고 생각하던 이연은 곧 자신을 비웃었다. 이래서야 정말 선녀가 날개옷이라도 입을까 전전긍긍하는 나무꾼이 된 것 같아서.
가혹할지 모르나 이연은 권채우를 밖으로 내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거짓말이 이 집 너머로까지 퍼져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소심한 거짓말쟁이의 배포란 고작 한 사람에게 국한되어 있어서, 권채우를 속여 넘기는 데만 해도 수명이 바짝바짝 줄어들었다.
그저 얌전히 재활에만 몰두해 주길 바랐었는데, 뛰어나도 너무 뛰어난 그의 회복력이 문제였다.
대체 무슨 핑계를 대야 그를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원장아, 참말 그러고 가겠다고?”
그때 추자가 기막히다는 눈으로 이연의 복장을 지적했다. 흙이 잔뜩 묻은 하얀색 운동화에, 나팔나팔 통도 큰 회색 정장, 거기다 작업할 때나 쓰는 밀짚모자까지.
“우리 가문비 병원의 자존심은 없는 기가?”
“그건 여기에 있어요.”
이연이 그동안의 경력과 치료 일지를 담은 파일철을 자랑하듯 내보였다. 파리만 날리는 병원일지라도 그녀가 지금껏 맡은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죽지 않았다. 그게 이연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네가 이 모양이니까 저건 무조건 챙겨가야 하는 기다.”
추자가 뒤에 선 남자를 눈짓하며 복화술로 얘기했다.
“이제부턴 저게 우리 병원 간판이라고 생각해라. 저런 아 데리고 댕기면 ‘아― 우리 집 나무도 가문비 병원에 맡기면 저렇게 똑 따고 싶은 꽃이 피겠구나!’하고 사모님들이 생각하겠나, 안 하겠나.”
“그, 그건 성희롱이에요!”
이연의 눈썹이 강풍에 맞은 나비처럼 팔락거렸다. 그녀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져 옷 이곳저곳을 의미 없이 털기 시작했다.
오늘은 화양시와 산림청, 그리고 도시 공원 사업소가 함께 추진하는 <아름다운 화이도>에 관한 입찰 설명회가 있는 날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지역의 모든 나무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들 것이라 예상되는 자리였다.
“권채우 씨.”
이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입이 영 안 떨어지는지 바닥만 보고 있던 그녀가 잠시 후 그를 마주 보았다.
“밖은…… 위험해요.”
추자는 ‘얘가 뭔 헛소리고.’하는 표정이었고, 권채우는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특히나 권채우 씨한테는 더 그럴지도 몰라요.”
“왜요?”
외부 자극이 너무 세면 기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이연은 우물쭈물했다. 딱 봐도 머리를 굴리는 게 보여 가만히 기다려 주던 권채우는 별안간 뒷짐을 지며 툭 물었다.
“이연 씨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아니요!”
대답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빨리 나왔다. 그러자 권채우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연은 이 사소한 균열을 곧장 봉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잘생겼잖아요!”
쓸 만한 순발력인지, 형편없는 임기응변인지 당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거기 가면요. 다 아저씨들뿐이란 말이에요. 남자들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 젊고 착한 권채우 씨는 절대 모를 거예요.”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이연은 큰일을 마친 사람처럼 속으로 땀을 닦아 냈다.
“감춰 두고 싶을 만큼 내가 예뻐요?”
“……네?”
권채우는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힘껏 귓불을 잡아당기고 귓바퀴를 접어 댔는지 붉어진 살갗이 아파 보였다.
“이연 씨 눈에는 내가 정말 그래요?”
“어…….”
당황한 그녀가 말을 늘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고민하던 이연은 결국 모호한 말로 제 의사를 전달하기로 했다.
“……뭐. 권채우 씨가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건 퍽 본심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혼자만 보고 싶으니까?”
“어…….”
대답을 교묘히 피해 갈수록 어째 더 진창에 빠지는 기분이다. 이연이 도움을 청하듯 추자를 바라봤으나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소리 없이 낄낄대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연은 어떻게든 그를 납득시키고, 달래서, 최대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구슬리기로 했다.
“우, 우리 신혼이잖아요. 사고 때문에 잠깐 멈춘 걸 감안하면 우린 아직 신혼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좋은 건 혼자만 보고 싶죠…….”
권채우는 흡족한 듯 입꼬리를 당기는가 싶더니―
“그러면 이연 씨도 밖에 못 나가죠.”
“네?”
“나는 조금도 떨어지기 싫거든요.”
“…….”
“조용히 있을 테니까 화분처럼 갖고 다녀 줘요.”
그 노골적인 눈빛에 이연은 주춤하고 말았다. 순한 어조와 달리, 어딘지 집요하고 직선적인 시선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부한다면, 차라리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문고리를 틀어쥐고 함께 고립되기를 바라는 속내가 고스란히 비쳤다.
그렇다면 한 번만 더. 가증스럽지만 여기서 한발만 더 나가 보자. 이연은 여기서 밀리지 않기 위해 재차 분위기를 잡아 보았다.
“……진짜로 괜찮겠어요? 아직 환자잖아요. 권채우 씨 회복력이 남다르다는 건 알겠는데요. 기억도 없는 사람 데리고 복잡한 곳 가는 게 솔직히 내키지 않아요.”
꽉 쥐면 물크러질 것 같은 연한 두 뺨이 말을 할 때마다 사랑스럽게 흔들렸다. 남자의 시선이 한 치 더 깊어진 것도 모른 채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