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12화 (21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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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밀고 당기기

[212]

“ ……성녀님을 부탁한다, 크리스. ”

무거운 문이 스르륵 닫히고, 문고리 옆의 성령석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안에서 누군가 기도중이라는 표시였다.

“ 참회 기도가 고해성사인줄 알았더라면 따라오지 않았을 텐데, 미처 몰랐네요. ”

“ 성녀님을 방에 홀로 두고 기도하러 왔으면 그게 더 문제예요. 다음부터는 에녹의 기도 시간에는 제가 성녀님 곁을 지킬게요. ”

크리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꿍꿍이를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답하고, 크리스와 복도를 거닐었다.

“ 성녀님. 새로운 시종은 마음에 흡족하신가요? ”

“ 에녹 말인가요? ”

크리스는 에녹이 성녀의 시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하게 생각했다.

물론 에녹은 과거 신관이었고, 그의 능력이나 지식은 신관 직위를 내려놓고 새로이 수습사제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낮잡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는 자신보다 훨씬 늦게 수습사제로 돌아왔음에도 금방 정식 사제로 서품을 받을 것이고, 이내 신관까지 다시 올라갈 것이다.

대체로 사제가 될 이의 역량은 처음 수도원에 들어오고 한 달 내에 판가름이 난다. 신관급에 오를 만한 인재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신전에 「 신관 아론 」의 빈자리를 대체할 사람은 없었다. 에녹 자신이 올라가 예전의 자리를 다시 채울 수밖에.

“ 원래는 신관이었던 분이잖아요.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

“ 딱히 불편한 점은 없어요. ”

남을 보조하는 법은 수습사제 시절에 배운다. 정식 사제가 되고 나서도 돌아가면서 신관들의 보조를 맡으니 시중드는 법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만 성녀는 여인이었고, 그녀의 사고방식이 신전의 사제들과는 조금 궤를 달리 하고 있었기에 트러블이 일어났을 뿐이다.

“ 에녹과 있으면 편하거든요. ”

“ 편하다고요? ……어떤 점이요? ”

“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너무 과하지 않다는 점이 좋아요. ”

그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먼저 나서서 대신하려 하는 것이 아리스텔라에게는 낯설고 어색했다. 가령 계단이 조금 높다고 스스로 내려서지 못하게 하고 번쩍 안아 들고 움직이는 일이라든가.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일은 좋아하지만, 먼 거리를 이동할 때나 다니기 불편한 길을 건널 때마다 안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민망했기 때문이다.

에녹은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 로이드도 케인도, 저를 매번 안고 다니니까 별로 걸어 다닐 일이 없었거든요. ”

“ 성녀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서니까요. ”

“ 편하지 않아요. 그렇게 매번 제 다리로 안 걷고 안겨 다녔다간 다리근육이 퇴화해서 걸을 수 없게 될 거라고요. ”

걸을 수 없게 된다.

그 말에 크리스는 물끄러미 아리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성녀가 걸을 수 없게 된다면 이동을 할 때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원하는 장소에 갈 수도 없는 성녀.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을 상상한 순간, 크리스는 음험한 것이 마음속을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을 느꼈다.

“ 크리스? ”

대화가 끊어진 것을 의아하게 여긴 아리스텔라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정신이 든 크리스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시선을 피했다.

“ 그렇……네요. ”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는 신전에 들어오는 순간 여신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녀 자신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리스텔라가 그렇게 된다면. 앞을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해서, 크리스에게 의지하며 매달린다면. 그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안도한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모든 것을 독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정말로 형편없는 놈이구나. ’

성녀에게는 분명 끔찍한 불행일 터인데, 크리스는 문득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성녀를 곁에서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의지하며 응석을 부리는 성녀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작은 생명체를 돌보는 일은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만약 눈이 먼다면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바라봐주지 못할 테니 그것은 슬플 테지만, 그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직접 입을 벌리게 해 밥을 먹여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그녀를 안고 산책을 나가고 함께 기도하는 상상은 무척 달콤했다.

