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모님은 이연 씨한테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권채우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는 거네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추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모님, 죄송하지만 결혼 전에 드렸던 약속은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안다. 드러누워 있었을 때부터 알았다.”
추자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이연 씨는 제가 다정하고, 예의도 발랐다는데.”
“하모, 그랬지.”
추자는 이연과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 음흉한 미소 속엔 ‘너 치고는 잘도 구워삶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이연은 얼굴이 타오를 것 같았다.
“이연 씨가 기억하는 남편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안다, 이해하고말고.”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의사 말로는, 본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남아 있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이연이 움찔하는 모습이 추자의 자리에선 너무나 잘 보였다.
“이연 씨, 그럼 저는 언제부터 출근할까요.”
“일……하시게요?”
이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도리어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동안 혼자만 고생한 게 억울하지도 않아요?”
“아니 그래도……. 충분히 쉬셔도 되는데요! 권채우 씨는 회복에만 신경 쓸 때잖아요. 그래야 제 맘도 편하구…….”
그녀는 땀이 난 손바닥으로 괜스레 바지 면을 문질렀다.
“채우.”
“네?”
별안간 그가 소파 등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축 기댔다.
“채우요.”
“…….”
“채우라고 불러 줘요.”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채근하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낮다. 고개를 숙이고 위를 응시하는 바람에 돌연 삼백안이 된 눈이 섬뜩했다.
이연은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양 바짝 굳어 버렸다. 권채우는 하얗게 질리는 여자의 안색에 돌연 팔뚝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치켜세운 눈썹 끝은 감춰지지 않고 확연히 보였다.
“이제는 내가 남자로 안 보여요?”
왜인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도 없었다. 찰나에 느껴진 분위기가 산속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를 연상케 해서.
그가 고개를 들고 제 관자놀이를 검지로 꾸욱 눌렀다.
“난 머릿속에 딱 한 가지밖에 안 들어 있는 모자란 놈이에요.”
“…….”
“당신 얼굴.”
이연은 푹신했던 소파가 순간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이연 씨는 이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겠죠.”
“…….”
“그거, 미쳐요.”
그가 무언가를 꾹 눌러 참듯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내가 가진 전부가, 내가 모르는 여자 얼굴이라니. 그런데 그것마저 멀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연은 인상을 쓰며 픽 웃어 버리는 권채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데. 그가 불쌍해 보였다.
“나는 나쁜 남편이 되고 싶겠죠.”
그가 팔을 뻗어 이연의 볼을 스윽 문질렀다. 심장이 뛰었다. 무서워서, 그의 손끝이 차가워서, 줄이나 주사기를 들고 있진 않은지 겁이 나서.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 댔다.
추자는 경직된 이연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중얼거렸다.
“보통이 아닌 기 들어왔네.”
추자는 은근슬쩍 핸드폰을 꺼내며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았다.
‘일단은 권채우가 누군지 정확히 알아봐야 쓰것다.’
* * *
그날 밤.
이연은 업무를 핑계로 홀로 1층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꼭 그와 잠들지 않으리라.
사실은 2층 문을 닫고 싶었지만,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기도 전에 도어 록이 부서졌다. 십중팔구 권채우의 짓이었다.
그때 들여다본 방 안에서 남자는 푸시 업을 하고 있었다. 상체는 땀으로 미끌거렸고, 하체는 느슨한 바지만 툭 걸친 상태였다. 그는 바닥 가까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동작을 기계처럼 반복하면서도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판판한 등, 움푹 들어간 허리 중앙선, 긴장된 힘줄, 일정하게 유지되는 속도. 그의 회복세는 위협적일 만큼 빨랐다. 무력하게 누워만 있던 식물인간을 떠올려 본다면, 이 괴리감은 불쾌할 정도였다.
‘식물은 편해도 짐승은 껄끄러워.’
뎅, 뎅, 뎅.
“……!”
잡생각을 가르는 시계 종이 울렸다.
퍼뜩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 이연은 문을 잠그는 순간에도 숨이 차고 머릿골이 당겼다. 해가 진 이후부터 어떻게 하면 오늘 밤을 무사히 피할 수 있을지, 그것만을 계속 궁리한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똑똑.
