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물에게도 정신세계가 있어 예쁜 말을 할수록 건강하게 자라고, 욕설을 할수록 일찍 죽는다. 그걸 아는 이연이기에 매번 그녀의 기도는―
깨어나지 말아요. 깨어나면 안 돼요.
부디 내가 조용히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라는 반복적인 염원이었다.
그런데.
이연이 멈칫했다.
‘……없네?’
패닉이 온 그녀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아니, 산 사람이라고 하기엔 한낱 식물로 격하되어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 무언가.
딱딱한 껍질만 남은 그것이 머물렀던 자리.
침대가 비어 있었다.
“――!”
뒷덜미에서부터 시작된 소름이 삽시간에 그녀의 매끈한 피부를 뒤덮었다.
* * *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진 남자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연은 바닥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보며 생각했다.
죽었을 거다. 머리가 곤죽이 되도록 맞다가 떨어졌으니 당연히 죽었을 거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 혼자 산속에 남겨진 후였다. 경찰은 오다가 사고라도 났는지 깜깜무소식이었고, 돌을 쥐었던 남자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다시, 다시 경찰에 신고를 한 뒤에―
집으로 가자.
악몽은 끝내는 법은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을 살아야 했다.
이연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간신히 한 발짝을 뗐다. 죽은 솔잎이 발밑에 밟혀 바스락 부서졌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느닷없이 코와 입이 강한 힘에 의해 꽉 눌렸기 때문이다. 시큼하고 따가운 향이 콧속을 찌르며 쳐들어왔다. 이연은 제대로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여기가 어디지?’
눈꺼풀 하나를 들어 올리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연은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머리를 여러 번 흔들었다.
사방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깜빡거리는 낡은 전구만이 이곳의 유일한 빛이었다.
“……누, 누구세요?”
전구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한 남자가 시야에 잡혔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두툼한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허공으로 퍼지는 연기가 비현실적으로 느리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왔다.
철컹.
그때 의미심장한 소리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이연은 자신이 수갑에 포박된 채 낡은 의자에 달랑 앉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을 움직여 봤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갑고 예리한 감촉만이 손목에 긁히고 부딪혔다.
“왜 그랬습니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어딘가 흐릿했던 정신이 단번에 깨어났다.
“사람 머리를 그렇게 짓이겨놨으니 딱히 살아날 것 같진 않고.”
“……!”
“당신이 반 죽여 놓은 사람이 내 동생입니다.”
전구의 떨림이 멎자 막혀있던 오감이 확 열렸다.
버려진 창고에선 비린 쇳내가 진동을 했다.
천장에 달려 있는 갈고리, 그곳에 죽 걸려있는 돼지 사체, 피가 찰랑이는 양동이들. 그 모든 정보가 두 눈에 폭격처럼 떨어졌다.
어디선가 구더기가 끓는다. 작업꾼들은 무거운 고무장화를 신고 태연하게 돌아다녔다. 그들은 실수로라도 시선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저 내장을 제거하고 부위별로 살점을 자르며 긴 호스로 핏자국을 씻어냈다. 그 철저한 무시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연은 도축장 한가운데서 눈을 떴고, 그 앞에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의 존재는 더없이 기묘했다.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고민했습니다. 간단히 찢어버릴지, 드럼통에 시멘트를 부어 바다에 던져버릴지.”
쾅쾅―! 마침 드럼통 안에서 누군가 거칠게 발길질을 해댔다. 폐쇄된 공간에서 울리는 처절한 비명에 이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 책임질 사람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사람을 해쳤다는 죄책감을 상쇄하는 건, 우습게도 보복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저, 저기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정당방위였어요. 제가 동생 분을 그렇게, 그렇게 만든 게 아니에요.”
이연은 치미는 떨림을 억누른 채 반박했다.
“오히려 그쪽 남동생이 먼저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요. 사람을 묻고 있었단 말이에요……!”
“사람 하나 묻는 게 대숩니까?”
남자는 감흥 없이 재를 툭툭 떨구었다.
이연은 딱히 춥지도 않은데 다리가 발발 떨렸다.
“즐겁게 하던 일을 방해 받았으니 당연히 화가 나죠. 걔가 어떤 앤데.”
차가운 은색 테의 안경을 낀 남자는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지만 풍겨 오는 연륜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저는 정말, 정말 아니에요.”
