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와 그와 그-4화 (5/5)

04. 결혼은 하나

별장에 다녀오고 계절이 바뀌었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산재해 어느 곳 하나 비우지 않고 뙤약볕을 강렬히 쏘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땀이 눅눅하게 차올라서 실외로 나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세 남자와의 사이는 여전했다. 아니, 더 좋아졌다. 도하와 한겸이 세아의 애정을 갈구하며 치덕거리지만 그녀가 눈치채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 문제로 받은 스트레스도 그들과 있으면 풀렸다. 그들은 그녀를 편안하게 했고 동시에 몸과 마음을 다 기쁘게 했다.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안정감. 설령 그것이 다수더라도 그 일이 새어나가지 못할 단단한 방어막을 갖춘 뒤라면 안정적이었다.

세아는 더 과감해졌고 그들은 늘 자극적이었다. 지루함에 지쳐 이태원을 뒤적이지 않아도 됐고 그 시간에 더 기쁜 걸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비로소 평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결에게서 연락이 왔다.

「볼일이 있어 근처에 왔는데 점심이나 할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정중한 메시지는 의외였다. 한겸과 도하라면 몰라도 한결이 먼저 둘이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세아는 그가 예약해뒀다는 일식집에 들어섰다. 고급일식집은 방이 나누어져 있는 데다가 벽이 두꺼워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오셨습니까.”

“너랑 둘이서 만나는 건 처음인 거 같네.”

도하나 한겸과는 각자 만나기도 했다. 도하는 대외적으로도 세아의 연인이라 더 거리낌이 없었고 한겸과 만날 때는 남친의 조카라는 핑계를 대면 됐다. 세상은 세아의 생각보다 순진해서 남친의 조카가 설마 다른 남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둘이서 세아의 남친이자 그의 삼촌인 도하의 선물을 고르던 중이라고 하면 그렇구나 생각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고 식당에서 준 녹차 한 잔으로 입가심을 할 때 한결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착 깔려있었다.

“……뭔데?”

“물은 다 삼키세요. 사레들리실 수도 있으니.”

입안에 반쯤 머금고 있던 찻물이 꼴깍 넘어갔다. 사레는 이미 들렸다. 세아는 기침하다가 한결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입을 가렸다. 그는 그녀의 기침이 그칠 때까지 옆에 앉아 가만히 등을 두드려줬다. 세심하고 배려 넘치는 손길이었다.

“무슨 일 있어?”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으응.”

“삼촌이 곧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타부타 없는 그야말로 본론이었다.

“뭐?”

“놀라셨습니까?”

“당연히 놀라지. 갑자기 그게 무슨…….”

“오히려 늦은 겁니다. 삼촌은 올해 31살이고 이한의 장남이니까요. 저나 형은 ‘이’씨를 물려받지 못한 외손주라 할아버지 마음에 차는 손주가 아니고요.”

언젠가는 이런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늘 이별을 생각하던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갑작스러웠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먹먹하게 잠겼다.

그렇다고 불륜을 저지를 마음은 없었다. 여럿과 관계하는 것과 불륜은 달랐다. 그건 죄였고 세아의 마음은 그만큼 모질지 못했다.

아마 여기까지겠지. 그가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세아가 그를 보내줘야 했다.

이도하. 이별.

가만히 그 두 단어를 연결해보던 세아의 손등이 푸르게 질렸다. 손톱이 불안하게 찻잔을 긁고 이가 여린 입술을 짓이겼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에 떠밀려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이 정도였던가? 의아할 만큼 그 감정이 깊고 짙었다.

생각 이상으로 그들에게 많이 의지했던 모양이었다. 도하와 끝낼 거라면 한겸과 한결도 정리하는 게 옳았다. 그들이 셋이었기에 이어진 관계였고 어느 하나가 빠진다면, 그것도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이도하. 서한겸. 서한결. 이별.

자연스레 연결된 단어에 가슴을 누르는 묵직한 돌덩이가 부풀었다. 쿵쿵 쳐대는 통에 쓰리게 긁히고 괴롭게 터졌다.

비참하게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스스로 선을 그어놓은 관계였음에도.

“헤어지기 싫으십니까?”

그녀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던 한결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럼 헤어지지 않으시면 됩니다.”

“뭐?”

불륜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첩처럼 살라고?

세아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너희가 아무리 좋아도 불륜은 안 해. 내게도 선이 있어. 그걸 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세아는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로 제 생각을 전했다. 끝내 이성을 잃지 않는 눈동자가 빙하처럼 냉하고 단단했다.

“우리를 좋아합니까?”

“…….”

“세아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말해준 적 없습니다. 아주 조금쯤은 우리를 좋아해요?”

참았던 눈물이 그때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기회는 한때뿐인데.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는데.

한겸은 사정할 때마다 귓가에 사랑한다고 애정을 퍼부었고 도하는 제 마음을 투명하게 비추며 자신을 동정해달라고 매달렸다. 마음 한 조각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이미 흘려보낸 걸 아니라고 붙잡았을까.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다더니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

“좋아합니까?”

말없이 눈물을 뚝 흘리는 세아를 어르며 한결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못해줄 것도 없다 싶었다. 세아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 그러네. 나 너희 좋아해. 도하 씨도, 한겸이도…… 한결이, 너도.”

부딪치는 눈빛에 여유롭게 걸쳐있던 미소가 사그라졌다. 꾹 다물린 입매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미움 좀 받겠네요. 다름 아닌 가장 소극적이었던 제가 먼저 그 고백을 받아서.”

“다 끝난 마당에 뭘. 좋아하지만 그 이유로 나를 망치고 싶지는 않아.”

“전 그래서 당신이 좋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는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입꼬리를 씩 끌어당겨 싸늘하게 웃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니까. 자신의 신념은 고집스레 못 버리잖아요. 그만큼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력도 강하고. 그쯤이면 미칠 법도 한데.”

“……비꼬는 거야? 나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고?”

“아니요. 칭찬하는 겁니다. 세아가 그러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이 관계, 시작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녀가 앉은 방석이 스르륵 끌렸다. 그의 손에 이끌려 어둡게 내려온 그의 그림자로 빨려갔다.

“전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좋아해요.”

귓가에 입술을 묻고 애무하듯 지분거렸다. 낮게 그늘진 목소리가 음산하고 오싹했다. 고백인지 협박인지 모를 온도에 세아가 몸서리치자 그가 귓바퀴를 핥아 질척이게 만들었다.

“삼촌의 결혼 상대, 세아가 해주세요.”

척척해진 귀에 밀어가 흠뻑 젖어들었다.

“……뭐?”

소름이 돋은 귓바퀴를 붙잡고 멍청이처럼 물었다. 한결의 웃음이 짙어졌다.

