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억에도 없는 아내가 갑자기 생긴 거잖아요. 권채우 씨 입장에선 이게 얼마나 당황스럽고 불편한 일일지 걱정이 돼서…….”
“날 위해 그랬다?”
그가 성의 없이 되물었다.
자신의 순발력에 퍽 만족한 이연이 고개를 마구 끄덕일 때였다. 권채우가 별안간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좆 까요.”
“……!”
“그딴 걸 배려랍시고 해요? 나는 싫어요, 이연 씨.”
그는 깨어난 이래, 쭉 고분고분한 말투를 써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서요. 그런데 친족 유기라도 할 셈이에요?”
어둠 속에서 그의 동공만이 기름띠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가 내 머릿속을 갈퀴로 싹 다 긁어 갔는데 소이연 씨 얼굴만 유일하게 아른거려요.”
“…….”
“내가 남편이 맞긴 한가 봐요. 그쪽이 날 팽개치려고 하니까 머리에 열이 확 끼쳐요.”
그건 그냥…… 권채우 씨 본성이 고약해서 그렇고요…….
차마 그렇게 대꾸할 수 없었던 이연은 어색하게 입만 달싹였다.
망했다, 망했어.
이연은 무너지려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탐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권채우는 본능적으로 우위를 점하는데 아주 타고난 재주가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약점이 존재했다.
반면, 이연은 그의 여백을 운전대 삼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었다. 진실을 혼자만 안다는 건 아주 좋은 패였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연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군요.”
아니라고! 너는 날 죽이려 했다고!
이번에도 그가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꾀가 또 다른 덫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의가 사랑으로 둔갑되는 바로 이 순간에.
* * *
이연은 휘청거리는 남자를 태운 빈 수레를 끌고 있었다.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연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메웠다.
“나는 몇 살이에요?”
권채우가 수레에 팔을 얹은 채 불쑥 물었다.
“어…….”
이젠 별것 아닌 질문 하나에도 생각이 많아진다. 이건 숫제 지뢰 게임이다. 발 한번 잘못 디뎠다간 터지기에 십상인 도박.
“제가 서른두 살인데…….”
이연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구김살 하나 없이 잘생긴 얼굴은 나이를 특정 짓기 어려웠다. 교복을 입혀 놓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처럼, 슈트를 입혀 놓으면 닳고 닳은 기업인처럼 보일 것 같다.
“저, 저랑 동갑이에요.”
그가 정보를 입력했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런데 서로 존댓말을 썼어요?”
“……권채우 씨가 워낙에 점잖고 예의가 발라서요.”
이연은 없는 말을 하려니 혀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나무는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이제 보니 거짓말도 그렇다. 한번 발아된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갔다.
“그럼 난 뭘 하던 사람이었어요?”
“…….”
이연은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권채우 씨는 사람을 아주 잘 묻었죠…….
“어……, 그게…….”
이연이 머뭇거리자 남자가 툭, 하고 그녀의 팔꿈치를 건드렸다. 그 짤막한 접촉에도 화들짝 어깨를 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땅에 잘 심더라구요!”
“심어요? 뭘요?”
“……그, 그게.”
사람 몸뚱이를…….
“……꽃을.”
“예?”
“권채우 씨는 제, 제 병원에서 꽃을 심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 * *
남자는 흙이 묻어 더러웠고, 바닥에 쓸려 살갗이 벗겨진 상처가 많았다. 이연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에게 간단히 약을 발라 주었다.
붉게 난 스크래치는 보기만 해도 따끔거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권채우는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숨소리만이 이연의 잔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이연은 손끝이 살살 떨려 얼른 이 밤이 끝나기를 바랐다.
“같이 자요.”
“……네?”
이연이 벙찐 채 고개를 들었다.
“부부인데 그럼 따로 자요?”
말갛기만 한 질문에 그녀의 얼굴은 금세 시뻘게졌다.
“그, 그게, 권채우 씨는 아직 환자고……”
“환자긴 하지만 더 이상 식물인간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이연을 바라보는 눈이 올곧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매트리스 끝까지 엉덩이를 슬금슬금 내뺐다.
부부의 의무 따위는 이연이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하나의 거짓말이 불러일으킨 파급력이 이제야 피부에 와닿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음에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내가 낯설어서 그래요?”
“…….”
“이연 씨가 기억하는 남편이랑 달라서?”
“그게…….”