이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랬어요. 생매장 당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돌로 내리쳤단 말이에요. 아래로 민 것도 제가 아니에요. 저는 진짜 아니에요. 물론, 물론 저도 살려고 톱으로, 톱으로 때리긴 했지만…―”
울음을 참으며 횡설수설 말을 이을 때였다.
“내 동생은 귀가 좋습니다.”
“…….”
“뒤에서 접근하는 새끼 하나 못 피하고 그대로 맞아줄 정도로 멍청하고 무신경하지 않다는 소립니다.”
“그, 그건……”
이연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 급류에 휩쓸렸다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인생이 박살 날 것 같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고, 저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강박처럼 그녀를 조여 왔다.
쾅쾅, 쾅쾅. 귓가를 연신 때리는 누군가의 절박한 발길질이 이연을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그런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그자와 공범입니까?”
별안간 남자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네?”
그녀는 뒤통수를 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사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소이연 씨를 완벽한 가해자로 만드는 건 딱히 어렵지도 않은 일이라.”
그가 안경테와 똑같은 색의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공범이라뇨……! 정말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숨을 씨근덕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관심도 없다는 낯을 하고 있었다. 이쪽은 인생이 걸려 있는데, 남자는 식사를 하듯 여유로웠다. 그 현격한 온도 차에 이연은 무력감을 느꼈다.
“소이연 씨.”
그가 가까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막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보고 온 입장으로서, 누군가는 그에 대한 죗값을 치르길 바랍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식물……인간이 됐어? 그 살인자가? 심장이 알 수 없이 뛰었다.
“그러니 돌로 찧어 밀었던, 톱으로 때렸건. 저한테 그 시시비비가 중요할 것 같습니까?”
그는 내내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곤란해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재밌어 하는 것도 같았다. 이연은 깊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대신, 거래를 하자는 겁니다. 소이연 씨가 조금만 영리하게 굴면 여기서 충분히, 안전하게 나가실 수 있습니다.”
까맣게 죽어가던 이연이 턱을 재빨리 들었다.
“거래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남자는 고기가 실린 상자에 시가를 비벼 껐다.
“진범을 잡아다 소이연 씨 자리에 앉혀 주겠습니다.”
“…….”
“대신, 그때까지 내 동생을 맡아 주십시오.”
그가 새하얀 계약서를 내밀었다.
“되도록이면 화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
“아예 발을 묶어둔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녀는 시끄러웠던 드럼통이 조금씩 잠잠해지는 순간을 함께 겪으며 모든 의지를 잃어버렸다.
* * *
“――!”
그런데 없다.
오직 밀쳐진 의료 기기만이 주인을 잃고 달랑 놓여 있었다. 구겨진 이불과 텅 빈 침대를 보는 순간, 이연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어, 어디로 갔지?
그녀가 바보처럼 허둥대는 동안, 잊고 있던 공포가 어젯밤처럼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날의 공기와 습기, 냄새와 긴장감.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 고민했습니다. 간단히 찢어버릴지, 드럼통에 시멘트를 부어 바다에 던져버릴지.’
동시에, 싸늘했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찾아야 해.”
2층, 2층 화장실부터. 그다음엔 거실이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수납 창고도……. 온갖 생각이 주파수처럼 지지직거렸다.
그렇게 창백해진 그녀가 뒤를 돌았을 때였다.
“꺄악……!”
그건 명백한 공격이었다. 방문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짐승처럼 확 달려들어 이연을 덮쳤다. 우당탕탕, 의료 기기가 넘어졌다.
하지만 2년 만에 갑자기 깨어난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역시나 무릎이 꺾여 휘청거린 그는 이연을 포박하듯 돌려세우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매트리스에 한쪽 볼이 꾹 눌렸다. 그녀는 등 뒤로 느껴지는 남자의 무게에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이익……! 놔, 놔요……!”
이연의 두 팔이 꺾였다. 그녀의 엉덩이에 올라탄 남자는 양 허벅지로 이연의 다리까지 완벽히 봉쇄했다.
분명 근육이란 근육은 다 빠졌을 텐데.
얇은 잠옷 너머로 탄탄한 살성이 느껴졌다. 특히나 예민한 볼기를 짓뭉개는 두툼한 성기에 더욱 몸서리가 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