“정해진 결혼 상대가 있는 게 아닙니다. 결혼이 필요한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제 외조부이신 이진철 회장님께서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이한텔레콤 사장께서는 통신 회사로 만족하고 끝날 분이 아니어서요. 간단히 말하자면 후계 전쟁, 쯤이 되려나요?”

이한텔레콤 사장이라면 쌍둥이들의 친모인 이진희 사장을 말하는 거였다.

‘엄마를 저렇게…… 날 선 목소리로 부르나?’

세아의 경악을 눈치챈 한결이 눈꼬리를 야릇하게 휘며 눈웃음쳤다.

“그 사람이 좀 별난 게 아니어서요. 동생이든 아들이든 신경도 안 씁니다. 동생은 날 때부터 쳐내야 할 이리였고 아들들은 그 이리에게 달라붙은 배신자쯤 되려나요? 아. 개새끼에 더 가깝겠네요. 전에 한 번 ‘주인 문 개의 마지막’에 대해 지고하게 말씀하신 걸 보아서는.”

“…….”

“산 채로 사지를 잘라 먹이로 준 다음 제 살점이 담긴 뱃가죽을 찢어 그 내장을 까마귀밥으로 줘야 한다던데…….”

별 의미 없이 시큰둥하게 지껄인 말에 세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친엄마가 아들에게 그딴 말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한결도 이상했다.

“아. 성정이 잔인해서 말본새가 그렇습니다. 흘려들으세요.”

조금 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한결이 세아를 빤히 바라보며 불쑥 차를 내밀었다.

“차라도 다시 마시겠습니까? 아직 따뜻한데.”

하얗게 질린 손에 데워진 찻잔이 닿자 써늘한 배 속도 차분해졌다.

“삼촌은 이한텔레콤쯤은 그 여자에게 줄 마음인데 그 여자는 안 그렇거든요. 오죽 독해야지. 양보했다가는 못 볼 꼴 많이 봐야 할 겁니다. 한국에 다시 못 들어오는 정도는 당연하고. 삼촌이 양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삼촌은 아시다시피 짐이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남의 짐을 떠맡아서.”

짐. 한결이 말하는 짐은 그와 그의 형이었다. 서슴없이 자신을 짐이라고 표현한 것에 세아는 충격을 받았다.

“너…… 괜찮아?”

뻗어오는 손길에 시큰둥한 얼굴이 굳었다. 찻잔에 데워진 따뜻한 손이 차가운 뺨을 꾹 눌렀다.

“이 말 어디에 내 걱정을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겁니까?”

당최 이해 못 하겠다는 말투에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의 눈길을 외면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이 불거진 건 그 여자가 외조부에게 속살거린 말 때문입니다. 삼촌이 손자를 낳아 계속 ‘이’씨 가문에 이한을 물려줄 수 있겠냐고 했거든요.”

“회장님이 알고 계신 거야?”

“삼촌이 여자를 기피한다고 생각하시거든요. 어쩌면…… 게이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아의 존재는 그 여자도 비밀로 묻어둔 것 같고. 회장님은 건강이 안 좋아서 예전 같지 않거든요.”

“…….”

“노친네가 핏줄을 얼마나 따지는지 노발대발해서는 당장 결혼하라고 난리치다가 혈압이 올라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화병이죠. 아. 그쪽도 성격이 별나거든요.”

아득함에 눈이 감겼다. 한결의 외조부라면 도하의 친부였다. 아내를 강제로 안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줘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더 웃긴 건 따로 있습니다.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는 사실 핏줄보다 제 권위가 먼저였던 겁니다. 삼촌이 결혼은 자기가 결정할 거라고 선을 긋자 그 잘난 ‘이’씨의 핏줄을 잇는 것보다 말 안 듣는 자식이 더 괘씸했는지 갑자기 마음을 바꿨습니다. 삼촌이 계속 말 안 듣고 미혼으로 지내겠다면 그 여자에게 주식을 물려주겠다지 않습니까.”

이진철 회장에게는 자식이 세 명 있었다. 이진희와 이가희 자매와 아들인 이도하. 이가희는 몸이 약한 편이라 자연스레 도태되었고 첫째 딸인 이진희와 막내아들인 이도하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실권은 삼촌에게 하나둘 넘어오는 상황인데 주식 쪽이 문제입니다. 할아버지의 주식이 이한텔레콤 사장에게 다 넘어가면 위험해지거든.”

다시는 한국에 발 들이지 못하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동생에게, 아들에게, 그렇게 심할 수 있나 싶었지만 그의 서늘한 말투에서 그것이 진심임을 느꼈다.

“삼촌은 세아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테고 눈이 반쯤 돈 할아버지는 제 말을 안 듣는 자식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이한텔레콤 사장에게 남은 주식 다 물려주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심지어 진심이기까지 해요. 촌극이죠. 막장입니다.”

“…….”

“그런데 또, 기가 막히게도 현실이라서…….”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그가 입가를 가렸다. 그도 이 상황이 기막힌 것 같았다.

“세아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우리를 지켜줄래요?”

그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우는 아이처럼 애처롭게 뻗은 손이 세아에게는 보였다.

* * *

한결은 자신에게 기적이 두 번씩이나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살아왔다. 신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딱히 남을 위해 산 적 없는 그에게 구원을 두 번 보내줄 리 없을 거라고 믿어왔다.

맞아 죽든 뇌가 터져 죽든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에게는 이미 첫 구원이 내려졌다.

삼촌 이도하. 그가 친모에게 학대당하는 쌍둥이 조카를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을 때, 누구도 세 사람을 침범하지 않는 온전한 결속이 만들어졌다. 한결은 그 세상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는 형인 한겸과는 다르게 단순히 좋고 즐거운 것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필요성’이었다. 무엇이든 제게 도움이 되는 걸 손익계산을 철저히 해서 받아들였다.

세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녀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있으므로 그의 세계가 더 단단해질 테니까. 그녀의 존재가 셋을 영원히 함께하도록 묶어줄 테니까.

그러니까 두 번의 구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가진 걸 이용해 이 여자를 묶어놓을 생각이었다.

세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부분을 그가 채워주면 그녀도 제안에 응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해온 꾸러미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선물 받은 어린애를 어르듯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세아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전에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이가 들면 돈 많은 백수로 살 거라고. 그거 좀 빨리하세요. 결혼하면 삼촌의 재산이 당신의 재산일 겁니다. 또한 지금의 즐거움도 그대로예요. 일처다부. 남편이 셋이면 불륜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이걸 제가 제안했으니 본처는…….”

“그래.”

“……예?”

냉정한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깨진 유리조각 더미에 그가 비친 것 같았다. 파사삭 깨진 그를 보며 세아가 가슴을 펴고 웃었다.

“문제는 두 가지가 있어. 첫째, 도하 씨가 정말 나를 결혼 상대로 마땅해할 것인가. 둘째, 회장님 눈에 내가 찰 것인가.”