“……!”
“이연 씨.”
페인트가 벗겨진 방문 아래로 남자의 발그림자가 비쳤다. 꽉 다물리지 않고 살짝 떠 있는 오래된 문이 이토록 신경 쓰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연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돌아가요……!’
그녀는 빚쟁이를 내쫓듯 되뇌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그러한 자비가 내려올 리 없다고.
덜컹, 덜컹, 문고리가 숫제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흔들렸다. 이연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이연 씨, 문 열어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살이 떨렸다. 홀로 덩그러니 놓인 남자의 눈동자를 보면 그런 감상이 조금은 덜했을 텐데. 방독면을 쓴 것처럼 눅눅한 목소리는 이연을 충분히 겁먹게 했다.
“…….”
“…….”
침묵이 바늘처럼 날카롭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삐걱, 하고 나무 바닥에서 마찰음이 났다.
이연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재깍 치워 버렸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아내라고 주장한 사람이 남편을 피하고 있는 이 상황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지만 시계 종이 울린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온 이연이 문에 귀를 댄 순간이었다.
“내가 간 줄 알았어요?”
“……!”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는데 그가 이어 말했다.
“어딜 가요. 가까이 와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문틈으로 그의 발그림자가 다시 비쳤다. 아마 권채우도 멀어지는 그녀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터였다.
그럼 아까 그 삐거덕 소리는 뭐야…….
이연은 요동치는 심장을 꾹 눌러 진정시켰다.
“문에 바짝 붙어 봐요. 이연 씨 냄새가 안 나잖아요.”
“무, 무슨…….”
“몰랐어요? 이연 씨한테 젖은 풀 냄새 나는 거.”
—쿵!
그때 문 전체가 진동했다. 이연은 철장을 들이받는 무언가를 피하듯 뒤로 물러났다. 찰나의 진동 때문인지, 미처 갈아 끼우지 못한 전구가 깜빡,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왜인지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이연 씨가 없으면 난 내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권채우는 문짝에 이마를 박은 채 읊조렸다.
“팔다리가 붙어 있어도 실감이 잘 안 나요, 사람이긴 한 건지.”
그르륵, 극극. 손톱으로 문을 긁는 소리가 그녀의 살갗을 스친다. 왜 권채우를 피해 달아난 침실이 독 안처럼 느껴지는지. 남자는 이곳으로 발을 들이려는 귀신 같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연을 현혹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꿈이 아니라고—”
그가 한 번 더 이마를 찧었다.
“내가 미치지 않은 거라고 말해 줘요.”
“…….”
“옛날 얘기라도 좋아요. 한심한 얘기라도 좋으니까, 내가 존재했다는 확신을 줘요.”
—쿵!
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손대 보지 않아도 뜨거운 김이 끓는 듯했다.
이연은 그가 충분히 이 허름한 문짝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음을 알았지만, 권채우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저 문을 긁고, 부딪치며, 앓기만 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전율이 척추를 타고 찌르르 흘렀다.
착하고, 점잖고, 다정하고…….
권채우의 극악무도한 본성을 누르기 위해 마구 내뱉었던 헛소리들이 통했다는 증거가 눈앞에 있다.
텅 빈 남자는 오로지 이연에 의해서만 자신의 모양을 잡아 갔다.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권채우 씨.”
그녀의 목소리에 금속성의 문고리가 재차 덜커덩거린다. 이연은 두 손을 맞잡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나 때 밀려고 홀딱 벗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의를 지키는 게 어떠냐는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디까지 자신의 말을 따를 준비가 됐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샴푸가 흘러서 눈도 따갑구요.”
“…….”
“옛날 얘기를 하기엔 상황이 좀 나쁜 것 같지 않아요?”
순간 문밖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태풍이 닥친 것처럼 거칠게 흔들어 댈 땐 언제고. 그는 감정을 싹 거두어들인 채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눈 깜짝할 새의 변화였다.
이윽고 “예.”하고 묵직한 저음이 울렸다. 살짝 늦은 감이 있는 대답이었다.
“잘 자요, 일단은.”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어딘지 석연찮다. 이연은 차가워진 손끝을 문지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