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8 / 0219 ----------------------------------------------
영원한 낙원
[217] 영원한 낙원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로부터 신의 권능을 일부 나누어받아,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신전을 작은 낙원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머무는 신전은 이제 더 이상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 」이 아니었다.
그곳은 「 아리스텔라 신전 」이 되었다.
여신 위그멘타르와 분리되어도 아리스텔라의 신성은 조금도 고갈되지 않았다. 애초에 성녀로 태어나는 여인들은 여신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신성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녀의 압도적으로 풍부하며 정순한 신성력은 그녀 고유의 것이다.
「 그곳에서는 진실로,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란다. 」
따스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이던 것은 헤시우스였을까, 위그멘타르였을까.
이미 성녀가 되어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아리스텔라는 갓 태어난 아기 신과도 같았다. 남편과 아내이면서 일심동체인 그들과는 달리 홀로 온전한 신이었다. 비록 그녀의 권능이 그들처럼 온 세상에 미치지 않을 뿐, 이 작은 낙원―기실 신전의 규모는 어지간한 도시 하나에 이르는 규모였지만―에서 그녀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절의 흐름도 날씨도 기온도 그녀의 뜻을 따랐다. 하늘이 이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녀 아리스텔라의 신전은 그녀가 원할 때가 아니면 비나 눈이 내리지 않고 늘 맑은 날씨를 유지했다.
◇ ◆ ◇ ◆ ◇
“ 편안해……. ”
오수를 즐기고 일어난 아리스텔라는 기지개를 켜면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옆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던 크리스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 장마 때는 습기 때문에 눅눅하고 기분이 나른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서 좋네요. ”
“ 남쪽 탑 뒤에 일군 밭에는 비가 내리고 있던데요. ”
“ 식물이 자라는 데는 물이 필요하니까요. ”
생긋 웃으며 눈을 감자, 크리스는 그녀의 눈가에 쪽쪽 뽀뽀하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리스텔라는 가만히 크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년 같다고만 생각했던 그는 어느새 훌륭한 청년으로 장성했다.
크리스는 올 봄에 에녹과 함께 서품을 받고 정식 사제가 되었다.
에녹은 본래 신관이었다가 사퇴하고 수습사제부터 다시 교육을 희망한 것이었으니 별 감회가 없었을 테지만, 내내 반몫짜리 사제라는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던 크리스는 이제야 어엿한 사제로서 그녀를 섬기게 되었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정말로 뛰어오르는 것처럼 훌쩍 키가 커버렸다.
“ 크리스는 비를 맞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훌쩍 자랐죠? ”
“ 성장기니까요. ”
“ 나는 16살 이후로 전혀 자라질 않았는데……. ”
아리스텔라가 볼멘소리를 하며 그의 옷자락에 뺨을 슬슬 문질렀다. 신의 힘으로 키를 자라게 할 수도 있지만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부쩍 자란 크리스와는 달리 그녀는 여전히 작고 가녀렸으며, 해가 지나도 소녀처럼 사랑스러웠다.
“ 저는 지금이 좋아요. 이렇게 안을 수 있으니까요. ”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스텔라를 꼭 끌어안는다.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팔. 풋풋한 체향이 감돌던 소년에게서 섹시한 남자의 향기가 난다. 그 기묘한 간극에 뺨이 뜨거워져, 아리스텔라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팔을 둘러 허리를 끌어안았다.
“ 크다……. ”
“ 더 자랄 거예요. ”
“ 이러다 정말 히페리온보다 커지는 거 아니에요? ”
“ 지금도 키는 비슷할걸요? 에녹 사제님만큼 커지는 게 목표거든요. ”
“ 그럼 노엘이 울 거예요. ”
원래도 크리스는 딱히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노엘과 꽤 차이가 난다. 덕분에 요즘 노엘은 크리스의 곁에는 가까이 오지 않는다. 정식 사제가 되면서 방을 따로 쓰게 된 것이 노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물론, 늘 노엘을 챙겨주던 크리스가 독립하면서 그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독방을 쓰게 되면서 노엘의 지각이 잦아져 대신관 히페리온에게 자주 불려가 혼난다고 들었는데, 노엘은 덕분에 늦잠을 자지 않으려고 요즘은 일정한 시각에 큰 소리를 내서 잠을 깨워주는 알람 마력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소리가 워낙 큰 탓에 옆방을 쓰는 사제들의 원성이 자자해 방에 방음 결계를 둘렀다는 것은 덤이다.
