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문도 잘 잠그고요.”
그녀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내내 목이 졸린 사람처럼 애원하던 행동과는 정반대의 말이어서. 이연은 묘한 께름칙함에 반사적으로 팔뚝을 긁었다.
—뻐거덕.
드디어 권채우가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는 옅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딱딱하게 올라가 있던 어깨를 비로소 쭉 내려뜨렸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2층엔 올라오지 말아요.”
“……네?”
“나도 오랜만에 아랫부분 껍질 좀 밀어 볼까 해서요.”
이연의 얼굴에 물음표가 들어찼다. 밖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가 웃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이연 씨, 잘 지내고 있어요.”
미묘한 밤 인사는 꼭 당분간의 작별을 알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날 밤. 이연은 밤새 뒤척였고, 권채우는 일주일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 * *
끔찍한 꿈을 꿨다.
이연은 잠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다. 밤새 얼마나 시달렸는지 입술은 허옇게 뜨고 눈동자는 너덜너덜했다.
멍한 상태로 허공만 보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오늘이 며칠인지를 떠올린 뒤였다.
‘아, 그날이구나…….’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기력이 쭉 빠진다.
“소 원장아!”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훨씬 넘어 있었다.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자 시야가 휘청거렸다.
“니 열나는 거 아이가.”
그때 방으로 들어온 추자가 그녀를 부축하며 이마를 짚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타박하는 눈빛이 퍽 우려스럽다.
“우째 그냥 넘어가는 없이 없노.”
“…….”
“오늘은 쉬아라. 일도 별로 없는데.”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이연이 곧장 추자를 밀어내며 바로 섰다. 그녀는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이럴 때일수록 더 해야죠. 오늘은 잠복할 거예요.”
“쓰읍―! 쪽팔리게 그거 하지 말라고 했다!”
추자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위협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바엔 2층에 있는 네 식물만 쳐다보고 있으라!”
추자가 화장실로 향하는 이연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이연은 멈칫했지만 이내 수도꼭지를 세게 틀었다.
거울 속에는 웬 가녀린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빗질을 하지 않아 엉킨 머리로 눈을 가리고 다니던 아이는 이제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잘못 태어난 아이예요.’
꿈속의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또 썼다.
‘나는 잘못 태어난 아이예요.’
‘나는 잘못 태어난 아이예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했다. 그렇게 쌓인 A4용지 종이가 어린 이연의 키를 훌쩍 넘어섰다. 열일곱에 집을 나오기까지 틈만 나면 써야 했던 이연의 반성문이었다.
“근데 소 원장아, 내 까먹고 못 물어본 게 있는데. 우리 식물 사위는 저렇게 디비 자기만 해서 우예 쉬를 싸나.”
이연은 까슬까슬한 입술로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평소와 똑같은 하루였다. 늘 그랬듯 조용히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일 따위 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추자가 처음 2층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는 부동산 중개인처럼 꼼꼼히 집안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보다 깔끔한 구조와 고급스러운 가구들에 속으로 펜을 들었다. ‘돈 많음’에 체크.
“화장실을 가긴 한다고 들었어요.”
“자는 상태로?”
“네.”
“하이고, 별스럽기도 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척비척 움직이는 권채우를 봤을 때, 이연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안 그래도 키가 큰 사람인데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으니. 별생각 없이 그를 보러 갔다가 까무러치게 놀란 것이다.
“머슴아 주제에 사골 국물 맹키로 피부 좋은 거 봐라.”
추자가 손을 뻗으려 하자 이연이 퍼뜩 그녀의 팔을 잡았다.
“……깰지도 몰라요.”
“내가 만진다고 깨는 거면, 진즉 흔들어 봤다.”
“그래도요.”
이연이 시선을 피하며 침대에서 한 발 물러섰다.
신경이 타들어 갈 것 같았던 며칠간의 소란이 전부 꿈인 양 흐릿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았다는 게 믿기지 않도록 좋아서. 이연은 오랜만에 지어 보는 평온한 낯으로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만. 부디 이대로만 자다오.
권채우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진 사이,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발을 들여놓게 된 추자는 집을 한 바탕 뒤집었다. 분명 존재는 하나 주인을 잃은 것처럼 꼭 건조해 보여야 할 칫솔, 컵, 숟가락, 슬리퍼, 그리고 손때가 묻은 남자의 개인 물품들을 튀지 않게 흩뿌려놓은 것이다. 베테랑인 그녀의 솜씨는 완벽했고, 또 감쪽같았다. 순식간에 그럴듯한 환경이 세팅된 건 전부 추자의 관록 덕분이었다.
“참, 신문 봤나. 전에 우리가 맡았던 그 초등학교 있제? 거기 교장 큰일 났다 카데. 학교 공사를 개판으로 해서 운동장이 쑥대밭이 됐다고 마 동네방네 소문이…….”
