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58)

#9.

그녀는 곧장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자 우습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2년간 끙끙 앓던 것이 녹는다. 어리석음이 드디어 제 잘못을 알고 무릎을 꿇는다.

—주말에 웬 전화질이고?

“추자 씨이이……! 흐으으으……!”

—뭐꼬? 니 술 마셨나?

“어떡해요……! 식물인간이 우리 병원으로 출근할지도 몰라요!”

‘쟈가 양귀비를 말려서 마약을 했나.’

고해성사를 하듯 길게 이어진 이연의 이야기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었다.

그렇게 메이크업도 하다 말고 헐레벌떡 달려온 추자인데. 그녀가 돌연 멀찍이 떨어진다.

충혈된 눈, 불그스름해진 콧등, 붕어처럼 부은 입술. 티슈를 테이블 위에 한가득 쌓아 놓고 코를 팽팽 푸는, 배울 점 하나 없는 이연의 몰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생매장을 목격했는데, 살인자가 쫓아와서, 사고가 났고, 식물인간이 됐다? 그걸 덥석 받아 왔고?

대출 왕창 당겨서 증축한 게 아니라, 애물단지를 짊어진 거다?

추자는 혹시나 이연이 숨겨 놓은 술병이 없는지 소파 밑부터 확인했다.

“추자 씨이이…….”

그러나 소파 밑은 깨끗했고, 보기 드문 이연의 눈물 바람에 추자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도 울지 않던 아이였는데. 이래서야 정말 나쁜 일에 휘말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범죄자를 봤으면 경찰에 신고나 할 것이지, 이기 무슨 일이고!”

“어쩔 수 없었어요.”

“허이고야. 금마가 유기견도 아이고, 내 살다 살다 식물인간 데려왔다는 말은 첨 들어 봤다! 돈도 없는 가스나가 뒷산에 영양제 뿌리면서 호구 짓 할 때부터 알아 봤제. 그런데 이젠 하다 하다 식물인간이고! 참말 훌륭하네!”

추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빈정거렸다.

“대체 이 중한 걸 와 지금 말하는데!”

“그게…….”

이연이 우물쭈물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추자는 속이 쓰렸다.

소이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냈다 한들 쉽게 마음을 터놓지 않는다. 오로지 식물들만이 그 완고한 벽을 비집고 들어갔다.

평생을 고독하게 자란 소녀는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보통 그런 아이들은 뿌리가 약하기 마련이다.

그 점을 상기하자 추자의 화는 기다렸다는 듯 푸시시 식었다. 소파에 주저앉은 그녀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니가 참말로 총각을 숨겨 놓고 있었단 말이제.”

“총각이 아니라, 식물인간이요…….”

이연이 휴지로 눈가를 찔끔찔끔 닦았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추자 씨이이…….”

그녀가 다시 울먹울먹하자 추자는 괜히 무릎을 문질렀다.

“공치사는 됐다, 마.”

“……일단, 제가 그 사람 아내라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뭐?!”

한쪽밖에 없는 아이라인이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이연은 흠칫 놀랐다.

“이기 미쳤네! 돌아삣네!”

추자가 억센 손으로 이연의 등짝을 짝짝 후려쳤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연이 테이블을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기억도 없는 사람이에요! 일어나자마자 절 찍어 누르는데 어떻게든 모면해야지 어째요!”

“세상에 끝까지 감출 수 있는 비밀이 어딨나!”

“진짜 추자 씨가 몰라서 그래요. 그 남잔요, 왼쪽에서 사람을 파묻고, 오른쪽엔 또 다른 피투성이를 쟁여 놨던 놈이에요! 옷깃만 스쳐도 인륜을 부서뜨리는 게 딱 그런 놈들이라구요!”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 이연이 숨을 헐떡였다.

“그런 엄한 게 깨어났는데 가만히 끌려가기만 해요?”

“아이고, 이것아.”

“뭘 모를 때 고삐를 달아 둬야 했어요. 특히 그런 짐승한테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잠시 움직임을 멈춘 이연은 완고해 보였다. 젖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난 그냥, 내 일상을 하루빨리 되찾고 싶을 뿐이에요.”

그건 어리벙벙하게 속아 식물인간을 받아 온 멍청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려고, 살아가려고,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얇은 현처럼 떨렸다. 추자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겁이 많을지언정 쉽게 포기하는 소이연이 아니다. 조용하지만 길게 뻗고자 했다. 그러니 고작 여기서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뺏길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나중에 금마가 다 알아 뿔면 우짤라고……!”

“진범만 잡으면 되는 거잖아요.”

추자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말이어서.

“그러면 다 제자리로 돌아가요.”

처녀귀신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중얼거리는 폼이 왜인지 음습해 보였다.

