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16화 (21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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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도 이혼을 한다 (2)

[215]

“ 그 여자들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번에야말로 진실한 사랑을 이루도록 말이에요. ”

아마도 그녀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란 순환하는 것. 분명 생명의 고리에서 머물다가 다시 세상에 환생할 터였다. 혹은 벌써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신의 장난에 희생당한 생명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에게 속아 순결을 잃은 여자들의 비참한 절규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잠시 엿본 것뿐인데도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 아리스텔라는 그녀들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그래. 그렇게 하겠다. ”

헤시우스가 곧바로 수긍하자 아리스텔라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거나, 그녀들이 누군지 기억을 못한다며 오리발을 내밀 줄 알았는데, 헤시우스가 깔끔하게 수긍하니 도리어 이쪽이 당황스러웠다.

“ 할 수 있어요? ”

“ 특정한 혼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으니까. ”

헤시우스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두 사람이 서 있는 바닥에 밤하늘이 넓게 깔렸다. 아니, 밤하늘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하늘에 가득한 반짝이는 별들은 진짜 별이 아니었다. 여신을 품은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 이것들이 전부 생명의 빛이구나. ’

생명의 순환고리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막연히 빙글빙글 도는 물레방아나 풍차 같은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보는 생명의 순환고리는 천천히 흐르는 은하수와도 같았다. 그 빛의 물결 사이에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리던 헤시우스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그의 손짓을 따라 붉은색과 녹색의 빛이 뻗어 나왔다.

“ 붉은색은 환희, 녹색은 평안이란다. ”

두 색의 빛이 수십 갈래로 뻗어 갔다. 은하수 속으로 사라져가는 빛들은 색색의 별똥별처럼 보였다.

‘ 하지만 저렇게 여러 갈래라는 건…. 적어도 수십 명의 여자와 관계를 했다는 뜻이구나. ’

부인을 놔두고 대체 얼마나 외도를 해댄 건지. 아리스텔라는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마른세수를 하고는 바로 섰다.

“ 아직 끝이 아니에요. ”

“ 으응? 더 있느냐? ”

“ 네. 저를 봉인했던 성녀들의 혼을 치료해야죠. ”

헤시우스에게 유린당한 무고한 여인들을 구원했다. 이번에는 여신 위그멘타르 때문에 희생당한 여인들을 구원할 차례였다.

아리스텔라가 스스로 전대 성녀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에게는 신의 권능이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헤시우스에게 부탁했다. 애초에 헤시우스가 인간 여인의 몸에 여신 위그멘타르를 봉인한 것이 문제였으니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 악몽 같은 과거가 혼에 각인되지 않도록, 그녀들을 모두 행복하게 해주세요. ”

“ 과거를 없애는 것은 불가하단다. ”

그에게 희롱당한 여인들을 구원할 때처럼 간단히 권능을 행사할 줄 알았는데, 헤시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능에 가깝다 말하는 신이라도 위대한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거가 쌓여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쌓여 미래를 만들어가는 시간의 흐름은 신의 힘으로도 멈출 수 없다. 그녀들이 겪은 비참한 과거를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은 신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그럼 구원할 방도가 없는 건가요? ”

“ 으윽……. ”

아리스텔라가 얼굴을 찡그리자 헤시우스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황금색의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굴러갔다.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일까.

얌체 같은 대답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두 손을 꼭 쥐고 헤시우스를 노려보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의 감정을 읽은 것인지, 헤시우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면서 과장되게 소매를 흔들었다.

“ 아, 그래! 대신 그녀들의 혼에 있던 과거의 기억을 내 속으로 옮겨오마. 없앨 수는 없어도 위치를 옮기는 것은 가능하니 말이다. ”

“ 정말인가요? ”

“ 정말이고말고! ”

“ 그녀들에게는 정말로 괴로운 기억일 텐데, 그게 당신 안으로 옮겨오면……. ”

“ 나는 평화의 신이니까.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나 슬픔이라도 내 안에 들어오면 전부 평온을 되찾는단다. ”

그런 것 치고는 이혼하겠다는 한 마디에 울고불고 떼를 쓰던 모습이 마음에 걸리지만.

“ 자. 그럼 망각의 빛을 보내도록 할까. ”

이번에는 푸른빛이 뻗어 나와 열여섯 개로 갈라졌다. 특히 강렬한 빛을 띠는 저것이 아마 밀리아리아를 향해 뻗어 나가는 빛일 것이다.

