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된 날이었다. 뒤죽박죽 엉킨 하루에는 오래된 상처만이 남았다.
이연은 아끼는 화분 하나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물지 않고, 비비적대지 않고, 대꾸조차 않는, 식물 특유의 정적인 태도에 위로를 받고 싶어서.
무심코 2층을 올려다본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깜짝이야……!”
이연은 스스로를 꾸짖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 식물인간이 무슨 상관이라고, 불길하게.
평온한 일주일이었다. 이연이 그토록 원했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 그러나 권채우가 잠을 잘수록, 희한하게 이연은 잠 못 드는 날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이나마 온갖 요란을 다 떨고 나니, 이 안온한 밤이 얼마나 적막하게 느껴지는지. 괜히 불어나는 잡생각에 짓눌리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2년이란 시간은, 사람과 식물이라는 기이한 동거가 나름의 균형을 맞춰 가며 공존한 시간이었다.
식물인간이 제대로 식물인간인지, 과도하게 겁에 질린 이연이 매일 밤 그를 확인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으, 아니야. 아니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이연이 인상을 찌푸리고 허브 잎에 코를 박고 있을 때였다.
어?
그녀가 예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
미약하지만 어디선가 새끼 짐승 소리가 났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목을 젖혔다. 그러자 곧장 시야에 잡히는 저 계단이 오늘따라 의심스러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 이연은 이내 도어 록이 뜯겨 휑해진 문을 망설이지 않고 열었다.
침대맡에 켜져 있는 은은한 조명.
남자는 박제된 모형이라 해도 믿겨질 만큼 미동도 없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났는데.’
이연은 권채우의 인중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단정한 숨소리가 살갗에 닿았다.
여기가 아닌가?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이 벌어지는 게 눈에 천천히 박혀 들었다. 순간 이연은 본능적으로 온몸을 굳혔다. 그러나 입술 너머로 보이는 건 이빨이 아니라, 흐느낌이었다.
“흐…….”
이연은 발목부터 얼어붙었다. 권채우가 울고 있었다. 묘한 굴곡이 마무리되는 눈꼬리에서 굵은 방울이 뚝 떨어졌다.
“—마…….”
그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수분기 없이 바짝 마른 입술이 연신 무언가를 토해 냈다.
“……가. 얼른 가…….”
그는 통증에 시달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온 얼굴을 엉망으로 구기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걸까?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인마가 악몽 꿀 게 뭐 있어?
그동안 나쁜 짓을 하고 살았다면, 악몽을 꿀 만도 하지.
다 업보예요.
그렇게 비뚜름하고 어딘가 속 시원한 마음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부러 냉담하게 쳐다본다 한들, 이연의 시선은 남자의 눈물에 꽂혀 있었다. 그는 이제 숨까지 헐떡였다.
“숨겨 줘…….”
“…….”
“—잊고……”
남자는 띄엄띄엄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지만, 그의 감정만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했다. 그는 다급해 보였고, 슬퍼 보였다.
“숨겨 줘……!”
빚은 듯 잘생긴 이목구비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이연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팔만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추자 씨, 이건 선남이 아니라 노루 같지 않아요?’
권채우의 외모를 보고 추자가 선남이라며 박수를 칠 때. 이연은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옷을 잃어버리고 슬피 우는 선녀가 아니라, 훔쳐보던 사람의 모가지를 꺾으려는 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꼭 숨 가쁘게 도망치는 사람 같지 않나.
“—살아…….”
이연은 영 내키지 않는 고민을 했다. 외면하듯 몸을 돌렸다가도 그를 힐끗거렸다. 손을 쥐었다 폈다 끙끙 앓던 그녀는 결국 흥건히 젖은 그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열 오른 피부를 만지는 순간, 정전기가 튀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며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권채우 씨는 자는 게 싫은가 봐요.”
“…….”
“나는 그쪽이 일어나는 게 싫은데.”
“……꼭 —게.”
생각해 보면, 늘 죽은 듯 잠든 얼굴이나 기억을 잃고 구멍 난 눈동자만 마주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울컥, 비탄을 뱉어 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손가락 끝에 묻어 있는 눈물을 얼른 잠옷에 문질러 닦았다.
너도 인간이긴 했구나. 그러지 않길 바랐는데.
“나는 권채우 씨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대도 죄책감은 안, 조금, 아니, 거의 안 느낄걸요.”
이연이 잔머리를 부산스럽게 치웠다.
“길거리 나무들보다도 동정심이 안 드는 걸 어째요.”
