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1 / 0219 ----------------------------------------------
신과 인간의 밀고 당기기
* 연참입니다. 앞 화를 먼저 읽어주세요.
[211]
등을 쓰다듬던 손이 앞으로 돌아와 아리스텔라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에녹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고개만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짧은 검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 단정한 생김새의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제 저녁도 조금 드셨는데 말이지요. 성녀님께서 배고픔을 느끼시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운동량 부족인지도 모릅니다. ”
그냥 신전에서 제공하는 식사의 양이 많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에녹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늘 시종의 보살핌을 받으며 편하게 지내온 아리스텔라는 확실히 예전, 신전 밖에서 살던 때보다 절대적인 운동량이 부족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아침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산책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 외에 따로 노동은 하지 않는다.
“ 활동량을 좀 늘리는 게 좋을까요? ”
“ 예. 운동을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
운동이라면 무엇이 좋을까. 아리스텔라는 검술에도 승마에도 문외한이었다.
기사단에 가서 가르쳐달라고 하면 가르쳐주긴 하겠지만, 가뜩이나 업무량이 많은 성기사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차라리 공터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조깅을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녹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 하읏! ”
“ 제가 도와드리지요. ”
“ 에녹? 자, 잠깐……, 아앙! ”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던 손이 젖꼭지를 잡고 살짝 잡아당기자, 아리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에녹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가늘게 신음했다.
악몽 속에서 헤시우스에게 범해진 감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에녹은 그저 부드럽게 가슴을 애무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신성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리스텔라는 가슴을 만져준 것만으로 양 뺨을 붉게 물들이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 에녹, 으응. 운동을, 하라고……. ”
“ 기구를 사용하는 운동은 부상의 위험이 있고, 검술이나 승마는 저도 소양이 부족하여 바로 옆에서 보필하기 어렵습니다. ”
“ 하지만 이건……. 아, 아응! ”
목에서 쇄골을 지나 배꼽까지 손끝으로 슥 훑어내리자, 얇은 성의가 슬쩍 벌어지며 맨살을 내비쳤다. 그녀의 피부는 평소의 상앗빛이 아닌,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 악몽을 꾸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
에녹의 무덤덤한 지적에 아리스텔라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다. 에녹은 단지 그것만 말했을 뿐이지만, 어디선가 밤새도록 음란한 꿈을 꾸고 있었냐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흣, 아뇨. 나는……. 단지, 읏! ”
입을 막지도 않았는데, 길고 촉촉한 혀가 귓가에 파고드는 것만으로 소리가 끊겼다. 작게 비명을 지르며 할딱거리는 그녀의 몸을 커다란 손으로 문지르며 얇은 성의를 벗겨나갔다.
“ 에녹. 잠깐만요. 아침부터 이러면……. ”
“ 아침이 가장 기운이 있을 때니까요. ”
“ 하지만 당신은, 나랑 그……. 하, 하는 게 싫다고……. ”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에녹이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 당신의 종입니다. 싫어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가슴을 베어 물고, 긴 혀로 꼿꼿하게 일어선 젖꼭지를 핥아주자 아리스텔라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에녹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짧고 조금 억센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잡혔다.
“ 에녹……! ”
“ 전부 제게 맡기십시오. ”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젖은 음부를 문질렀다. 아리스텔라는 울상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결국 다리를 벌렸다.
◇ ◆ ◇ ◆ ◇
악몽의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사랑받고 난 후, 평소보다 많이 아침밥을 먹고 나온 아리스텔라는 에녹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 싶으시다고요? ”
“ 일반 성서에는 신의 위업밖에 실려 있지 않잖아요. 신에 대해 연구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
위그멘타르는 질투의 여신이다.
인간의 감정은 신의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나누어받은 것. 만약 위그멘타르가 헤시우스를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그와 그녀가 함께 만든 세상. 그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어여쁜 피조물들. 과연 그 피조물을 자신의 남편이 농락하여 범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있었을까.
꿈은 헤시우스에게 능욕당한 여인의 뒷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약속을 깼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할 것이다.