“ 성녀님은 굳이 노력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 네? ”

“ 당신께서 완벽해질수록, 보조자인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줄어드는걸요. ”

심부름을 갔다가 얼핏 기사단장 로이드가 히페리온에게 하던 말을 들었다. 성녀에게 승마를 가르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사제 교육을 받지 않은 성녀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고, 신성 마법을 가르친다. 사제들은 사제 나름대로, 성기사들은 성기사 나름대로 성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한다. 성녀가 미숙하고 부족한 점이 많을수록 자신이 해줄 것은 많아진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일에 능숙해지고 어엿한 성녀가 된다면, 이제 더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 크리스! ”

“ 으앗! ”

옆구리에 가해지는 따끔한 충격에 크리스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아리스텔라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은 것이다.

“ 서, 성녀님……. ”

“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거, 거짓말이었어요? ”

“ 예? 아, 아닙니다! ”

갑자기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인가. 크리스는 허둥지둥 아리스텔라의 옆으로 다시 다가왔다.

“ 아리스텔라 성녀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진심입니다. ”

“ 그럼 저를 응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응원…… 이요? ”

“ 저는 당신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보호자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갓난아기가 아니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그녀가 평범한 시골 처녀였기 때문에 성녀로서 사제와 성기사들 앞에 나서는 것이 늘 어색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그들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만큼, 그녀도 어서 어엿한 성녀가 되어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신전의 주인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주인으로서 자신의 종들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보호를 받아서야 어떻게 사제와 성기사들의 주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는가.

“ 나는 당신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여신의 힘을 더 안정시키고, 신성마법에도 어서 능숙해져서 당신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요. 그게 제 목표예요. ”

“ 성녀님……. ”

“ 내가 한 사람 몫을 다할 수 있게, 성장할 수 있게,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성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응원해줄 수는 없나요? 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 ”

“ 아……. ”

크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민망했다.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리스텔라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애당초 질투에 마음을 잡아먹혀 괴물이 되어버린 그를 구원해준 것이 성녀 아리스텔라가 아니었나. 아리스텔라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로이드에게 살해당하거나 히페리온의 신성마법에 불타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괴물의 몸 속으로 들어와 크리스가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하고 안아준 것이 성녀 아리스텔라였다.

그때부터 이미 그녀는 아득히 먼 곳을 목표로 향하고 있었는데.

“ 믿습니다, 성녀님을……. ”

크리스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그녀를 곁에서 지키고 돌보고 싶다면, 그 자신이 그녀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면 되는 것을.

그녀의 발목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내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앞서가면 되는 것을.

“ 내가 훌륭한 성녀가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거죠? ”

“ 예, 성녀님. 응원하겠습니다. ”

“ 그럼 내 얼굴 보세요. ”

크리스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약간 올려 아리스텔라를 마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보랏빛의 눈동자가 보인다.

처음 에녹과 나타날 때만 하더라도 약간의 근심이 남은 듯 보였던 아리스텔라의 눈빛은 어느새 생기 넘치는 빛을 띠고 있었다.

“ 나를 믿는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크리스. ”

그보다 한 뼘이 작은 성녀가 생긋 웃어보였다.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는, 크리스의 앞에서 쩔쩔매던 초보 성녀가 아니라 당당한 주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련한 꽃은 손으로 잡아당긴 것만으로 쉬이 꺾여 버리지만, 뿌리가 살아있으면 또다시 꽃을 피워낸다. 꺾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꺾여도 새로이 피어날 뿐. 연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생명은 사실 그의 예상보다 더욱 강인했다.

“ 당신의 믿음에 보답할게요. ”

아리스텔라는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크리스가 그녀를 믿는다고 말했다. 에녹이 그녀의 종이 되겠다고 말했다. 조슈아가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히페리온이, 로이드가, 케인이, 신전의 모두가 그녀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

이제는 자신이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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