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19화 (완결) (219/219)

0219 / 0219 ----------------------------------------------

영원한 낙원

[218]

결국 두 사람이 방을 나선 것은 해가 다 떨어져가는 저녁 즘이었다.

“ 오늘은 결국 아무것도 못했어요……. ”

“ 아예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하셔도 되는데요. ”

“ 방에 있어봤자 어차피 못 쉬는걸요. ”

허리를 더듬는 크리스의 손등을 찰싹 쳐내고, 아리스텔라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여신의 권능을 얻은 덕분에 아무리 격렬하게 몸을 섞어도 금방 회복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 한정일 뿐이다.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몸을 겹쳤는데, 인간인 크리스 쪽이 그녀보다도 훨씬 쌩쌩했다.

“ 크리스는 회복이 잘 되는 체질인가……? ”

“ 밤까지 세 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 지금 나를 죽일 셈이냐 」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작 섹스 몇 번으로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아니까 할 수 있는 항변의 말이 줄었다. 오히려 크리스의 복상사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리스텔라가 거부하자 더는 허리를 만지지 않았지만, 크리스는 여전히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서 걸었다.

“ 조슈아에게 부탁한 게 다 끝났을지 모르겠네요. ”

“ 아, 낮에 끝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성녀님께서 주무시고 계셔서 말씀을 못 드렸지만요. ”

“ 네? 그럼 제가 일어났을 때 말했어야죠! ”

“ 말했으면 저를 위로해주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

그녀의 시종은 참으로 뻔뻔했다. 아리스텔라가 흘겨보면 불쌍한 척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긴 하지만, 사실 크리스가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알고 있을 뿐이다. 이제 아리스텔라는 더 이상 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 아무튼, 그럼 빨리 가요. ”

아리스텔라는 걸음을 서둘렀다.

◇ ◆ ◇ ◆ ◇

요즘 그녀는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연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식물의 생장이 빠른 신전의 토지를 이용해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그것을 수확하는 일지를 적는다. 날씨, 온도, 습도에 따른 수확량과 작물의 상태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책으로 엮은 다음, 물자를 나르는 무인 마차에 그것을 실어 교황청으로 보낸다.

그러면 교황청에서는 클로비스를 통해 농작물의 재배법을 정리한 서적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서적은 모두 무상으로 제공된다.

어차피 영주인 그는 영지민들이 수확한 작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받으니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 덕분에 밖에서는 성녀님이 농사의 여신으로 불리고 있다던데요. ”

“ 농사는 생활의 근간이잖아요. ”

“ 미의 여신이라든가, 온화함의 여신이라든가, 뭐 그런 수식어가 붙을 수도 있는데 농사의 여신이라니……. 전 마음에 안 든다고요. ”

크리스는 바깥의 백성들이 아리스텔라에게 붙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 이것만은 정정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생명이 있는 것들은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 같아서 기뻐요. ”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사제나 성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세 끼 식사를 했다. 단식기간에는 금식했지만,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먹지 않아도 생존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아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일 때의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몸에도 해당이 되는 일일 테니까.

◇ ◆ ◇ ◆ ◇

“ 성녀님, 오셨군요. ”

“ 조슈아! ”

도서관에 도착하자, 조슈아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새로 만든 듯한 하얀 책장에는 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항상 같은 책을 두 권씩 만든다. 하나는 신전에 보존하고, 다른 하나는 교황청에 보냈다.

“ 완성한 거예요? ”

“ 예. 취급법이 까다로운 약초를 제외하고 나니 양이 그리 많지 않더군요. ”

이번에 조슈아가 새로 정리한 책은 약초학을 기반으로 한 실용의학서였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아파도 의사를 찾아가기 어려웠다. 되는대로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물어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고는 했지만 치료가 잘못되어 죽는 아이들도 많았다. 아리스텔라의 동생인 프란시스도 어릴 적 약초를 잘못 먹고 죽을 뻔했다.

“ 정말 알기 쉽게 정리했네요. 그림도 이렇게……. ”

“ 이 책을 읽을 평민들은 학식이 그리 높지 않을 테니까요. 어려운 단어는 최대한 배제하고, 알기 쉬운 용어로 정리했답니다. ”

“ ……미안해요, 조슈아. ”

“ 예? ”

“ 당신이 이렇게 많은 지식을 얻기까지 힘들었을 텐데, 남들과 공유하라고 해서……. ”

평생을 연구에 매진해온 그가 알아낸 수많은 지식을, 책으로 정리하여 남들이 알기 쉽게 하는 것은 어쩌면 불공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오랫동안 힘들여 연구한 결과를 다른 이들은 너무 쉽게 손에 넣으니까.