제 남편이 제 피조물을 괴롭히는 광경을 보고 여신 위그멘타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서에는 대재앙이 일어난 배경을 인간이 사악하여 서로를 해치고 음란한 짓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인간이 전쟁을 저질러 서로를 죽이고, 정절을 지키지 않고 그저 쾌락에 도취되어 음행을 저질렀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녀에게 성서를 가르쳐준 지도 사제도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 기록이 언제나 진실을 그대로 담는 것은 아니야. ’
성서란 신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풀이해놓은 것. 그 풀이에는 인간의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신전의 도서관에 가득한 전대 신관들의 기록. 그곳에는 대대로 음란한 성녀를 힐난하는 내용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 기록 ’이란 자신들이 성녀에게 정화의 의식을 베푸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과연 성서에도 그런 의도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 서로를 해치고, 음행을 저지르고……. ’
꿈속의 여인은 「 이야기 」를 들었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처녀를 홀려내 범하는 바람둥이 신의 이야기를.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한, 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질투의 여신은 과연 남편의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을까?
만약 그녀가 헤시우스가 인간 여인들과 바람피우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 불멸의 신에게 벌을 내릴 수 없으니 인간들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을까.
‘ 설마 부부싸움에서 대재앙이 비롯된 건 아니겠지. ’
에녹은 아리스텔라가 어째서 연구자료를 노려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 ◆ ◇ ◆ ◇
성녀의 시종을 맡은 이는 모든 업무가 면제되지만, 성실한 에녹은 수습사제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성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 죄송합니다, 성녀님. ”
“ 아니에요. 저도 옆에서 함께 기도하죠. ”
성서 공부를 마친 수습사제들은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와 반성하는 바를 신께 고하며 기도를 올린다. 기도실 이용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요일과 시간대를 나누어 드나들고 있었는데, 에녹이 갑자기 수습 사제가 되는 바람에 시간 조절에 애로사항이 있었던 모양이다.
에녹은 주에 2회 있는 참회 기도를 1회로 줄이는 대신 두 배의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기로 했다.
“ 성녀님? ”
“ 어머, 크리스. ”
계단을 내려와 복도에 들어선 두 사람은 막 기도실에서 나오던 크리스와 마주쳤다. 오늘은 크리스가 기도를 하는 날이었을까.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와 에녹에게 목례한 뒤 방해되지 않도록 문에서 비켜섰다.
“ 기도를 하고 있었나요? ”
“ 예. 오늘은 조금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방금 끝났습니다. 들어가세요, 에녹. ”
“ 고맙다. ”
에녹이 크리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아리스텔라도 그를 따라 기도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크리스가 그녀를 불렀다.
“ 성녀님도 들어가시려고요? ”
“ 네. 안 되나요? ”
“ 참회 기도는 신께 고해성사를 하는 거예요. 자신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고하지 않으면 안 되죠. ”
아리스텔라가 옆에 있으면 에녹이 말하기 껄끄러워할지도 모른다는 걸까. 흘긋 에녹을 바라보자, 그는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 성녀님께서는 여신의 현신이시니, 당신 앞에서 고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
아리스텔라가 있든 없든 에녹은 솔직하게 고해할 모양이다. 과연 에녹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고해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남의 잘못을 듣는 일은 아리스텔라로서도 조금 꺼려졌다. 반성하고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 에녹.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 기도하고 나오세요. ”
“ 성녀님을 밖에 세워둘 수는 없습니다. ”
“ 제가 성녀님을 모실게요. ”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감싸며 싱긋 웃었다. 마치 이 기회를 노렸다는 듯한 재빠른 행동에 에녹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성녀를 보필하는 것은 시종의 임무지만, 에녹은 이미 참회 기도를 올리겠다고 아리스텔라에게 양해를 구해놓았다. 성녀가 기도 참관을 단념한 이상 이제 와서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 ……성녀님을 부탁한다, 크리스. ”
에녹은 크리스가 미덥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도 수습사제일 뿐이었다. 크리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위치가 아니었다.
아리스텔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에녹은 기도실의 문을 닫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원고료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