추자가 말을 뚝 그치고 별안간 이연을 보았다.
“설마 아니제.”
이연이 볼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추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신문사에 꼰지른 게 니 짓이가!”
“뭐…….”
“이 돌아 삔 가스나야, 니 장사 안 할 끼가! 우린 고객 관리로 벌어먹고 사는 업체라 안 캤나!”
이연은 대답하지 않고 2층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추자의 핀잔이 꽂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상도덕도 없는 가스나야아―!”
이연은 오히려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잡아 눌렀다.
나무를 관상용으로만 쓰는 주제에, 밥도 안 먹이고 학대하는 게 어디 그 교장뿐이겠는가.
인간보다 나무를 중시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니 한 사람쯤은 반대로 가도 괜찮잖아.
‘그럼 이연 씨, 잘 지내고 있어요.’
문득 한기를 느낀 이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 일주일. 권채우는 어쩌면 함께 자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 인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 * *
“미쳤네, 미쳤어……!”
나무 밑동의 흙을 손으로 찍어 먹어 본 이연이 이를 악물었다. 밀짚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벗는 얼굴이 드물게 험상궂었다. 그녀는 곧장 횟집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어서 오세…… 아, 나가! 나가!”
웃으며 손님을 반기려던 중년의 사장이 이연을 보고는 정색했다.
“또 죽이려구요?”
“난 아무것도 모른다, 몰라.”
사장이 거칠게 이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문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문틀을 굳게 다잡은 그녀도 쉽게 떨어져 주진 않았다.
“저번엔 링거에 몰래 제초제 넣어서 죽이더니―”
“오지랖 부릴 생각이면 나도 공평하게 경찰 부를 거다.”
“이번엔 바닷물 부으셨네요?”
그녀가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직도 혀끝에 짠맛이 맴돌았다.
손님들은 알 수 없는 실랑이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사장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재수 없고 귀찮은 년이 남의 장사를 다 망치고 있다.
“안 그래도 자꾸 저 은행나무가 메마르는 게 이상하다 싶었거든요.”
“글쎄, 난 그쪽 부른 적 없다니까. 왜 쓸데없이 남 일에 참견이야!”
그가 억센 힘으로 기어이 이연을 밖으로 밀어냈다.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죽일 듯이 째려봤다. 그러나 초조한 듯 떨리는 동공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읽혔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면서 그렇게 지랄 맞게 구니까 당신 병원이 망하는 거야. 알고는 있냐?”
“알아요.”
“알면 제발 눈치 좀 챙겨!”
그가 퉤엣, 침을 뱉으며 짝다리를 짚었다.
가문비 나무 병원의 소이연 원장을 모르는 사람은 이 마을에 아무도 없었다. 최근, 학교 공사를 개판으로 했다는 모 초등학교 교장의 기사가 실리면서 그녀의 악명은 더욱더 높아졌다. 순진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행동에 당한 주민들이 한 트럭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 나무의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릴 줄 몰랐다. 사적인 대화는 일절 나누지도 않으면서 나무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조용히 꺼지자, 엉?”
“…….”
“내 나무를 어떻게 할 권리는 나한테 있고, 당신 병원은 죽어도 이용 안 할 거니까. 제발 민폐 좀 그만 끼치고 가라, 가! 너 이거 월권이야!”
“그럼 누가 해요?”
“뭐?”
“저 은행나무는 누가 도와줘요?”
이연이 팔을 뻗어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횟집 간판 안 보여서 없애려고 한 거잖아요.”
“……!”
짜증이 역력했던 사장의 얼굴이 일순 어색하게 굳었다.
“매일 아침 바닷물 뿌리고, 나무껍질 벗겨서 폐유 발라 죽이고, 수관에 살충제 주입하고, 기계톱으로 베고. 제가 이 근처에서 본 현장만 해도 이 정도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내가 신경 끄면 걔들은 어떻게 되는데요.”
“…….”
“사람들 눈에는 그냥 전봇대랑 다를 바 없어 보여도요. 저거 생명이에요. 인간들이나 살아도 되는 애, 죽여도 되는 애 구분하지. 나무는 아니에요. 뿌리를 내렸으면 그걸로도 이유는 차고 넘쳐요.”
이연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불쑥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장님이 뭔데 죽여요.”
신물이 넘어왔다. 연필을 쥐고 달달 떨던 작은 손과 키만큼 쌓여 가던 반성문이 떠올라서.
“쓰다 버려지는 것도 쟤들은 억울하단 말이에요.”
사장은 기껏해야 어린애 같은 고집에 화가 났지만, 붉게 물든 여자의 눈을 보자 왜인지 목구멍이 콱 막혔다.
“무서운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
“사장님이 죽어도 나무들은 계속 살아가요.”
―세기를 넘어서 계속 살아갈 거예요. 이연은 시야가 뿌예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