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리는 그런,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착각하지 말아요. 우리는요, 우리는……. 사이가 아주 좋았어요! 당신은 아주…… 다정했거든요. 날 위해서 목, 목걸이 같은 것도 걸어 주구요.”
그 얇은 목줄은 거의 무기였지만요…….
능청스러운 어조였으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나왔다. 남자는 감흥 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빨긴 했다는 거네요?”
“……네?”
“내가 어지간히도 개새끼처럼 범했나 봐요. 말하는 게 꼭 세뇌 당한 사람 같아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그녀가 숫제 비명을 지르듯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널 세뇌시키려는 거라고……!
이연은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휘말리는 기분은 더없이 텁텁했다.
“그런 게 아니라요……! 권채우 씨는 날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오늘처럼 거칠게 힘을 쓴 적도, 진심으로 위협하지도 않았어요.”
그녀는 원하는 것을 교묘하게 바꿔 말했다.
“권채우 씨는 나쁜 짓을 원체 못했어요.”
남자는 조용히 눈썹을 들었다 내릴 뿐, 크게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가 심드렁하게 그녀의 목선을 쓰다듬었다.
“왜요?”
“네?”
“내가 왜 나쁜 짓을 못해요?”
“어, 왜냐면…….”
남자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맥이 펄떡펄떡 뛰었다. 사실 그의 터치는 난제를 더듬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권채우를 피해 도망치다 잡혀 본 이연으로선 그 행동마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이연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되는대로 말했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그래요!”
“법?”
“……아, 그러니까, 그게…….”
어째 짚는 돌다리마다 가루처럼 부서진다. 그녀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튼실한 배우자는 운명으로 찾는 기 아이고, 선견지명으로 머리 굴려서 고르는 기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비밀스러운 총기로 반짝였다.
권채우, 당신은 앞으로도 얌전히 있어 줘야 해.
“……날 해치면 친족 살해가 돼서요.”
그에게서 안전해질 방법. 최소한의 안전망.
그건 바로 족쇄였다.
무색무취했던 그에게 처음으로 색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눈살을 노골적으로 일그러뜨린 그가 주사 바늘을 툭 놓았다.
양심이 수군거리고 혀가 뻣뻣해졌지만, 이연은 곧바로 미간에 힘을 준 채 지지 않겠다는 듯 선언했다.
“내가 권채우 씨 아, 아내, 거든요.”
그날 밤, 치명적인 씨앗이 발아되었다.
* * *
이거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이런 사고는 해외의 논문에서나 나올 법한 사례여서,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젯밤에 날벼락을 맞았다구요?”
“예에. 흐으…….”
이연은 반으로 쪼개져 시커멓게 탄 나무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전화를 준 아주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게 우리 아들 태어날 때 심은 나무예요, 선생님. 근데 그놈이 다 커서 지금 군대에 있거든요. 이거 불길해서 어째요…….”
“일단은 좀 살펴볼게요.”
멀쩡한 몸이 순식간에 갈라져 보기 흉해진 나무. 이연은 제가 다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진단을 시작했다.
“과장님, 이거 외과 수술해야겠는데요. 일단, 날 잡고 파인 부분부터 사슬로 메우죠.”
“그러다 죽어서 덤터기쓰면 어쩔라고.”
수술 박스를 들고 따라온 추자가 염려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다행히 뿌리가 상하지는 않았어요.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들 탄생목이라잖아요. 병원에 향토 넉넉히 있죠?”
추자는 호두처럼 단단히 말하는 이연을 보다 흠칫하고 말았다. 어째, 밝은 데서 본 그녀의 얼굴이 형편없다.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심상치 않았다.
“근데 원장아, 니 요즘……”
그때 지이잉, 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가까이 있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멀찍이 자리를 옮겼다.
“여보세요?”
처참한 나무를 보면서도 어른스럽고 침착했던 이연의 눈빛이 홱 돌변한다. 손톱을 뜯으며 주위를 서성이는 꼴이 꼭 빚쟁이를 피해 도망친 노름꾼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밀짚모자에 가려져 있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식물인간 권채우가 깨어난 지 어느덧 한 달.