“……삼촌 31년 인생에 여자는 세아 하나입니다. 62살에나 결혼을 생각할 게 아니라면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그리고 두 번째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도 삼촌이 데려오는 여자라면 환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혹시…… 제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한 거 아닙니까?”

“도하 씨랑 결혼해달라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알고 있다니 더 얼이 빠졌다.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이지? 그가 알고 있던 유세아가 맞는지도 헷갈렸다. 헛도깨비를 보는 것인지 유세아의 탈을 쓴 요녀를 보는 것인지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분명 유세아가 맞았다. 그의 생각 이상으로 그녀가 담대했을 뿐이다.

“기회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 최소한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여차하면 이혼이라는 방법도 있잖아. 요즘 시대에 이혼이 흠도 아니고 나는 지금 당장 달리 만나는 사람도 없어. 도하 씨는 결혼이 당장 필요하고 나도 너희들이랑 계속 있고 싶고. 후계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는 잘 몰라도 너희가 안전했으면 좋겠고. 관계의 정의가 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피해받으면 나중에 위자료로 다 뜯어낼 거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는데 괜찮을 것 같아.”

그 잠깐 사이에? 게다가 이혼? 계약결혼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의문을 삼켰다. 저렇게 순진하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았는지는 일이 끝난 후에 알아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음…… 내가 도하 씨에게 청혼해야 할까?”

굳은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던 한결이 경악했다. 귀가 잘못된 건가 의심하는데 진지하게 청혼을 고민하는 얼굴이 보였다. 순간 표정이 허물어지고 폭소가 터졌다.

“아하하하!”

도하와 한겸에 비해 재고 따지는 게 많은 한결은 비교적 세아에게 냉정했다. 홀리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왜 그녀에게 빠졌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엉뚱한데 계획적이고 그 엉망진창인 계획이 도리어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웃으니까 어려 보인다.”

폭소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세아가 다정한 얼굴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있지, 한결아……. 내가 세상에 나와 보니까 내 나이도 아직 어린 거였어. 그러니까 너도 어려. 어린애가 남에게 도움받는 걸 짐이라고 하지는 않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타이르는 게 꼭 자장가 같았다. 아주 어릴 때도 들어보지 못한 자장가가 지금에서야 들리는 것 같았다.

어린애는 짐이 아니다. 보호자가 필요한 아이일 뿐이다.

그녀는 다 커서 음습해진 남자를 두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너희는 도하 씨의 짐이 아니야. 그는 그냥…… 너희를 지켜주고 싶은 게 아닐까?”

“…….”

그 순진해 빠진 생각들이 우습고 슬퍼서 갈비뼈가 빠듯하게 부풀었다. 땡땡 부푼 흉곽을 타고 뜨거운 피가 울컥 맥박쳤다.

“으음…….”

한결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는 어색한 것처럼 말을 흐렸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빤히 보였다. 멀쩡한 성인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걸 그가 마땅찮아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토끼 새끼가 범 새끼를 걱정하는 꼴이었다. 친하게 지냈다고 하더라도 범은 범. 언제든 잡아먹힐 텐데.

“다른 두 사람에게는 언제 상의하는 게 좋을까?”

기껏 돌린 말은 저따위였고 그마저도 상냥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자기가 연상이라는 생각이 뿌리박힌 얼굴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돌봄이 필요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시 자신의 구원을 찾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형과 다르다. 필요한 건 확실히 ‘쾌락’은 아니었다. 대신 아직도 ‘구원’을 찾고 있었다. 그의 세계를 더 완전하게 만들어줄 존재를.

“한결…… 읏!”

고개를 숙인 그가 물어뜯듯 그녀의 입술에 들이닥쳤다. 으응, 하는 작은 신음을 죄 삼키고 녹차향이 밴 혀를 입술에 묻어 빨았다.

“좋아서 좆이 발딱 선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요. 귀두 끝까지 울퉁불퉁 부었습니다. 요도로 피가 시큰하게 흘러내리는 느낌이라 사정한 줄 알았어요. 처박고 싶네요. 밖에서도 품어주실 겁니까?”

세아의 손을 이끌고 간 그가 바지 안에서 불뚝 솟은 성기를 치대며 발간 낯을 했다. 꿈을 헤매는 몽롱한 눈동자에 섬뜩한 섬광이 스쳤다.

“어…… 아무래도 넌…… 한겸이에게 상스럽게 말한다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아.”

“전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모르는 사이 이렇게도 깊게.

셋 중 그가 세아와 가장 비슷했다. 재고 따지는 게 많아 쉽게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계산하고 특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답해줘요. 세아도 날, 우리를 좋아한다고.”

단비에 젖듯 스며드는 마음과는 달랐다. 필사적으로 거부했기에 빠져드는 순간 가장 대담하고 강렬했다. 그 아득한 호수 위에 손수 몸을 밀어 던지며 뿌옇게 오르는 산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널 좋아해…… 한결아.”

이대로 잠겨버려도 상관없었다. 세 번째 구원까지는 진심으로 더는 바라지 않으니.

* * *

세아는 그날 정기예금 통장을 깼다. 그녀가 3년간 벌어놓은 돈을 모두 입금해 만든 연이자율 2%의 통장이었다. 딱히 아껴 쓴 건 아니지만 사치를 하지도 않았다. 제법 묵직한 돈은 이한 백화점으로 빨려갔다.

예금을 깨면서까지 그녀가 구입한 건 팔찌 네 개였다. 팔찌의 주인은 물론 그들이었다. 선물 하나에 통장까지 깰 필요가 있겠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꼭 값비싼 것이 좋은 선물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명품을 착용했고 세아는 자신의 선물이 가격을 이유로 이질적이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이런 설명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냥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치고 싶었다. 역시 그것뿐이었다.

“팔찌? 이 브랜드 가격은 최소 천 단위인데 네 개나…… 누나, 사채 썼어요?”

설마 빚내서까지 샀을까. 세아는 어처구니없었지만 다른 두 사람에게는 한겸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어디입니까.”

“……도하 씨?”

“경우에 따라 질 나쁘게 구는 놈들이 많습니다. 괜히 못 볼 꼴로 그 눈을 더럽힐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 처리를 맡기세요.”

‘처리’라고 발음하는 목소리가 오싹했다.

“……어떤 식의 처리를 말씀하시는 건지?”

완벽한 오해였으나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단정하고 신사적인 모습만 보여주었던 도하가 무슨 처리를 하겠다는 건지.

“그야 당연히 대화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난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영화도 아니고.’

세아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은 고마운데 사채 빚 안 냈어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이 좀 있거든요. 저 생각만큼 벌이가 나쁘지 않아요. 연봉도 꽤 되고.”

“…….”

“평범한 회사원 기준이지만.”