“ 노엘 사제님은 예전부터 속상한 일이 생기면 저를 괴롭히곤 했는데, 이젠 못 그러게 됐네요. ”
“ 네? 노엘이 크리스를 괴롭혔다고요? ”
말을 날카롭게 해도 노엘은 누군가를 해코지할 성격은 못 된다. 그것이 착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라는 것이 측은하지만, 노엘은 평소 툴툴거리는 거에 비해서 진짜로 화를 내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크리스를 괴롭혔다니.
“ 네. 저는 학대받고 자랐어요. ”
“ 대체 무슨 학대를……. ”
“ 그러니까 위로해주세요, 성녀님. ”
손끝으로 턱을 들어올려, 꽃잎처럼 촉촉한 입술에 입을 맞춘다.
위로해주는 것과 키스하는 일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쩍 성장한 것은 키와 체격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습할만한 상대라곤 아리스텔라밖에 없을 터인데, 크리스는 키스할 때마다 놀랄 만큼 능숙해져갔다.
“ 흐, 으응……. ”
가지런한 치열을 훑으면서 파고든 촉촉한 혀가 입안의 점막을 더듬는다. 잇몸 안쪽을 더듬다가 작은 혀가 마중을 나오면, 끝만 스치는 인사를 반복하다가 깊게 들어와 혀를 얽는다.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잠시 틈을 주었다가 각도를 바꾸어 깊이 파고들고, 뒷머리부터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 사제들은 다들 습득이 빠른 걸까. ’
노엘을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여하튼 크리스는 수습사제들 중에서 상당히 머리가 좋은 편에 속했다. 생각이 많다보니 한 곳에 깊이 빠지면 어느새 이상한 방향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 읏, 아……! ”
한쪽 손으로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다른 손으로는 옆구리를 쓸어내려 골반뼈를 더듬는다. 아리스텔라는 간지러움과 안타까운 쾌감에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를 밀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 성녀님. 기분 좋으시죠? ”
“ 흐으……. 네에……. ”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분명 음욕의 여신 위그멘타르는 해방되어 자신의 남편 헤시우스와 함께 이 세계를 다스리는 위대한 법칙으로 되돌아갔을 터인데, 그녀의 몸은 여전히 남자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니, 오히려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 더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
“ 위로해달라고 할 땐 언제고……. ”
“ 성녀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위로받는 기분이거든요. ”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촉촉한 혀가 귓전을 파고든다.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에게 매달린 채로 높은 콧소리를 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제하고 있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이제 더 이상 소리를 참지 않는다.
“ 크리스, 기분 좋아……. ”
“ 성녀님은 귀가 약하셨죠. 여기도. ”
“ 으으응! ”
귓불을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면서, 배꼽 아래를 손끝으로 쓱 훑었다. 짜릿한 쾌감에 그녀의 아랫배가 긴장으로 홀쭉해졌다.
“ 거긴, 간지러워요……. ”
“ 하지만 좋아하시잖아요. ”
“ 그건 그렇지만……, 아응! ”
옆구리를 간지럽혀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 또 아랫배를 간질인다. 신음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 아, 아, 아아! 그만! ”
아리스텔라는 울다가 웃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의 의사로 침대에 쓰러졌다. 크리스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천천히 몸을 겹쳤다.
“ 장난은 그만 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
크리스의 붉은 눈동자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아리스텔라는 짐짓 모르는 첫 시선을 회피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응……글쎄요? 본론이 뭘까. ”
“ 성녀님께서 잠들기 전에 했던 일이요. ”
“ 흐앗! ”
집요하게 간질이던 손이, 이번에는 옷섶을 벌리고 들어와 그녀의 맨몸을 더듬었다.