“그럼 식물처럼 숨만 쉴게요.”
그가 투명한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해 왔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위협하지도 않는, 이연 씨가 알던 예전의 남편처럼 굴게요.”
포악했던 순간은 전부 신기루라는 양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왜인지 처량해 보였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자요.”
그가 노력하지 않아도 어차피 잠이 들면 끝이다. 한번 수면에 든 권채우는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고 의사가 말했지. 그러니 일단 재우는 게 급선무였다.
꿍꿍이를 감춘 이연은 군말 없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침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울 정도는 되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미약하게 이불에서 났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그가 고개만 돌려 이연을 쳐다보았다.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에도 그녀는 빳빳하게 천장만 보았다.
“……뭐가 제일 궁금한데요?”
“나는 어쩌다가 식물인간이 됐던 거예요?”
처음부터 세다. 이연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같이 산에 갔다가 사고로 떨어졌어요.”
“이연 씨도요?”
그가 조심스레 미간을 구겼다.
“저, 저는 많이 안 다쳤어요.”
듣기에 따라 미묘한 말이었다. 다친 것도 되고, 안 다친 것도 된다. 훗날의 변명을 위해 구멍을 뚫어 놓은 문장. 이연의 심장이 물수제비처럼 뛰었다.
“그럼 그때부터 계속 간호한 거예요?”
“……저보단 의료진들이 더 고생이 많았죠.”
이 얇디얇은 거짓말은, 들키는 순간 무자비한 발톱에 의해 갈가리 찢길 것이다. 짐승들은 본디 후각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 이연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지금은 몸만 생각해요. 곧 가족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권채우 씨한테 형이 한 명 있거든요.”
“누군지 모르겠어요.”
그가 무심히 대꾸하며 손을 잡아 왔다. 이연이 움찔하자 그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잡힌 건 고작 손뿐인데도 희한하게 온몸이 묶인 듯했다.
“나한테 당장 필요한 사람은 이연 씨예요.”
“…….”
“아내 얼굴만 아른거리는 건, 그만큼 깊게 사랑했다는 뜻이겠죠.”
사랑……. 불현듯 부모의 얼굴이 송곳처럼 떠올랐다. 이연은 욕지기를 참아내듯 입술을 꾹 닫고 숨만 내쉬었다.
별안간 상체를 일으킨 권채우가 발치에 뭉쳐 있던 이불을 두 사람 위로 끌어왔다. 순식간에 휘감는 온기에 이연은 눈만 깜빡였다. 하루의 피로를 급격히 잠재울 만한 포근함이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이불 위에 볼을 문지르는 사이,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우리는 언제 결혼했어요?”
“2년 전에요……?”
“그럼 내가 미워서 운 적은요.”
“네?”
“신혼일 때부터 남편 병수발만 든 거잖아요.”
이거 최악이었네, 하고 그가 의외로 상식적인 소리를 중얼거렸다.
“저는 말 못하는 환자들이 익숙해서, 울지는 않았어요.”
“연애는 얼마나 했어요?”
“그, 그게…….”
질문의 난이도가 점차 올라간다. 하지만 평생을 외롭게 산 솔로가 누군가의 연애담을 그럴듯하고 유려하게 풀어낼 리 없었다.
“그냥 만나자마자 바로…….”
“바로?”
바로 결혼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그래도 이 섬에서는 동남아 여자와의 국제결혼도 꽤 보이고, 다방에서 보는 맞선도 아직 허다했다. 이연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가 눈썹을 휘어 올렸다.
“원나잇?”
“네?”
“만나자마자 몸부터 맞춰 봤어요? 해 보고 나니까 이 남자다 싶었고?”
“…….”
그녀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자 그가 선선히 웃었다.
“내가 그걸 잊다니, 이렇게 아까울 수가.”
시원스레 쭉 올라가는 입꼬리는 풋내기 같았다. 특히나 사람을 깔보고 위협하는 데에만 썼을 것 같은 눈매가 정반대로 휘어지는 꼴이라니. 이연은 그 광경을 입 벌리고 쳐다보았다. 꼭 나쁜 꿈을 눈 뜨고 꾸는 것 같았다.
“이연 씨도 제법 과감한 데가 있었네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오해를 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어딘가가 불편했다. 그러나 반박하듯 외친 것 치고 마땅히 덧붙일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 잠깐의 정적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권채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슥, 하고 베갯잇에 뒷머리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