그녀는 말갛게 웃으며 팔찌가 담긴 상자 하나하나를 그들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제 몫의 여성용 팔찌 하나를 손목에 찼다.

손을 흔들자 ‘짤랑!’하는 가벼운 금속음이 났다.

“예쁘죠?”

“……예쁩니다.”

“그런데 왜 다들 멀뚱히 있어요? 내 선물 안 해요? 주는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야죠.”

새침하게 투덜거리자 그들이 하나둘 팔찌를 착용했다. 눈꼬리를 쭉 빼고 그 모습을 살피던 세아의 뺨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연습해오기는 했는데 막상 이 말을 하려니 가슴 떨렸다. 한결에게는 즉답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쉬운 결정인 건 아니었다.

달칵. 세아가 핸드폰 화면을 몇 번 클릭하자 블루투스 스피커가 켜지며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랑 결혼해줄래~>

대한민국 사람들이 프러포즈용으로 많이들 사용하는 가요였다.

“…….”

“…….”

힘차고 밝게 결혼! 결혼! 외치는 노래와는 다르게 분위기는 다소 딱딱했다. 세아는 뺨을 굳힌 채 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한겸과 도하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상황을 이해한 남자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배가 뒤집어지도록 포복절도하는 한결의 모습에 세 쌍의 눈동자가 끔뻑끔뻑 그를 바라봤다.

“평생 이런 걸 볼 수 있다면 전 좋습니다.”

웃음기를 매달아 평소의 싸늘함이 사라진 아직 앳된 얼굴이 그녀의 뺨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가볍게 볼에 뽀뽀하며 세아를 꼭 안았다.

“처음으로 대답했으니 첫째 남편 시켜주실 겁니까?”

“……!”

“……!”

상황을 지켜보던 두 쌍의 눈이 세아에게로 향했다.

“우, 우리 넷 결혼할까요?”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발음을 씹고 짓이긴 끝에 연습한 말이 끝났다.

“그거 청혼 예물인데…… 한번 꼈으니 무르기 없어요.”

팔찌를 가리키며 새초롬하게 속삭이자 한겸이 튀어 올라 세아를 콱 끌어안았다.

“윽!”

거짓말 안 하고 배가 터질 뻔했다. 진지하게 내장의 안위에 대해 고민하는데 뜨거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쌍둥이 아니랄까 봐 어째 반응이 똑같았다.

뜨겁게 퍼붓는 숨결을 삼키자 눈앞이 흐려졌다.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소파에 나른히 기대 있던 도하가 몸을 아래로 숙이며 깍지를 꼈다. 조카에게 입술을 빨리며 할딱거리는 세아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오금이 조이고 질벽을 잘금거리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맹수의 앞발에 심장이 눌린 듯 기도가 컴컴해졌다.

“한결이의 짓입니까?”

“아, 그게, 흐읏!”

제 삼촌이 포악스럽게 굴든 말든 한겸은 신경 쓰지 않았다. 뭐라 변명하려는 입술을 가로챈 그가 얼얼하도록 입술을 빨았다. 입술은 하나인데 바라는 사내는 셋이니 죽을 맛이었다. 퉁퉁 붓도록 몰아치는 시위에 눈이 푹 감겼다.

도하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는 한결이 눈꺼풀 아래로 삼켜졌다.

“시작도 전에 이혼부터 생각했단 말이지…….”

그의 얕은 목소리도, 뻐근한 눈빛도 뽀글거리는 물거품에 먹먹하게 잠기어 귓가에는 닿지 않았다.

“하아. 하아…….”

숨이 막혀 울먹거리며 밀어낸 후에야 한겸이 떨어졌다. 입가를 빨며 쪽쪽거리던 그는 포식한 짐승처럼 숨을 나른히 몰아쉬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가가 어린애처럼 사랑스럽고 딱 그만큼 얄궂었다.

“당신의 입에서 먼저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사가 못 되어서 스스로 들어온 먹이를 놓아주진 않습니다.”

걸어온 도하가 세아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부드러이 붙잡았다.

“세아 씨는 지금 제 입안으로 기어들어 온 겁니다. 입을 닫고 삼켜서 평생 배 속에 품고 다닐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얀 손등을 상냥히 쓸고 짓누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훑어서 팔찌가 걸린 손목을 엄지와 검지로 움켜쥐었다. 고리가 넉넉하게 남을 만큼 그에게는 작은 손이었다.

“어…… 저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 아닌가요?”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갸륵하고 애잔한 것을 보는 눈빛이었다. 순식간에 시선을 흩트린 그가 손바닥을 그녀의 허벅지 위로 내리눌렀다.

“나는 당신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남자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해낼 겁니다.”

너무 뜨거워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했다. 농염한 손바닥은 허벅지 안쪽을 살그미 비비며 안쪽을 침식했다.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가지게 해줄 것이고 망가트리고 싶은 게 있다면 망가트려 줄 겁니다.”

“마, 망가트리다니요? 뭘…… 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다정한 당신은 제게 그런 부탁을 하지 않겠지요.”

어떤 의도도 없는 단순한 말이라며 그가 달콤하게도 웃었다. 북극성처럼 박힌 점이 꽃잎처럼 달게 이지러졌다. 혀끝까지 아린 농탕함에 눈도 아렸다. 질릴 정도로 색스러운 눈빛이었다.

그의 열기가 깊은 안쪽까지 범람해 노도처럼 휩쓸었다. 클리토리스가 타들어갈 듯 달아올랐다.

“아흣!”

그는 치마를 걷어 음부 모양을 그대로 드러낸 하얀 팬티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순백의 천이 음란하도록 짙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 각기 다른 좆물 세 개를 품고 살아야 할 겁니다. 걸어 다닐 때마다 질질 흐를 테니 수치스럽지 않으려면 이 안에 패드를 깔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여쁜 살갗은 매일 짓무를 것이고 당신에게 나는 냄새가 새큼히 진동할 겁니다.”

“하응! 자, 잠깐…… 자극이 너무, 강해…… 서! 아앙!”

위로 향한 그의 엄지가 빠르게 흔들렸다. 탱글탱글한 살성에 화인이 찍혀 짓물렀다. 보드라운 천이 거칠게 변했고 쓸리는 촉감이 자극이 되어 허벅지 안이 파르르 떨렸다. 조카들의 손이 좁혀드는 무릎을 당겨 삼촌 앞에 그 음란함을 드러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당신의 안에 싸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 다를 겁니다.”

쉬이. 그가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를 절정으로 내리쳤다. 충격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안쪽에서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고였다.

“당신은 임신을 해야 해요. 그것이 누구의 아이든 우리의 아이가, 그리고 내 아이가 될 겁니다. 나는 온유한 아버지가 될 것이고 다정한 남편이 될 겁니다.”

“도, 도하 씨! 나, 이대로는…… 아앙!”

