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58)

#8.

“아아, 내가 꼬신 거구나.”

“……!”

“얌전한 이연 씨를 내가 사탕발림해서 침대까지 데려갔어. 그렇죠?”

“…….”

“파렴치한 새끼였네요.”

말과 달리 그는 즐겁단 듯 웃고 있었다. 새하얗게 지워진 기억을 마치 남 일처럼 내려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점점 그의 화술에 말려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 없이 휘말리다 보면 배수구에 머리채가 끼어 죽는 건 자신이 될 터였다.

순간 이연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익숙한 불안을 느꼈다. 부부라는 이유로 한 이불을 덮기까지 했으니, 다음엔 섹스가 되겠지.

그런 확신이 들자 등허리에 오한이 들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우리는 속궁합이 잘 안 맞았거든요.”

그가 천천히 웃음기를 지우기 시작했다.

“잘 못했어요.”

“……섹스를?”

“네, 네. 그거를.”

“누가요?”

“네?”

“누가 섹스를 못했는데요.”

시선을 피하고 싶어도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눈빛이 끈질기다.

“……아무래도 둘 다 어설펐죠?”

그러자 그가 하, 하고 조소 어린 웃음을 흘렸다. 이목구비 전체가 조금씩 미묘하게 일그러지자 금방 사나운 얼굴이 되었다.

“기억이 날아간 것보다 이게 더 충격인데.”

권채우는 왜인지 화기가 뭉근히 끓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백치처럼 보일 땐 언제고, 지금은 무언가를 잘 아는 사람처럼 명확해 보였다. 그는 한쪽 얼굴을 세수하듯 문지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우리가 섹스리스였다고.”

“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문제였던 건데요.”

나긋했던 그의 목소리에 강약이 실린다.

“어…….”

이연은 미칠 것 같았다. 그가 하는 질문은 점점 그녀의 수준을 아득히 넘고 있었다. 하지만 서른두 살이나 먹은 성인이 여기서 쫄 수는 없는 법이다.

“일단, 우리는요……. 서로에게 적합한 사이즈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거든요……. 전 아직도 오르가슴이 뭔지 모르겠어요.”

“…….”

“그리고 권채우 씨도 성욕이 별로 없다고 했어요. 다행히도 저는 그런 점이 오히려 좋았어요. 속궁합이 아니라, 언뜻언뜻 느껴지는 수도승적인 모습에 이 남자다 싶었던 거니까.”

이연은 그렇게 결정타를 날렸다.

“……수도승이요? 내가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파삭 구겼다. 우습게도 그 화살은 자기 자신, 아니,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의 권채우를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 플라토닉하게 지냈어요.”

이연은 눈치를 살살 보며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

권채우는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대로 곯아떨어진 건 아닌지 이연이 확인을 하려는데 그가 문득 읊조렸다.

“떡정도 안 든 남자 병수발을 2년이나 했다, 라.”

“…….”

“대체 소이연 씨는 날 얼마나 사랑했던 거예요.”

그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해가 한 겹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이연은 상한 우유를 먹은 것처럼 속이 불편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오해는 단단할수록 좋다. 권채우를 눌러놓으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얼른 자요.”

이연은 밤 인사를 핑계로 말을 돌렸다. 이 남자와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그를 묶기 위해 던진 줄이 오히려 제 손목을 휘감는 기분이어서.

“……알았어요. 이연 씨도 잘 자요.”

그도 더는 과거를 알고 싶지 않은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연은 나무 신께 기도했다.

‘부디 이 남자가 잠에 푹 들게 해주세요. 기왕이면 일주일 넘게 잠만 잤으면 좋겠어요. 가능하잖아요, 그쵸? 그런 증후군이랬잖아요. 제발요!’

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때, 권채우가 전혀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재차 속삭여 왔다.

“그런데 어설프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삽입이 싱거웠어요, 아니면 애무가 미지근했어요? 설마 내가 동정이었던 건 아니죠.”

집요하리만치 끈덕진 질문에 얼이 빠진 것도 잠시. 이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유난히 빨리 끝내는 것 같았어요.”

