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7 / 0219 ----------------------------------------------
신들도 이혼을 한다 (2)
[216]
『정말이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그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몸 안의 신성력이 일렁이더니, 전신의 모공을 통해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몸 안의 불순물을 뽑아내듯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살짝 현기증이 일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바닥이 없는 이곳에서는 넘어질 수도 없었다.
“ 하아……. 이제야 나왔네. ”
“ 위그멘타르! ”
바닥에 엎드려 있던 헤시우스가 벌떡 일어나 눈앞의 여인을 끌어안으려 했다.
―철썩!
눈물범벅이 되어 사랑하는 부인을 끌어안으려 달려간 남편은 매서운 손길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연약한 척하는 건지, 아니면 위그멘타르가 그만큼 강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이 파렴치한! 어딜 안기려고 들어! ”
“ 내가 잘못했다. 위그멘타르, 정말 잘못했다. 제발 용서해다오. ”
헤시우스는 또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사과했다. 진작 저랬으면 좀 좋아,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아리스텔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네가 설마 내 대변인을 자처할 줄이야. ”
위그멘타르가 휙 등을 돌려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헤시우스와는 정반대의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공교롭게도 아리스텔라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청순한 인상의 아리스텔라와는 달리 요염하게 올라간 눈매에 붉은 입술이 어쩐지 섹시해 보였다. 완벽한 굴곡을 자랑하는 몸매는, 과연 음욕의 여신이라 부를만 했다.
“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
“ 아니, 뭐. 상관없어. ”
위그멘타르는 기지개를 켜듯 팔을 쭉 뻗었다. 계속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가 해방되었으니, 찌뿌드드할 만도 했다.
“ 저 머저리를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도 굉장하니까. ”
“ 그래, 위그멘타르. 나는 머저리다. 그래서 네가 없으면 죽어버린단다. 그러니 부디 곁에 있어다오. ”
“ 생명의 신인 주제에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
거칠게 욕설을 뱉으면서, 위그멘타르는 헤시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애완동물을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 저런 부부였나……. ’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아리스텔라는 살짝 기가 질렸다. 그녀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위그멘타르가 물었다.
“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
헤시우스에게는 책임을 물었다. 그가 괴롭힌 여인들에게 행복을 전하고, 전대 성녀들의 영혼에 각인된 괴로운 과거를 망각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신 위그멘타르에게는 아직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
“ 어째서……. ”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의 영혼은 이미 망각의 빛에 휩싸여 지난 기억을 잊어버렸다. 끔찍한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그녀는 새로운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꿈에서 엿본 그녀의 기억을, 그녀가 겪은 슬픔을 망각하지 않았다.
“ 어째서, 전대 성녀님의 눈을 멀게 하셨나요? ”
“ 응? ”
“ 눈을 멀게 하고, 걷지 못하게 하고……. 창녀였던 여자에게 성령석이 반응한 것이 밀리아리아 성녀님의 탓이 아닌데,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하는 건 너무해요! ”
아리스텔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외쳤다. 그녀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했던 성녀일 뿐 성녀 밀리아리아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그녀의 대변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여신 위그멘타르가 자신을 봉인한 ‘ 그릇 ’에 그토록 잔인한 짓을 했는지.
“ 뭐야. 너 아직 모르고 있었어? ”
“ 네……? ”
“ 전대 ‘ 그릇 ’을 부순 건 내가 아니야. ”
여신 위그멘타르는 자신의 검은 머리를 슥 틀어 올렸다. 긴 머리가 손짓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올라갔다.
그녀가 손짓하니,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바다가 만들어졌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발밑에서 찰랑거렸다.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니, 그곳에 어떤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 헉……! ”
아리스텔라는 숨을 삼키며 한 발 물러났다. 발끝에 스쳐 물결이 흔들렸지만, 물에 비치는 형상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신 위그멘타르의 안에 있던 기억.
전대 성녀를 범하는 성기사들의 모습이었다.
당대의 여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여신의 현신으로 신성제국에서 최고위의 권한을 가진 교황보다도 한 단계 위에 서는 여인의 존재를, 사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새로이 탄생한 성녀를 신전으로 데려오는 것은 성기사들의 역할. 그들은 그 정순한 신성력의 증명을 성녀의 처녀성에서 찾으려 했다.
“ 성녀가 숫처녀여야 한다는 말은 나도 헤시우스도 하지 않았는데. ”
성령석이 반응한 것을 보고도, 성기사들은 성녀가 처녀인지 감별해야 한다며 그녀를 범했다. 애정도 배려도 없이 수많은 남자에게 범해진 성녀는 아랫도리가 피범벅이 되어 신전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사제들은 성녀가 성기사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며 그녀를 범했다.