“당신은 그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팬티를 걷어낸 그가 손톱으로 클리토리스 사이의 얕은 구멍을 후볐다. 감각점이 여럿 모인 예민한 살점이 젖어 들며 그녀의 허벅지가 뒤틀렸다. 침입을 환영하듯 빠끔히 열리는 그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모순된 말을 했다.

“그래도 내게 오겠습니까?”

자신감 넘치던 조금 전의 말과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그녀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자신하는 사람이었다.

이상했으나 감전된 듯 따끔한 충격과 함께 내벽에서 음액이 울컥 흘렀다. 그녀는 허벅지를 쫙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아아앙!”

“고민해 봐요.”

쾌락이 들이닥쳐 정신없이 신음하는 입술을 핥아주며 그가 속삭였다. 달콤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손은 이미 절정에 내달리는 몸을 거침없이 비볐다.

동공이 흐려진 그녀가 히끅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제발, 도하, 하앙…… 씨이이잇! 사, 살려……! 아앙! 그…… 그만!”

울며불며 애처로운 입술이 그의 어깨에 한참 비벼지고 나서야 그가 그녀를 놓아줬다.

“천천히 신중하게.”

진한 탈력감에 털썩 엎어지려는 몸을 받치며 그가 속삭였다.

음부를 토닥거리는 뜨거운 손은 그녀의 대답이 무엇일지 이미 자신한 것 같았다. 학습된 쾌락이 잘금잘금 몰려와 질구를 반복적으로 조였다.

안을 파고들어 갈고리처럼 휘는 손목에는 그녀가 선물한 팔찌가 잘랑거리고 있었다.

* * *

청혼은 세아가 했는데 생각할 시간은 또 그녀에게 주어졌다. 상황이 이상해져 버렸다.

「제 부친은 결혼으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저를 도와주기 위해 그 관계를 결정한 거라면 끝까지 책임져주세요. 임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아이를 가져주셔야 합니다.」

임신이라니.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 그들이 그동안 피임을 너무도 철저하게 해서 그랬다.

「셋이서 퍼부어대다 마를 날이 없을 겁니다. 누구의 아이든 결혼식 전에 배태될지도 모르죠. 당신이 선택하는 순간부터 피임 같은 건 더는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셋 중 누구의 아이라도 상관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의 말처럼 세아는 천천히 신중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민이 깊어져 보름을 넘겼다. 그 중 누구도 어서 대답을 하라 재촉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압박이 커졌는지 도하가 바빠지는 날이 많았다.

이런 식이라면 폐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할 무렵에 ‘그 여자’가 찾아왔다.

“유세아 씨, 팀장님 호출입니다.”

“팀장님이요?”

“예. 회의실로 오시랍니다.”

짐작 가는 일은 없었지만 상사의 말을 이유 없이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세아는 뭘 잘못했던가 고민하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팀장님, 저…….”

“아! 유세아 씨가 왔군요. 그럼 편히 말씀 나누시고 가세요.”

꼿꼿하게 굴던 팀장의 허리가 절반 이상 구부러졌다.

‘몸이 접히겠네. 접히겠어.’

팀장 앞에 앉은 여자를 본 세아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하와는 다르게 얼굴을 내놓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들을 찾아보며 자연히 본 얼굴이었다. 어떤 낯짝인가 궁금해서 더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이진희. 이한텔레콤의 사장이자 이진철 회장의 맏딸로 첫 아이의 탄생에 몹시 기뻐한 이진철 회장이 이름의 일부인 ‘진(進)’을 물려준 여자였다.

“앉으세요. 난 누가 날 내려다보는 건 질색이라.”

그녀는 턱을 까딱여 옆의 의자를 가리켰다. 남의 회사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꼰 채 흘긋 바라보는 눈동자가 쌀쌀했다. 좀 더 표독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상상했는데 냉정하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쌍둥이와 닮은 데다 둘 중 한결과 분위기까지 흡사했다.

“저…….”

“내가 누구인지는 알 거고 나도 당신을 알고 있으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나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앉아.”

쌍둥이의 친모이니 세아에게도 엄마뻘이었지만 오만한 말투와 다짜고짜 시작하는 반말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제 회사에는…… 무슨 일이시죠?”

그러나 거대한 기업을 좌지우지하려는 사람답게 강력한 여성이었다.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운 세아는 기가 살짝 죽을 만큼 살갗이 아리기도 했다. 그녀는 진희 앞에 놓인 컵을 흘긋 바라보며 움찔했다.

‘설마 저걸 뿌리지는 않겠지?’

예의상 받은 건지 마신 흔적은 없었다. 립스틱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컵의 표면이 반들거려서 매번 앉는 의자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분수에 넘치는 먹이를 삼킨 개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

“체하는 거로는 끝나지 않아요. 내장이 터져 죽을 겁니다. 멍청하게 배가 부른 것도 모르고 꾸역꾸역 먹이를 삼켜보려다가 구린내를 풀풀 풍기며 더럽게.”

“…….”

“가타부타 말하지 않겠어요. 주제넘게 설치지 말고 조용히…… 살아요.”

그녀가 몸을 낮추어 얼굴을 가까이 기울었다.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유혹하는 것처럼 달콤했고 그 얼굴에서는 주름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깨를 짚고 뺨을 톡톡 두드린 손이 어린애를 어르는 것 같았다.

“진부하네요.”

“뭐?”

“당신의 표정, 말투, 행동…… 기시감이 느껴져요. 어디서 본 거 같다고 할까요?”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인지 진희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길을 걷다가 비둘기똥을 맞은 듯한 얼굴은 그녀가 아는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 이진희는 별개의 개체였다.

“이다음에는 봉투라도 내밀 생각이었나요?”

진짜였는지 진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네요. 이한텔레콤 사장님께서 제게 얼마를 주실지.”

“원하는 게 있으면 확실히 말해. 감히 흥정하려고 들…….”

“아니요. 흥정할 가치가 없는 문제에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세아는 진희의 말을 끊고 일어났다.

“앉아!”

진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세아는 무시하고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눈을 생긋 휘며 웃었다.

“당신이 무엇을 주든 이한 전부를 받는 것보다는 못할 텐데. 아. 도하 씨랑 부부면 그 반이려나?”

“너!”

진희가 책상을 탕 치며 일어났다. 단단한 책상이 휘청거릴 만큼 거센 기세였다. 머리채라도 잡을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가 질겁하게 했다.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세아의 떨리는 손이 문고리 위에서 몇 번 미끄러졌다.

달칵. 빙글빙글 돈 은색 문고리가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내쳐버렸다. 세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바닥을 옷자락에 쓱쓱 비비고 다시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

문을 열고 나가려던 세아가 배시시 순하게 웃으며 진희를 돌아봤다.

“개가 그렇게 좋으면 당신이나 개새끼처럼 살아요. 난 인간이니까.”