“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를 괴롭힌 사제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

“ 그들은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회의 고리에 들여놓지 않았단다. 어쩌길 바라느냐? 혼을 소멸시킬까? ”

생명의 신이라는 작자가 참으로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 뭐만 하면 혼을 소멸시킨다니, 잘못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 소멸은 안 돼요. ”

“ 그렇다면? ”

“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생을 거듭해 성녀에게 남몰래 헌신하게 해주세요. ”

“ 그래, 알았다. 성녀의 혼이 모르게 헌신하는 역할을 주마. ”

사람의 인생의 방향마저 지정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세상을 만들고 생명을 창조한 신이라지만,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 아니, 잠깐만요. ”

“ 응? ”

“ 운명을 결정하지 마세요. 그들에게는 성녀에게 헌신할 기회만 주세요. ”

“ 기회만? 녀석들이 기회를 저버리면 어쩌려고? ”

“ 그땐 벌을 내려야죠. ”

아리스텔라는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내렸다.

진정한 반성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죄를 갚아나가는 태도로부터 나온다. 성녀에게 헌신하도록 애초에 운명이 짜여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반성이 아니었다. 반성을 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척 중요했다. 적어도 아리스텔라 입장에서는.

“ 한 번 기회를 놓칠 때마다 점점 더 가혹한 벌을 주고, 성녀에게 헌신할 때마다 조금씩 행복의 크기를 늘려나가요. ”

“ 주문이 까다롭구나……. 아니, 알았다. 네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기로 했으니까. ”

이번에는 무언가 수식 같은 것을 바닥에 그렸다. 짙은 회색과 노란색의 빛이 휘감기더니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색색의 빛이 각각의 별에 전부 삼켜진 후에야 신의 이적은 끝났다. 헤시우스는 아리스텔라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 이 정도면 되었느냐? ”

“ 음……. 네. 그런 것 같네요. ”

“ 그럼 순환의 고리를 닫으마. ”

헤시우스가 짝, 하고 손뼉을 치자 두 사람의 발밑에 드리워져 있던 우주가 닫혔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은 다시 텅 빈 빛의 공동으로 되돌아왔다.

“ 이것으로 전부 끝났네요. ”

“ 그럼 이제 나를 용서해줄 테냐? ”

눈앞에서 신이 권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리스텔라를 올려다보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헤시우스의 모습이 적응이 되질 않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때로는 장난을 치려는 아이처럼 때로는 사랑스러운 여인을 욕망하는 남자처럼 그녀를 대한다. 그리고 이럴 때는 마치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 여자로 착각할 만큼 섬세하게 생긴 미인인데, 지금은 마치 보이지도 않는 강아지 귀와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 같다.

“ 글쎄요, 어떻게 할까. ”

“ 아직도 모자란 게냐? 무엇이든 말하려무나. 네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겠다. ”

“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건가요? ”

“ 물론이지! ”

“ 내가 싫다고 하면 절대로 하지 않을 거고요. ”

“ 으음……. ”

헤시우스는 난처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심한 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앞으로는 네가 하지 말라고 하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 네 말만을 들으마. ”

“ 약속이에요. 거짓말은 안 돼요. ”

“ 나에게는 거짓이라는 속성이 없단다. ”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는 하나면서 둘인 부부신으로, 서로 관장하는 바가 달랐다. 극과 극의 개념을 서로 나누어 가진 그들에게 공통분모란 오직 하나뿐이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기왕이면 그 사랑의 표현방식이나 서로에 대한 배려도 함께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 후우……. ”

아리스텔라는 한숨을 내쉬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물었다.

“ 어떻게 하시겠어요? ”

헤시우스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와 한 번도 소통한 적 없지만 늘 함께 있던 존재. 몸 안에 봉인된 여신 위그멘타르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 선택은 스스로 하는 거예요. ”

인간이 신에게 설교하는 것은 참으로 건방진 일일 것이다. 성서에도 신은 교만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위그멘타르는 그녀와 소통하지도, 헤시우스에게 응답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헤시우스는 그녀를 억지로 불러와 이곳에 가두고 안으려 했다. 아리스텔라로서는 이 방법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대변인을 자처한 것은 여신 위그멘타르의 권위에 도전한 것도, 그녀를 능멸하려 한 것도 아니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올바른 일을 했을 뿐이다.

『정말이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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