그를 데려간 의료진은 “기억상실입니다.”라는 구태의연한 말만 남긴 채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걸려 온 전화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그녀는 벙찌고 말았으나 이내 고개를 휘휘 털었다.
“……그게 무슨. 장난하지 마세요. 제가 그 사람이랑 대화까지 나눴는데요. 심지어 밑에 깔리기까지 했다구요.”
수화기 너머에서 돌연 헛기침이 들려왔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권채우는 “내가 네 아내다.”라는 고백을 듣자마자 기력을 다 소진했는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이연은 즉시 의료진에게 연락을 했고, 그 결과가 이거다.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신경이 닳았었는지.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발작적으로 머리카락까지 잡아 뜯었다.
그렇게 며칠간 밤잠을 설친 후에야, 이연은 자신의 임기응변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아내라니. 살인자의 아내라니! 많고 많은 핑계 중에서 왜 하필……!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좀 다릅니다.
“네?”
―뇌 분석 결과, 의식이 돌아온 것까진 확인을 마쳤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것도 믿기진 않지만 맞습니다. 다행히 반응 검사도 모두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연은 덩달아 숨을 멈췄다.
―환자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분명 깨어났다고…….”
그녀가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긴 합니다만, 환자분이 희귀한 증상을 보이고 있어서요.
“……희귀한 증상이요?”
―과다 수면증입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낯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세간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증후군으로도 알려진 질환인데…….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는 다 해 봤지만 딱히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서 그저 의심만 하고 있는 상태고요.
이연은 그저 멍하니 턱을 벌렸다. 예상치도 못한 얘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조용히,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이 증후군이 맞다면……. 한번 잠에 빠지면 일주일에서 길게는 열흘, 그 이상까지도 깨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
―현재 환자는 12일째 수면 상태고요.
“…….”
―일단은 다시 집으로 이동시켜 놓겠습니다.
의사가 통화를 마칠 기미를 보이자 그녀는 급박히 그를 붙잡았다.
“서, 선생님, 잠깐만요!”
이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모자챙을 올렸다. 축축했던 이마에 건조한 바람이 와 닿았다.
“그러니까……. 권채우 씨가 지금 식물인간 상태는 아니지만……. 언제 깨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그녀가 집중하듯 눈을 감고 느릿하게 되짚었다.
―예. 지금으로선 그렇게 관찰됩니다.
“하……!”
이연이 울먹이듯 숨을 내뱉었다. 가슴 졸이며 쌓아 뒀던 묵은 불안이 한꺼번에 산화되고 있었다. 꾹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
이연이 고개까지 숙이며 허공에 인사를 했다.
수습할 시간이 있다.
‘내가 권채우 씨 아, 아내, 거든요.’
그 거짓말을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거다!
쓰레기통처럼 꽉 차 있던 흉곽을 가르고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되돌릴 수 있다. 잘하면 시치미도 뗄 수 있어. 모든 걸 다 꿈으로 치부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선생님. 더욱 열심히 살게요!
그렇게 현장으로 복귀한 이연은 아직 절망의 낯을 지우지 못한 의뢰인에게 퍽 희망차게 말했다.
“이 나무는 제가 최선을 다해 살려 볼게요!”
* * *
―감사합니다, 선생님. 더욱 열심히 살게요!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의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흥미가 식은 듯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2년간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간 관리를 잘해 준 덕분인지 관절도 유연하고 재활도 순탄했다. 환자는 타고나길 강골에 운동신경까지 예민한 사람이어서, 금세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 놀라운 회복력은 딱 일주일까지였다.
그 후로는 3일 수면, 5일 수면, 12일 수면으로 마치 식물성 활동에만 중독된 사람처럼 내내 잠만 자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머리를 크게 다쳤던 만큼 후유증은 어떤 형태로든 왔을 것이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완전무결하게 회복될 것이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오만이지 않나. 게다가 환자는 이미 기억에도 문제가 생긴 후였다.
그런데, 알 수 없이 찜찜했다.
“환자분, 이름 좀 말해 볼까요?”
“…….”
“제 목소리 들리세요? 아무 말이나 좋습니다.”
“―세…….”
“네, 좋아요. 계속 말씀해 주세요.”
환자가 했던 말이 잊히지를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