할 말만 하고 문을 재빨리 닫았는데 안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안색이 창백해진 세아는 토굴을 파는 토끼처럼 깊은 안쪽으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살려줘요.」

메시지 창에 떠올랐던 말은 금방 지워졌다. 세아는 엄지를 다다닥 움직여 그 말을 지운 뒤에 천천히 다시 썼다.

「우리 결혼해요.」

땀이 밴 손가락이 미끄러졌지만 숨을 헐떡헐떡 쉬면서도 메시지를 보냈다.

틱!

전송이 된 메시지를 눈으로 훑어본 세아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졌다.

무릎에 얼굴이 닿도록 쭈그려 앉아 있다가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주변을 경계했다. CCTV와 보안요원이 사방에 깔린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본 게 뼈를 산 채로 뜯어 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오금이 저리고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세아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걸 알고 있었다. 진희는 진심으로 살의를 담아 무서운 거지만 그의 눈빛에는 애정이 바탕에 깔렸음에도 깨진 도자기처럼 아찔했다.

이진희는 촉매제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세아는 충동적인 결정으로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엇을 꿰뚫을지 몰라 화살의 시위를 당기지 못했을 뿐이다.

움직인 건 마음이었다. 그녀가 ‘개’를 언급할 때 그들이 생각났다. 거기서 밀리면 그들 또한 같은 취급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도하와 세아는 ‘주제넘게 탐식한 개’가 될 것이고 한겸과 한결은 ‘고작 그딴 걸 위해 배신한 개새끼’가 될 것이다.

그녀의 말투 하나하나가 세아를 자극했다. 독한 말본새로 누구를 할퀴었을까 하여서.

“은근히 열 받더란 말이지…….”

그들을 좋아한다. 같이 살기를 원했다. 얼마나 고민하든 같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늪지대 위였다. 그러니 더 시간을 끌지 말고 나아가야 했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잉!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셋 모두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는데 가장 먼저 반응이 돌아온 건 도하였다.

“여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회사예요.”

「정확히.」

세아는 의아해하면서도 13층 복도 끝에 있다고 알려줬다. 잠시 뒤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도하가 걸어 나왔다.

“도하 씨?”

“이진희와 전 서로가 서로를 스토킹하는 사이라.”

그는 농담처럼 말했으나 꼼꼼한 시선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그녀를 살폈다. 진희가 세아를 찾아온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턱을 빠듯이 들어야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긴장이 툭 풀렸다. 그는 마치 거대한 거목 같아서 그림자에 숨어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도 피식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저를 찢어 죽일 기세시던데.”

“설마.”

하긴.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이기야 할까. 영화를 많이 보긴 했다고 그녀가 생각할 때였다.

안심하여 배싯거리는 뺨을 도하가 가만히 바라봤다. 진희가 아니라 도하가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진실은 그렇게 파묻혔다.

“갑시다.”

“네? 어디를요? 아직 회사 끝나려면…….”

“어느 회사가 감히 제 약혼녀의 조기 퇴근을 막겠습니까.”

담백한 어조에 갈비뼈가 부풀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신데렐라가 된 기분? 지금껏 세아는 그들이 주는 어떠한 것도 과하다면서 받지 않았다. 물질의 가격만 두고 따지자면 그들이 준 것보다 세아가 사준 팔찌가 더 과할 것이다.

“뭐랄까…… 로또 1등에 당첨된 기분이네요.”

“제가 고작 로또입니까?”

그딴 게 자기랑 비교가 되겠냐는 듯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짓궂게 꾸민 행동이었으나 세아는 진심으로 얼이 빠졌다.

도하의 자산이 얼마쯤 될까. 몇십 억에 불과한 복권보다는 훨씬 클 게 분명했다. 그와 맞잡은 손이 묵직해졌다. 살짝 부담스러워지려는 그녀에게 도하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세아 씨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 생활을 누릴 겁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뺨에 입술을 달콤하게 비비며 앞을 바라봤다. 내리깐 눈에 음영이 져 오싹했다. 가까이 자리한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렸다.

“어머. 어머.”

“저 사람…… 이도하 아니에요?”

“이도하?”

“이한 전자 상무 말이에요!”

그때, 꼭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절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적했던 13층 복도가 사람으로 우글거렸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햇살의 줄기처럼 무수히 쏟아졌다.

“상무님, 1층에 차 대기시켜놓았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 여럿이 다가와 도하와 세아 주위를 감쌌다. 시선은 차단되었으나 그 열렬함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뭔가 하여 당황한 세아의 손을 붙잡으며 그는 속살거렸다.

“누구도 위협할 수 없어요. 당신은 모든 걸 가진 사람일 겁니다. 평화로운 가정, 잘난 남편, 넘치는 부, 지독한 쾌락까지.”

눈매 위로 사르르 떨어지는 머리칼을 섹시하다고 생각한 순간, 아. 안이 저릿해서 괴로웠다.

등을 돌린 경호원으로 꽉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가 입을 맞췄다. 쭙쭙거리며 탐욕스레 입술을 빠는 소리에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았다.

“흐……!”

“쉿.”

그의 숨결이 앞머리를 날리며 입속으로 빨려왔다. 혀뿌리를 긁는 간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뒤로 빼자 차가운 엘리베이터 벽이 하부를 야릇하게 쓸었다.

그의 입술이 소리를 꽉 막았다. 붉은 살점만 잘금거리며 애액을 울컥 흘려보냈을 뿐.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당장 그의 것에 처박혀 흔들리고 싶었다.

* * *

결혼이 이렇게 쉬운 것인가 싶을 정도로 일처리가 빨랐다.

이한전자 상무 이도하와 결혼하게 된 세아에 대한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고 그녀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라는 게 알려졌다. 신데렐라니 뭐니 말들이 많았지만 세아에게 큰 타격은 없었다.

도하는 세아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갔고 염려하는 부모님을 반나절 만에 바꿔놓았다. 아버지는 딸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고 어머니는 딸을 사랑해주는 도하의 모습에 감격한 듯 눈시울이 계속 붉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상견례도 문제없이 지나갔다. 생각 외로 이진철 회장이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았다. 쌍둥이의 말처럼 도하가 그간 여자를 너무 만나지 않아 여자라면 다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진철 회장이 허락하자 이진희 사장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씨근덕거리며 세아를 노려보고 눈으로 협박하는 정도였다. 살벌했지만 그 정도야 식은땀 몇 번 흘리며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내막은 따로 있었다.

“어떻습니까, 도사님?”

도사. 이진철 회장은 자신만큼이나 늙은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아니. ‘님’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여가며 정중히 모셨다.

세아와 도하는 그 도사님이라는 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었고 도사는 방울을 잘잘 흔들며 두 사람을 쏘아봤다.

“흐음…….”