이연이 집착하고 있는 생각은 그녀가 휘두른 톱, 그래서 남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지도 모를 그 행동 하나에 전부 쏠려 있었다.

모든 건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거라고.

정당방위가 통하지 않는 상대측의 권력. 이연은 이미 그것에 거하게 얻어맞은지라 더 이상은 어떠한 약점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권채우를 데리고 있는 동안 잠자코 지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요량이었다. 남녀 둘이 한집에 살고 있는 이 상황을 그가 의심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권채우를 입맛대로 다루려면 부부 행세가 최선이었다.

하지만 추자의 눈에는 그게 틀려도 완전히 틀려 보였다.

‘그건 답이 될 수 없다.’

이연은 남녀 관계가 얼마나 급격히 발화되고 틀어지는지, 그리하여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지는지를 모른다. 중요한 건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남녀 사이로 묶여 버린 이 상황이었음을.

“내는 모른다. 안 끼어들 끼다.”

“충분해요. 그냥 유부녀로만 대해주세요.”

하이고, 지 팔자를 아주 잭극적으로 꼬는구만. 추자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맹탕인 이연은 천지 구분도 못하는 것 같지만, 남편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 상복을 세 번이나 입었던 추자에겐 덜그럭덜그럭 무언가가 자꾸 걸렸다.

그 머슴아가 이연의 말대로 진짜 살인자일까, 정말 기억을 잃었을까, 하는 문제는 고사하고.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그 남자의 처지였다.

재력에 권력까지 있어 보인다는 집안의 아들이 왜 서울의 큰 병원들을 놔두고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왜 부모도 아닌 형이 나서는지.

“이연 씨?”

그때 추자의 등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탄력을 잃고 걸걸해진 영감들의 음성과는 차원이 다른 울림이었다. 색이 진하고 두꺼운 나무통처럼 절로 귀 기울이게 만드는 공명이 사람의 성대에서 났다. 누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듯 추자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웬 다단계에 넘어가 싸구려 옥장판이나 받아 온 줄 알았더니, 이게 웬걸.

옥모화용의 청년이 2층 난간을 붙잡고 내려오고 있었다.

이연이 생존 본능에 충실했다면, 추자는 또 다른 본능을 이기지 못했다.

“……사위 왔나.”

* * *

“나무 병원은 처음 들어 봐요.”

권채우는 집과 사무실의 경계가 없는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연은 제 소파에 남자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익숙지 않아 엉덩이를 들썩였고, 추자는 면접관처럼 신중히 권채우를 살폈다.

그녀에겐 개똥밭에서 구르고 구른 수십 년 치의 데이터가 있었다. 그 옛날, 좋아하던 스님 오라버니를 사사해 관상학을 익힌 이래로 남자 보는 눈 만큼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점마가 사람을 생매장하고 있었다고? 선남이 옷을 잃어버리고 산속을 헤맨 게 아이고?

‘말도 못 하게 잘생겼네.’

차갑지만 단정한 인상에선 그 어떤 결핍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게 쭉 뻗어 올라간 눈매는 냉혹하기보다 그윽했고, 눈동자는 피어나는 불처럼 총명했다. 게다가 쇠 기운을 닮은 귀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양손에 금과 도끼를 쥐고 태어난 상이었다.

‘그런 주제에 일개 살인자밖에 못 됐다면 오히려 실망이제.’

최소한 수많은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에는 있어야 수지가 맞는다. 도끼를 쥐고 그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 뭐였는지는 현재로서 알 길이 없다만.

“장모님.”

그때 시선을 조금 내리깐 권채우가 나직이 말했다. 혀에 잘 붙지 않는 단어가 생소한지 입매는 경직돼 있었다.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이연 씨 옆에 앉고 싶은데.”

추자의 화려한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웬만해선 당황하는 일이 없던 그녀인데 어찌된 일인지 반응할 템포를 놓쳤다. 이연도 내내 가만두지 못했던 몸을 딱 굳혔다.

두 여자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권채우는 재촉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꼭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라는 무언의 압박 같아서, 이연은 후다닥 반대편 소파로 이동했다. 그제야 남자의 눈에 묘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저기, 권채우 씨. 여기 계신 추자 씨는 사실 엄마가 아니고, 병원 직원이에요. 저랑은 십오 년쯤 알고 지낸 사이라, 권채우 씨를 친……근하게 생각해서 사위라고 부른 거예요.”

“왜 나를 성까지 붙여 불러요?”

“네?”

“이연 씨도 날 친근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

맘대로 되지 않는 대화에 이연이 헤매는 사이, 추자는 소리 없이 이마를 짚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 도화지처럼 새하얀 얼굴은 오로지 이연에게만 집중돼 있었다. 그리고 추자는 그것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