“ 맨살을 만져드리면 특히 더 좋아하시고. ”
“ 아, 아, 크리스, 거기……! ”
“ 성녀님, 그거 아세요? 이렇게 젖꼭지를 잡아당기면― ”
“ 흐아으응! ”
크리스가 손끝으로 젖꼭지를 잡아당기자, 아리스텔라가 소리를 높이며 허리를 들썩였다.
“ 달콤한 향기가 진해져요. ”
달콤하고도 보드라운 향기가 나는 성녀의 몸은 참으로 신기했다. 과일향기도 꽃향기도 아닌 신기한 향기. 맡으면 맡을수록 마음은 따스해지면서 몸은 뜨거워지는 야릇한 체향이 크리스를 흥분하게 했다.
겨우 몇 시간 전 사정했는데도 벌써 한 달은 참은 것처럼 허리가 뻐근했다.
준비도 없이 바로 찔러 넣고 싶은 것을 참으며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의 성의를 벗겨나갔다.
남자의 손으로만 벗길 수 있다는 신전의 성의. 히페리온에게 부탁하면 새로운 성의를 만들어줄 텐데도 아리스텔라는 아직 이 성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어차피 매일 성녀의 시종이 그녀의 시중을 드니 착의와 탈의에 불편함은 없다. 단지 예전이라면 남자의 앞에서 알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그녀가, 지금은 그 수치스러운 상황을 즐기게 되었을 뿐이다.
“ 크리스도, 벗으세요……. ”
“ 전 싫어요. 성녀님 알몸만 볼 거거든요. ”
“ 부끄럽게 무슨 소리예요! ”
“ 부끄럽게 할수록 좋아하시잖아요? ”
화악.
크리스의 말에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개졌다.
그녀는 여전히 솔직하고 여전히 순진했다. 다른 사람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럽고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게 하는 것이 수치스러운데, 곧 상대가 자신을 기분 좋게 해준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수치심을 이겨내게 했다.
순수하게 쾌락을 탐하고 솔직하게 욕망을 표현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크리스는 발그레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 처음엔 저한테 알몸을 보이기도 싫다고 눈을 가리고 옷을 갈아입히게 하시더니. ”
“ 으응, 그땐, 부끄러웠단 말이에요. ”
“ 지금도 부끄러워하시잖아요. 아니에요? ”
“ 부끄럽지만, 크리스니까……. ”
“ 그럼 그때도 제가 억지를 부렸으면 허락하셨겠네요? ”
“ 그건 아니, 으응! ”
크리스의 손끝이 가슴 위를 살짝살짝 스쳤다. 주무르는 것도 매만지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닿았다 떨어지기만 하는 정도의 접촉이다. 천천히 긴장을 풀기보다는 장난치듯이 애태우는 행동에 아리스텔라는 애가 달아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 크리스, 아으응, 장난치지 마세요……. ”
“ 처음 이렇게 가슴을 만졌을 때는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물러나셨는데 말이죠. 언제부터 이렇게 야한 소리를 내게 되셨죠? ”
“ 흐앗, 몰라……. ”
스치기만 하는 애무가 안타까워서 조바심이 난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려 더운 숨을 토했다. 가슴에 손끝이 스칠 뿐인데, 만지지도 않은 아랫배가 간질간질하면서 뭔가 꾸물꾸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전 성녀님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좋아요. ”
“ 무슨 변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정말……! ”
“ 그 변태 같은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허리를 흔들고 있는 건 성녀님이죠. ”
“ 흐으으……. ”
아리스텔라는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크리스가 그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싫은데, 싫지가 않다. 모순된 말이지만 그랬다.
“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요……. ”
“ 어라. 제가 그런 건가요? ”
“ 그래요……! ”
흥분감에 헐떡이면서도 원망의 빛을 담아 쏘아보자, 크리스는 머쓱한 듯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 웃는다.
“ 그건 정말 영광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