그런데 아무래도 저 방울 진짜 금인 것 같았다. 순금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빛깔이 ‘나 금이오’ 소리치고 있었다. 저렇게 큰 방울은 몇 돈이나 될까 소시민다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태기가 보이네!”

도사가 방울로 세아의 몸을 탁탁 치며 소리쳤다.

노인의 힘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놀라고 당황스러워 펄쩍 뛰자 도하가 두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왠지 도사라는 노인의 눈동자가 찔끔 떨렸고 방울은 황급히 세아를 피해갔다.

“아들일세!”

도사가 턱수염을 거듭 쓸며 외쳤다.

“아아! 역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사님!”

놀라운 건 이진철 회장이었다. 이제 세아의 시아버지가 될 그는 도사의 두 손을 꼭 붙들고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열렬했다.

칠순을 넘어 망팔(望八)의 이진철 회장은 병에 걸려 캑캑거리는 목소리로 목이 쉬도록 외쳤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 같아서 솔직히 너무도 무서웠다. 그 희끄무레한 뿌연 눈동자가 세아의 배를 빤히 바라봤다.

“귀한 씨이니 소중히 지키거라.”

그가 자못 너그럽게 속삭였다. 도하가 얼어있는 그녀의 손등을 두 번 토닥였다.

“……네.”

엉겁결에 대답하자 주름진 얼굴이 히죽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다시 도사에게 매달렸다.

“첫 친손자가 태어나기만 하면 저는…….”

“아버지.”

병든 음색으로 뭐라고 속삭거리던 귀신같은 얼굴이 도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곧 씩 웃으며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는 몹시 너그러웠다. 원하는 걸 얻게 되어 흡족한 것 같았다. 장지문을 열어 빠져나가는 세아의 뒤로 잘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풍랑처럼 흔들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 도하의 얼굴이 온기를 잃고 싸늘해졌다.

“어…… 높은 분들일수록 종교에 많이 의지한다고 하더라고요. 머리 아픈 일은 많은데 고민을 털어놓을 곳이 달리 없으니까요.”

“예. 몸도 안 좋으신데 도사님 덕에…….”

도사님. 그렇게 발음하는 입꼬리가 미려하게 올라갔다.

“일선에서 물러나시고 건강관리에 전념하시게 되었으니 참 다행입니다.”

극진한 효자처럼 단정한 얼굴로 웃었다.

그가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정한 얼굴은 계속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세아 씨.”

“네?”

“안아 봐도 됩니까?”

연약하게 물든 얼굴이 간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긴 했지만 길 잃은 아이 같은 그를 거부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키와 체격의 차이 때문에 그녀가 매달린 형태였지만 체온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포근한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꼭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 겁니다.”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세아는 재미있는 말을 들은 것처럼 깔깔 웃다가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게 숙제라도 된 것 같네요. 부담스러워요?”

“그냥……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제가 미칠 것 같아서.”

“응. 나도 도하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감읍한 눈동자가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고 빛났다. 그가 세아의 입술을 핥으며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해요.”

세아는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서로 노력할 것이다.

질척하게 옮아 붙었던 스산한 방울 소리가 서서히 흩어졌다.

* * *

이진철 회장은 젊었을 때부터 색욕이 많았다. 그간 무수한 여자들이 그를 지나쳐갔다. 그러나 그의 아이를 배는 여자는 없었다. 괜한 분란을 막으려고 질외사정을 선호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완전한 피임이 되지 못한다는 건 알았기에 그는 가끔 초조해졌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부부관계를 활발히 해도 5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다. 한시바삐 후계를 가져야 했던 이진철 회장은 병원을 드나들다가 그쪽으로 용하다는 도사를 찾아갔다.

도사는 이진철 회장에게 부적을 써주었고 부인의 배에 첫 아이가 배태되었다. 이진철 회장은 크게 기뻐하며 그때부터 도사를 신봉하게 되었다.

도사의 사당을 만들어주고 값비싼 재물을 안기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에 보답하듯 둘째가 생겼다. 그런데 둘째 또한 여자였다.

아들을 원한 이진철 회장은 다시 도사를 찾았고 도사는 여러 여자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며 이진철 회장의 바람을 권유했다. 그렇게 10년을 도사의 말에 따랐지만 바깥으로 나도는 남편을 못 견딘 첫째 부인만 화병으로 죽었다.

「회장님께 딱 맞는 터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난 이진철 회장에게 도사가 내민 건 그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하청업체 사장의 딸 사진이었다.

이진철 회장은 도사의 말을 미심쩍어하면서도 하청업체 사장을 협박하여 그 딸과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도하의 생모인 최수진이었다.

수진은 얼굴 몇 번 본 게 다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이진철 회장의 성격이 잔혹하여 그녀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회사의 명운이 그에게 달려 있어 반항하지는 못했다.

원하지 않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그녀는 시들어갔지만 결혼 생활 1년이 지나지 않아 도하가 생겼다.

이진철 회장은 도하의 탄생에 기뻐하며 그녀가 또 다른 아들을 낳아주기를 재촉했다. 도사가 그녀만이 그의 아들을 낳아줄 수 있다고 일러줬기 때문에 그는 결코 수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은 폭력이었다.

수진은 말라가고 지쳐갔다. 남편에게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렸다.

「쓸모없는 년. 하나라도 낳아서 다행이지.」

어렸던 도하는 도사가 수진의 영정사진 앞에서 지껄인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나이는 어렸어도 사리 분별은 가능했다. 그는 도사와 이진철 회장에게 섣불리 반발심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만 그것들을 삼켰다. 말 잘 듣는 똑똑한 아들로 사는 건 그에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도하를 가르친 선생들은 앞다투어 그를 칭찬했고 그가 천재라며 추켜세웠다. 이진철 회장은 그에 흡족하여 아들만 감싸고 돌았다.

「서한겸! 서한결! 엄마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이도하를 이기려면 이거론 어림없다고 했지!」

그것이 이진희의 열등감을 자극하여 조카들에게 영향을 끼친 건 맹세코 그가 바란 일이 아니었다. 이진철 회장만큼이나 성정이 잔인한 이진희는 어린 아들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원하는 성적에 못 미치면 화를 냈고 종종 손찌검까지 했다.

「아버지. 한겸이랑 한결이도 이번 기회에 조기 유학을 보내면 어떨까요?」

도하는 수진을 대놓고 면박하던 진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쯤은 엿먹어보라는 심정으로 쌍둥이를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 회장이 허락한 이상 이진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집에서 셋이 산 게 문제였는지 동질감 탓인지 그는 어린 조카들이 매달리는 걸 뿌리치지 못했다.