다음 대의 성녀가 탄생했을 때도, 그 다음 대의 성녀가 탄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탁이 가리키는 「 순결한 여인 」을 숫처녀로 해석한 성기사들은 새로운 성녀가 탄생할 때마다 성령석을 믿지 않고 처녀 감별을 하려 했고, 성녀는 신전에 들어오기도 전에 처녀성을 잃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어째서 사제와 성기사라는 자들이 신탁을 곡해하고 성령석을 믿지 않는가.
여신 위그멘타르는 그 원인을 자신이 관장하는 질투와 탐욕으로부터 파악했다.
「 저렇게 보잘것없는 어린 처녀가 여신의 현신일리 없다. 」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가장 성스러운 처녀를 질투한 인간들은 고고한 성녀를 붙잡아 끌어내려 진창에 처박음으로써 희열을 느꼈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한 성녀가 미쳐버린 것은 단지 음욕에 잠식당했기 뿐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위그멘타르는 성녀가 처녀 감별에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창녀에게 가장 정순한 신성력을 주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이 흘러들어가도록.
성령석이 반응했을 때 이미 처녀성을 잃은 지 오래인 여자의 몸에 들어간다면, 성기사들에게 범해져 신전에 오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되는 일은 면하리라.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질투는 여신인 그녀의 예상에서도 벗어난 것이었다.
더러운 창녀에게 성령석이 반응할 리 없다. 자신들이 모셔야 할 성녀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라는 것을 알게 된 성기사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밀리아리아를 때리고 짓밟았다. 두 눈을 멀게 하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만들면 ‘ 그릇 ’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성령석이 반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든 밀리아리아가 성녀가 아님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수없이 범해지고 두 눈과 다리를 잃고도 밀리아리아의 신성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성녀 밀리아리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 질투했으니까, 그 아이를 사랑하게 만들면 달라질까 했지. ”
여신 위그멘타르는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성녀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녀를 괴롭히지 않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인간의 몸에 봉인된 상태로 베푼 어설픈 신의 권능은 사제와 성기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성녀에 대한 질투와 탐욕과 사랑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폐쇄된 신전은 끝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생지옥이 되어버렸다.
“ 사실은 말이야, 네가 처음이란다. ”
“ 제가 처음…… 이라고요? ”
“ 이 신전에 숫처녀의 몸으로 들어온 게 말이야. ”
위그멘타르는 망연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아리스텔라와 닮은 보랏빛의 눈동자지만, 여신인 그녀의 눈빛은 무엇이든 담아내는 광활한 잔과도 같았다. 그 보랏빛의 잔에 가득 찬 욕망의 물결이 아리스텔라를 향해 넘실거렸다.
“ 나를 해방시켰으니 선물을 주마. 무엇을 원하니? ”
“ 선물…… 이요? ”
“ 지위와 부, 영예, 그 어떤 것이든 너에게 주마. 원하는 것을 말하련? ”
뜻밖의 질문에 아리스텔라는 입을 다물고 눈만 깜박였다. 눈매를 가늘게 하며 묻는 위그멘타르의 얼굴은 요염하면서도 성스러웠다. 이제 그녀가 다시 세상에 재앙을 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말하렴, 사명을 다한 자에게 신은 언제나 복을 내리는 법이거든. ”
“ 복……. ”
복이라.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복이 어떤 형태인지 몰랐다.
신전에는 그녀를 보필하는 시종이 있고,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두가 신경 써준다. 성녀를 찬양하는 미사는 기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참석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강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도 모두와 함께하는 뿌듯한 시간이기에 참석하는 것이다.
사제와 성기사들은 그녀의 말을 따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대령하고,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무엇이든 마련해준다. 기실 물질적으로 이 이상 풍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난한 시골 처녀로 자라온 아리스텔라는 엄청난 명성이나 재화를 원하지 않았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수많은 백성을 돌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역할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자리에 앉으면 주어진 책임에는 성심껏 임하지만,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
“ 저는……. ”
아리스텔라는 눈을 감았다.
신이 내리는 위대한 축복. 인간으로서 가능한 모든 재화와 영예를 선사하는 은총.
그러나 그녀에게는 과분한 것이다.
정확히는 욕심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성녀는 대미사를 통해 여신의 현신임을 공표하는 순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 신 」이 된다. 아리스텔라가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서고 싶다는 욕심이 없는 것 또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으로 여신을 품고, 현신이 됨으로써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성녀.
여신 위그멘타르의 봉인이 풀려나 온전히 제 몸을 소유하게 된 아리스텔라는 지금 신도 인간도 아닌, 그 경계에 있다.
“ 저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