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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도 이혼을 한다
[213] 신들도 이혼을 한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이 들었다. 심연으로 가라앉은 의식이 눈을 떴을 때는 텅 빈 빛의 공동에 홀로 서 있었다.
‘ 이곳에도 금세 익숙해졌네.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처음에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자신이 이토록 태연해질 거라고는.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빛의 공동 안을 거닐었다.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이곳은 하늘도 땅도 없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어둠뿐이었던 세상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빛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무엇을 그리 골몰히 생각하고 있느냐? ”
뒤에서 뻗어온 남자의 팔이 그녀의 몸을 껴안았다. 아리스텔라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 남자를 상대로는 그 어떤 저항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저를 안을 건가요? ”
천천히 몸을 쓰다듬던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남자의 손이 아리스텔라의 고개를 돌려 저를 향하게 했다. 헤시우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드디어 허락해주는 것이냐. ”
“ 제가 허락하면, 저를 안을 건가요? ”
“ 나는 항상 너를 안고 싶었단다. ”
헤시우스가 꽃이 피듯 화사하게 웃으며 아리스텔라의 뺨에 제 뺨을 문질렀다. 아기처럼 보드라운 피부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응석을 부리는 듯한 천진한 태도에 아리스텔라는 살짝 정색하며 그를 밀어냈다.
“ 제 이름은 아리스텔라예요. ”
“ 인간의 껍데기 따윈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너란다. ”
인간처럼 빛에 의존하지 않고 무엇이든 꿰뚫어보는 신의 눈동자. 그 황금색 눈동자는 아리스텔라의 겉모습이 아닌, 그녀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향하고 있다.
“ 사랑하는 나의 위그멘타르. ”
헤시우스는 온화하게 웃었다. 꿈속에서 저를 비웃던 차가운 미소가 아닌, 정말로 사랑하는 이를 보는 듯한 따스한 눈빛. 아리스텔라는 늘 누군가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봐주면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당신은 모든 게 장난이죠? ”
“ 음? ”
“ 사람을 속이고,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그러면서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
“ 약혼자인 척, 그 여자를 꾀어내서 능욕했잖아요! ”
아리스텔라가 언성을 높이자 헤시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풋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 무얼 말하나 했더니만. 능욕이라니 당치도 않단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손대지 않았을 거야. ”
“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속여 놓고는 무슨 소리예요? ”
“ 진짜로 사랑했다면 속을 리가 없지 않으냐? ”
헤시우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사르르 녹아버릴 듯한 미소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소에 아리스텔라는 소름이 끼쳤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었다. 전능한 신은 인간의 이해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다. 거대한 법칙 위에서 만능인 신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사기꾼! ”
“ 으응? ”
“ 저질! 변태! 당신 같은 남자는 정말 최악이야! ”
아리스텔라는 몸부림치며 헤시우스의 손을 뿌리쳤다. 답지 않게 거친 욕설을 뱉으며 화를 내는 그녀를 보고 헤시우스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한 발 물러나서는 양손을 들고 진정시키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구나. 그저 장난을 조금 쳤을 뿐인데. ”
“ 당신에겐 사람의 인생이 장난인가요? ”
꿈속의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결혼식 전까지 서로 정절을 지키자고 약속하고도 그것을 깨뜨린 것은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를 원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에 환희에 가득 차 울고 웃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시우스는 가차 없이 짓밟았다.