셋이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 결속력이 너무도 단단하여 누구도 그 틈을 비집을 수가 없었다. 이진희는 길길이 날뛰며 쌍둥이를 핍박했지만 그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삼촌을 따랐다. 이 회장은 내심 그것에 흡족해하며 은근히 도하의 편을 들어주었고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어리고 무력했던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덩치가 커졌고 할 수 있는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즈음 이진철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어 상당한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도하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으아아악! 그만해! 나, 나는 잘못 없어! 다 이진철 회장이 한 짓이야! 나는 그냥 조언해준 것밖에 없다고! 멋대로 믿은 건 그놈이라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늙은 도사를 지하 공장으로 끌고 가 가둔 일이었다. 이진철 회장이 병원에 있을 때를 노린 계획적인 범죄였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사의 자백을 받아냈다.

한몫 단단히 잡아보려고 내뱉은 말이 우연히 맞아들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연이었다. 도하는 사기꾼의 세 치 혀를 이용해 사기꾼의 말을 믿고 수진을 망친 아비를 똑같이 망가트려 놓았다.

이진철 회장은 말도 안 되는 민간요법을 신뢰하며 차츰 병세가 악화되었다. 몸에 절대 칼을 대서는 안 된다는 사기꾼의 말을 그대로 믿은 탓이었다.

그러나 시시했다. 사기꾼의 몸을 지져도 아버지의 정신을 망가트려도 텅 빈 것처럼 충족되지 않았다. 허무했다.

그를 아득바득 기어오게 했던 것의 진실이 고작 그따위라는 데 분노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이 역겨웠고 현실이 지긋지긋했다.

차츰 삶의 흥미를 잃어가는 그의 눈에 띈 것이 세아였다.

「선물이에요, 삼촌.」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성기를 꽂은 음부가 새빨갛고 탱글탱글한 속살을 찌걱거리는 모습. 안이 잘근거리며 성기를 씹을 때마다 뒷골이 얼얼하고 뺨이 얼얼했다.

이진철 회장이 어머니의 몸을 강제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는 그 일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했다. 아침 발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여성의 생식기를 보는 순간 혐오가 치밀어 발기가 되지 않았다.

그날, 그가 느꼈던 흥분감 때문이었다.

역겹게도 그는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고 좆을 세운 후레자식이었다.

그 죄악의 굴레가 평생 남아 올무를 씌웠다. 평생 섹스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같은 순간, 살려달라고 비는 여자를 보며 성적 흥분을 느꼈다. 그 충격에 아주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다. 그토록 경멸했음에도 결국 또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토악질이 났다.

도하는 당장 자신의 좆도 자르고 여자를 강간한 조카의 것도 자르겠다고 결심했다. 몸을 좀먹은 환멸이 이성을 까맣게 태웠다.

「몇 번을 말해요! 합의! 합의했다고요!」

그러나 여자는 그 순간이 좋았다고 말했다. 남자 여럿에게 엉망으로 당해 눈물을 질질 흘린 주제에 음부도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정액이 아니라 음액으로 질척거리던 안쪽의 살성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떠올랐다.

각인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 안이 궁금해서 여자가 스스로 벌려준다면 찔러 넣어 보고 싶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쫀득거릴지 불꽃의 색만큼이나 뜨거울지 상상하게 됐다.

여자는 세 남자와 함께하는 섹스를 먼저 제안하며 그의 삽입을 허락했다.

「기분이 정말…… 읏! 좆만 남은 것 같네요. 요도에 심장을 단 것 같습니다. 뜨겁고…… 조여…….」

1kg이나 될까 싶은 살덩이. 검붉고 음란한 빛깔이 흘렀으나 타고나기를 더러워 그렇지 20년 넘도록 자위 한 번 안 해본 것이었다.

존재의 의미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것이 그 순간 자기주장을 격렬히 하며 뇌를 이겼다. 뇌가 사라지고 뼈가 사라지고 피가 사라졌다. 오직 그 살덩이만 흉측하게 꿈틀거리며 그 안을 후볐다.

차지게 달라붙는 살갗을 피가 나도록 헤집고 처박아 망가트리고 싶다는 거친 충동에 꽤 험하게 다뤘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는 싫다는 말 대신 울부짖으며 흔들렸다.

새벽을 지새운 밤이 끝나고 여자가 실신하듯 잠든 뒤에야 그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낯선 여자, 아니, 세아가 그의 비밀 일부를 훔쳐 갔으나 가당찮았다. 겨우 그깟 거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룻밤?」

「소위 원나잇이라고 하지? 누나는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더러운 피에서 난 개새끼들의 집요함을 모를 세아가 가여웠다. 그러나 망가트리지 않고 소중히 대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으나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새장에 가두되 그것이 투명하여 세아는 알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약삭빠르게 굴려 해도 결국 천성이 선한 세아는 금세 동정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만큼 공을 들이고 소중히 아꼈다. 그 마음이 흘러들어와 강물에 뒤섞여 더 이상 건져내지 못할 때까지 몰아갔다.

「우리 결혼해요.」

사냥감을 기다리며 침식해 있던 괴물 셋이 강으로 빨려 들어온 희생양의 목과 양다리를 각각 하나씩 물어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하으응! 하으, 아앙!”

지금도 그렇다.

도하는 이제 홀로 세아에게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가장 흥분하는 건 다른 남자의 성기에 박히는 세아에게 박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수컷이 채워진 것에 제 성기를 파묻는 일이 그를 더욱 고취시켰다.

남자 하나보다 여럿이 나은 건 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럿이 동시에 애무하는 쾌락. 온몸 곳곳이 혀와 성기로 채워지는 지독한 늪. 그녀는 결코 먼저 발을 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네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또 어떨 것인가. 싸우며 발악하는 단둘의 부부보다는 넷이라도 화목한 그들이 나았다.

도하는 한겸과 한결에게 둘러싸여 자지러지는 세아에게 다가갔다.

“도, 하……! 흐읏!”

“당신은 기쁘게 즐기면 됩니다. 아무 걱정도 할 것 없어요.”

그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사슴처럼 우미한 목덜미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다. 그의 엄지만 한 블루 다이아몬드 다섯 개가 세공되어 길게 늘어진 무거운 것이었다.

맨몸에 목걸이 하나만 걸친 모습이 아름다웠다. 도하는 조카들의 정액으로 부글거리는 밀지를 황홀하게 바라보며 성기를 들이밀었다.

“사랑합니다. 세아.”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쇠사슬처럼 덜그럭덜그럭 흔들렸다. 그러나 모난 곳 없이 아름답게 가공된 백금 테에 물린 다이아몬드들은 결코 하얀 목에 상처를 내지 않았다.

“흐아아앗, 조흐, 아! 조, 아! 아앙!”

해가 동터 오고 있었다. 세아는 수컷 셋의 정액냄새를 질질 풍기며 식장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황홀한 정경에 도하의 눈가가 달아올랐다. 그는 개처럼 흘레붙어 안쪽의 살갗을 철퍽철퍽 쳐대며 난잡하게 허리를 놀렸다.

최고의 결혼식이었다.

EN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