그는 충격에 빠진 듯 한동안 말이 없다, 이내 자조적인 한숨과 함께 “병신 새끼.”라고 짓씹었다. 그것을 끝으로 조금씩 숨소리가 고요해졌다.

곧장 방을 나서려던 이연은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지 못해 한참을 끙끙거렸다. 긴장으로 경직돼 있던 몸의 힘을 찰나에 푼 순간, 그녀도 떠밀리듯 의식이 끊기고 말았다.

닭은 왜 죽였어요?

끝내 묻지 못한 그 한 마디를 가슴에 묻고서.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연은—

“아악!”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잘 잤어요?”

권채우가 한쪽 팔로 머리를 지탱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증후군이라며!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씩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남자는 아주 멀쩡하게 아침 햇살을 맞으며 이연을 반겼다.

햇빛을 담뿍 담은 아마빛의 홍채가 유난히 불그스름했다.

* * *

방 한구석에 선 이연은 태연스레 검사를 받고 있는 남자를 곁눈질하기 바빴다. 팔뚝을 쓰다듬고, 소매를 잡아당기고, 손톱을 깨물어도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래!

그녀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이 엇박자로 쉬지 않고 뛰었다. 과한 맥박 때문인지 온몸이 북처럼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너무 이릅니다. 패턴이 생기려면 좀 더 다양한 수면 데이터가 필요해요. 환자분은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긴 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오늘, 권채우가 ‘평범하게’ 일어났다.

처음엔 3일, 그다음이 5일, 마지막으로 12일 만에 깨어났다는 남자가 갑자기 하루 만에 정상적으로 눈을 뜬 것이다.

어떻게든 다시 심연 아래로 그를 재우고 싶었던 이연으로선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환자분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심리적인 문제일 수 있어요. 특히 집과 병원은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뭔가가 건드려진 걸 수도 있고요. 수면 패턴을 규정하기 위해선 앞으로 그 요소들을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의사가 말을 하는 동안 권채우는 이연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하나 짐작이 가는 게 있긴 한데.”

그가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태블릿에 뭔가를 바삐 적고 있던 의사는 환자의 혼잣말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뭔가요?”

“어젯밤엔 아내랑 같이 잤어요.”

“…….”

순간, 방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눈을 두어 번 느릿하게 깜빡인 의사는 이연과 권채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금세 업무용으로 돌아온 표정은 닳고 닳은 공무원을 보는 듯했다.

“성관계를 했다는 뜻인가요?”

“아니요!”

이연은 재빨리 부정했고, 권채우는 왜인지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럼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죠. 당분간은 두 분이 같이 자면서 그 추이를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 * *

물리치료를 위해 권채우가 병원으로 간 사이, 이연은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녀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의미 없이 흘러나오는 뉴스만 보고 있었다.

『보이스 피싱이 점점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연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했다.

권채우의 상태가 좋아진다면 지금처럼 그를 숨길 수 없다. 그가 1층으로 내려오는 순간, 추자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추자가 알게 된다면…….

“―이 계약서가 누설될 시, 공범이 또 있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이연을 완벽한 가해자로 만들겠다던 협박이 추자에게까지 뻗칠지 모른다.

권채우를 훈련시켜 추자를 속여 넘기느냐.

아니면 추자에게 죄다 털어놓느냐.

그 기로에서.

까랑까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이연의 귓속을 다시 한번 파고들었다.

『—이 녹취록처럼 사기범들은 피해자가 통화를 끊지 못하도록, ‘전화를 끊을 시 도주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며 겁을 준다고 합니다. 피해자들이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쓰는 수법인데요.』

이연은 사건이 일어난 날 밤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 권채우의 형과 독대를 했다.

정신적으로 가장 취약해진 상태에서, 그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환경은 그녀를 수동적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협박과 압박이 가해지자 이연은 그저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섣불리 사인을 했다.

『최근 들어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이러한 방식들이……』

이연은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유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불안을 무시하기 위해 쿠션을 껴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나 호흡만 더 가빠질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권채우가 깨어난 이후 한 달이나 잠을 설쳤다. 아니, 그 전부터였다. 그녀가 보는 세상 어딘가가 곱아들기 시작한 게.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간 물처럼 먹먹해진 순간, 이연은 마침내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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