“ 목숨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하룻밤 유희가 아니냐. 본 사람도 없으니 평생 비밀을 지킬 수 있었어. ”
“ 어떻게 그래요? ”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숨기고 비밀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리스텔라는 상상할 수도 없다. 히페리온은 그녀를 강제로 범한 일을 숨긴 일로 내내 괴로워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처형대 앞에 선 죄수가 된 기분으로 진실을 고했다.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 사실을 말하든 숨기든 그녀는 한평생 괴로워했을 거예요. 당신 말대로, 사랑하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목이 졸리고 가슴이 찢어졌을 거라고요! ”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고 하던가. 헤시우스는 이 세상을 창조하고 모든 생명을 키워내는 권능을 가진 신이다. 위대한 법칙 아래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진 그에게 한낱 인간은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일까.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굽어 살핀다고 믿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참회하여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헤시우스에게는 이 세상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도, 그저 한때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참회의 기도를 듣고 죄를 사하여주는 것은 인간을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장난감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흥미 깊게 지켜보는 그에게, 개개인의 죄란 딱히 화를 낼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황당한 일이 있을까. 사제와 신도들은 이제까지 신이 죽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겨, 그를 믿으며 복종해왔는데.
“ 이럴 거라면 대체 왜 세상을 만들었나요? 왜 신의 권능으로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
“ 네가 원했으니까. ”
헤시우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우리 둘의 권능으로 세계를 만들고 생명의 순환고리를 만들자고 네가 말했지. 너는 이 세상을 정말로 좋아했어.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내가 어찌 없앨 수 있겠느냐. ”
예상외의 대답에 아리스텔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을 깨물었다. 설마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헤시우스가 아니라 위그멘타르였을 줄이야. 세상을 아끼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녀는 어째서 이 땅에 재앙을 내렸나.
“ 이제까지 죽, 나를 불러왔다고 했죠? ”
“ 그래. 한참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아 외로웠단다. ”
아리스텔라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헤시우스의 말을 미루어보면 전대 성녀들도 그의 부름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처음으로 헤시우스의 신호인 하얀 새를 발견한 것도 이 신전에 들어와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으니 말이다.
여신 위그멘타르가 제 몸을 빼앗았을 때는 헤시우스의 부름이 분명 들렸을 텐데, 어째서 응답하지 않았을까. 증거도 무엇도 없지만, 아리스텔라는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어요. ”
“ 하지만 응답하지 않았느냐. 네 화가 풀렸다니 다행이야. ”
“ 화가 풀려서가 아니에요. ”
그래. 헤시우스의 말마따나 여신 위그멘타르는 분명 화가 나있다. 그녀의 남편이 인간 여자들과 수없이 외도를 하고, 소중한 피조물들을 함부로 여긴 탓에 무척 화가 나있을 것이다.
“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겠죠. ”
“ 할 말? ”
헤시우스는 아마 그것을 외도라고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와 그녀의 피조물인 인간은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인간을 장난감으로 여기는 헤시우스는 그저 그들이 진실한 사랑을 하는 것을 비웃고 놀리기 위해 관계를 가졌을 뿐이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부부가 함께 만든 세상을 좋아했던 위그멘타르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위그멘타르는 한번 이 세상을 없애버리려 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세상에 대재앙이 일어났다.
헤시우스는 그녀를 막으려 여신의 힘을 인간 처녀의 몸에 봉인하고, 인간들은 그녀를 여신의 현신으로 여기며 신전에 모셨다.
결국 두 부부의 싸움이 인간 세상에까지 미친 셈이다. 부부싸움에 접시나 그릇이 깨지듯이, 그들이 만든 세상이 여기저기 부서지고 비틀리게 된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싫었다. 아무리 창조주라 할지라도, 인간을 만들어낸 부모와도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고 영혼도 없는 도구라 할지라도 도구를 함부로 여기는 인간은 눈총을 받는다. 생명이 있는 꽃을 함부로 꺾으면 더했다. 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은 악인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 저는 도구가 아니에요.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고 헤시우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빛을 내는 황금색의 눈동자다. 그러나 그 빛에 눈이 멀 일은 없을 것이다. 여신의 현신인 그녀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신이 된 존재. 이 정도 안광에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 지금 저는 당신을 보고,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어요. ”
“ 뭐야. 너랑은 할 얘기 없어. 나는 위그멘타르를 불렀다고. ”
“ 저는 위그멘타르의 대변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