“ 성녀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저의 큰 기쁨입니다. ”

조슈아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 저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다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죽은 상념일 뿐이죠. ”

“ 조슈아……. ”

“ 전문용어로 정리한 책을 한권 더 만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이것도 함께 교황청으로 보낼 수 있을까요? 이쪽은 학자들에게 보이고 싶어서요. ”

“ 아, 물론이죠. ”

가죽끈으로 튼튼하게 엮은 약초학 서적 위에, 얇은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여섯 개 더 얹어졌다. 아리스텔라는 서적 뭉치 위에 보존마법을 걸고, 크리스는 그것을 무인 마차에 실었다.

“ 작물재배법이랑 약초학은 완성이 되었는데……. 검술과 승마에 대한 책은 언제 완성될까요? ”

“ 에녹과 노엘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검술이나 승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까요. 성기사들의 시범을 본다고 그대로 풀어 적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

성기사들에게 기록을 맡기기 불안하다는 말에 에녹과 노엘에게 그들의 연습을 관람하고 기록하라고 하긴 했지만, 아마 지금은 두 사람도 자신들이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기록을 위해서는 두 사람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쌓지 않으면 안 되니까.

덕분에 에녹은 팔자에도 없는 목검을 들고 검술을 배우고 있고, 노엘은 승마를 배우다가 낙마할 뻔했다고 들었다.

“ 내일쯤 두 사람을 살피러 가야겠네요. ”

“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에녹은 상당한 노력가이고, 노엘도 보기보다는 책임감이 강하답니다. ”

“ 보기보다라니요……. ”

노엘에 대한 주위의 평가가 썩 좋지 않은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아리스텔라는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노엘도 그녀를 따르는 사제인데, 동료 간에 평판이 좋지 않아서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 안 되겠어요. 오늘 보러 갈래요. ”

“ 성녀님. 이제 해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만. ”

“ 성기사들은 밤까지 훈련을 하던걸요. 그러니까 에녹도 노엘도 아직 있을 거예요. ”

아리스텔라가 도서관을 나오자 이미 하늘이 어두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시간에 찾아가면 다들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그래도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

슬슬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대답을 좋아하는지도 파악한 그녀는 기사단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 ◆ ◇ ◆ ◇

“ 성녀님! ”

“ 늦은 시각에 미안해요, 케인. 에녹과 노엘은 안에 있나요? ”

“ 예. 지금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불러오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들어가서 이야기할게요. ”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보러온 것이지만 벌써 일이 끝났다고 하니, 기사단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분위기라도 파악하고자 아리스텔라는 안으로 들어갔다.

“ 밤늦게 미안해요. 오랜만에 다들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

“ 허억, 성녀님! ”

생긋 웃으며 인사하자, 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성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열을 맞추었다.

“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

“ 편하게 있으세요. 훈련 구경하러 온 게 아니니까.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려 에녹과 노엘을 살폈다. 에녹은 복장이 땀에 젖었을 뿐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지만, 노엘은 바닥에 누운 상태로 안타깝게 아리스텔라만 부를 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 노엘, 괜찮아요? 많이 힘들면 치료마법을 써줄까요? ”

“ 허억, 감사, 합니다……. ”

“ 어라, 아까 에녹 사제님이 해준다고 할 때는 안 듣더니만. ”

성기사들이 노엘을 보고 핀잔을 주었지만 힐난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행히 미움 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아리스텔라는 노엘에게 회복마법을 걸어주었다.

어느새 마법에 능숙해진 그녀에게 더는 마법 스승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노엘은 성녀의 전(前) 스승으로서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현재의 평가는 그 대우를 포함한 것이라는 점이 문제지만.

“ 내가 시킨 일이긴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당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급하게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니니까. ”

“ 예……. ”

노엘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실 그가 서두르는 것은 공을 세우기 위해서도, 성기사들에게 얕보이는 것이 싫어서도 아니다. 성녀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여신 위그멘타르가 해방되어도 신의 권능을 나누어받은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그들의 여신이었다. 사제와 성기사에게 여신의 은총을 받는 것보다 영광된 일은 없었다. 그것은 성녀가 신전의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노엘은 성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 하지만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 노엘. ”

“ 저는 당신의 종이니까요. ”

크리스가 훌쩍 커버린 탓일까, 노엘 쪽이 분명히 연상인데도 동글동글한 인상 덕에 지금은 신전에서 가장 막내처럼 보인다.

아리스텔라는 오늘도 열심히 일한 자신의 종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 고마워요, 노엘. ”

“ 성녀님! 그런데 사실 일은 제가 더 많이 했습니다만! ”

“ 아뇨, 접니다! ”

뒤에서 성기사들이 항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텔라는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알았어요, 알았어! 다들 해줄 테니까 소란 피우지 마세요. ”

아리스텔라는 결국, 연무장의 성기사들 모두에게 축복을 나누어주어야 했다.

end.

============================ 작품 후기 ============================

후기는 천천히 올라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