이내 이연은 알 수 없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무릎에 턱을 괸 그녀는 예전처럼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걔네는 맑고 순하기라도 하죠. 권채우 씨는 독하고 탁한 축에 속해요. 그게 얼마나 다루기 까다로운지 알아요? 식충 식물들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그리고―
“울지 마요.”
이연은 흐린 낯으로 그의 눈물을 연신 훔쳐 냈다.
“눈물은 스스로 닦아야죠.”
“…….”
“난 울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거든요.”
나무만이, 철마다 웃어 주는 꽃들만이, 이연의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었다. 친구 한 명 사귀어 보지 못한 이연에게 그들은 유일한 애정이자 약속이어서.
“오늘 나무 밑에서 흙을 맛봤는데요. 굉장히 짰어요. 원래는 그런 맛이 나면 안 되는 거거든요.”
“…….”
“권채우 씨 눈물도 그래요?”
권채우를 악몽에서 꺼내 주느냐, 내버려 두느냐는 이제 이연에게 달렸다. 그녀가 상체를 숙여 그에게 속삭였다.
“당신한테는 누가 바닷물을 부었는데요?”
남자는 대답 없이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쭉 이어진 콧대에 마구잡이로 주름이 진다. 권채우는 헐떡이는 듯한 신음을 숨처럼 계속 흘려 보냈다.
이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그쪽이 횟집 은행나무처럼 보여요.”
위험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아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이연은 하루 종일 끈덕졌던 미열과 오늘의 의미를 잊기 위해 그보다 더 독한 약을 털어 넣는 기분으로 그를 마주했다.
“생일 선물이에요.”
―사실은요, 나도 오늘이 울고 싶은 날이었거든요.
이연이 남자의 곁에 조심스레 누웠다.
* * *
날카롭게 뒤틀리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뇌리를 파고든다.
권채우는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가 쏟아지는 햇살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가를 채 가리기도 전에 무언가와 퍽, 부딪친 손등이 얼얼했다. 조용히 미간을 좁힌 그가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엔 소이연이 고롱고롱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의 팔 안쪽에 따개비처럼 딱 붙어 꼼지락대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하면서. 그 모습에 권채우는 할 말을 잊고 굳어 버렸다. 동시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괴롭고 힘겨운 꿈을 어깨에 메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를 보는 순간 감쪽같이 쓸려 나갔다.
이 ‘권채우’란 사람은 타고나길 멍청한 건지, 별거 아닌 자극 하나에도 금세 머리가 텅 비어 버린다.
소이연.
아내.
나무의사.
사고.
권채우는 눈앞의 여자를 보며 떠오르는 몇 가지를 곱씹어 보았다. 하나같이 들어서 알게 된, 특별할 것 없는 정보들. 그것이 못내 짜증스러워 그는 혀를 찼다.
그는 처음을 기억한다.
멈춰 있던 세포가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나 감각을 일깨우던 순간. 그 첫 번째 기억은 웬 여자였다.
그녀의 등을 짓누르고 목덜미의 냄새를 맡았을 때. 젖은 풀과 흙이 뒤엉긴 그 묘한 비린내를 잊을 수 없었다.
기억이 싹 도려내진 순간은 생각보다 무겁고 메슥거렸다.
가족, 친구, 추억, 그 모든 것들이 푹 꺼진 자리에는 단 한 사람만이 아른거렸다. 저것이 열쇠라고.
그건 본능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결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텅 빈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게 소이연의 얼굴뿐이어서, 그는 한입에 삼키듯 그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소이연은 이상했다.
‘……기억에도 없는 아내가 갑자기 생긴 거잖아요. 권채우 씨 입장에선 이게 얼마나 당황스럽고 불편한 일일지 걱정이 돼서…….’
아니, 나는 한눈에 알겠던데. 네가 왜 아내인지. 아내일 수밖에 없는지.
눈을 떼는 시간조차 아깝더라고.
‘권, 권채우 씨. 권채우 씨.’
그런데, 아내라고 주장하면서도 벌벌 떨던 몸.
공포에 잠식된 눈.
반지 자국 하나 없는 매끈한 넷째 손가락.
그 흔한 결혼 사진조차 없던 집구석.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을 반가워하는 기색 또한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얄궂게도 두려움이 전부였다. 종종 그녀가 흠칫거릴 때에는 그 조막만 한 턱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 세상의 전부가 넌데.
왜 날 무서워해? 왜 안 웃어줘?
이렇게 어려워할 거면서 대체 병 수발은 왜 들고 왜 기다렸어.
“일어났어요?”
마침 소이연이 눈을 비비며 아침 인사를 해 왔다.
그가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