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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 헤시우스
[209]
“ 사랑한단다, 나의 위그멘타르. ”
그녀 안의 여신을 부르면서 헤시우스는 아리스텔라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빛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또다시 흐려졌다. 공중에 떠있는 듯했던 몸의 감각이 멀어졌다. 허벅지 사이로 단단한 것이 비벼질 때마다 음부가 욱신거리며 조여들었다.
제발 이 끔찍한 쾌감이 사라지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강한 자극을 바라게 된다. 제 안의 모순된 욕망을 해소할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아리스텔라는 허리를 흔들었다. 팽팽하게 부푼 성기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 흣, 아아! ”
배에서 가슴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확 끼얹어졌다.
그 아찔한 감각과 함께 아리스텔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 ◇
“ 아아악! ”
“ 성녀님! ”
제 몸을 끌어안은 남자의 팔은 가늘었고 몸은 호리호리했다. 설마 아직도 헤시우스에게 안겨 있는 것인가. 아리스텔라는 비명을 지르며 남자를 뿌리쳤다.
“ 싫어! 내 몸에서 손 떼요! ”
필사적인 그녀의 저항에 조슈아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의지할 곳을 잃은 몸은 진료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딱딱한 침대에 부딪힌 등이 아팠다. 빛의 공동에서와는 달리 이곳은 중력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 허억, 헉……. ”
“ 성녀님. 진정하십시오. ”
“ 흐으. 조슈아……. ”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조슈아는 안경을 벗은 상태였다. 아니, 안경이 벗겨진 상태였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에 날아간 안경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 조슈아, 나……. ”
“ 처음엔 그저 피곤하거나 근심이 있어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군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녀의 몸에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 성녀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
과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일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꿈에서 과거를 엿보는 일은 간혹 있었고, 그것을 대강이나마 설명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설마 헤시우스가 나타날 줄이야.
“ 제가 성녀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문제 자체를 파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부디 말씀해주세요. ”
“ ……새를, 봤어요. ”
“ 새 말입니까. ”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심장은 쿵쿵 뛰고 호흡은 가빴다. 아리스텔라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숨을 고르면서 어떻게든 진정하려 애썼다.
더듬거리며 이어가는 말은 군데군데 끊겨 있어 순서도 뒤죽박죽이었지만, 조슈아는 진지한 눈으로 끈기 있게 들어주었다.
창가에 날아든 새에게 먹이를 주고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그날 밤 아리스텔라는 아론의 꿈을 꾸었다. 자신이 시종이라고 대답하며, 아리스텔라의 몸을 직접 구석구석 씻겨주었다. 그의 입술과 혀가 베푸는 애무에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다.
꿈에서 깨자 그녀의 신성력이 오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정원에서 새를 발견했을 때, 아리스텔라는 의식을 잃었다. 이번에는 신전에 온 첫날밤, 히페리온과 몸을 섞었을 때의 꿈을 꾸었다. 일말의 애정도 없이 난폭하게 그녀를 안는 남자의 눈빛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원망할 수는 없었다.
깨어나니 조슈아의 진료실이었다. 그와 이야기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품에 안겼다. 고개를 돌리니 창가에 앉은 하얀 새가 보였다.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꿈에서 헤시우스를 만났다. 생명과 평화의 신이자 여신 위그멘타르의 남편인 그는 아리스텔라가 아닌 그녀 안의 위그멘타르를 부르며 안으려 했다. 난생 처음 맛보는 신의 신성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그에 대한 거부감과 극한의 쾌락이 주는 중독에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깨어나고 현실을 인지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 헤시우스를 만나셨다고요. ”
“ 하얀 머리에 금색 눈의, 여자처럼 예쁘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는 교황 성하를 닮았는데……. ”
외양 설명을 늘어놓으니 어쩐지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느껴질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 아주 저질이었어요. ”
“ 예? ”
“ 사실은 헤시우스가 아닐지도 몰라요. 몽마가 꿈에 숨어든 것일지도……. ”
“ 성녀님. ”
조슈아가 손을 잡아왔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아무리 불안할 때라도 이 따뜻한 손을 잡으면 기분이 안정됐다. 조슈아가 치유마법에 능하다는 것은 비단 지식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 성녀님은 여신 위그멘타르를 모신 분. 하급 악마나 마수 따위에게는 홀리지 않는 정순한 신성력을 지닌 분입니다. ”
“ 하지만 처음 새를 본 다음날은 신성력이 오염되었잖아요. ”
“ 성녀님의 신성력을 오염시키는 것은, 당신보다 약한 마력을 지닌 존재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
“ 네? 그럼……. ”
헤시우스가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을 오염시켰다는 말인가. 무엇 때문에?
아리스텔라의 신성력을 정화하기 위해 히페리온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 아리스텔라의 몸에 감도는 신성력은 본래 히페리온의 것이었다. 이미 그녀의 몸에 적응하여 완전히 그녀의 것이 되어 있지만, 잠시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헤시우스가 아리스텔라에게 무언가를 하려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위그멘타르의 기억을 엿보도록 암시를 건다든가.
‘ 그러고 보니,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는 어떤 사이지? ’
생명의 신 헤시우스와 재앙의 여신 위그멘타르. 두 신은 부부이면서 일심동체였다. 바깥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 신 」이 헤시우스를 가리키는 것임은 아리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성서에는 헤시우스가 세계를 창조한 일과 위그멘타르가 재앙을 퍼뜨린 일은 나와있지만, 두 신이 부부라는 것 외의 사적인 정보는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았다.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동등한 지위인지 아닌지, 부부관계는 제대로 하는지 같은 것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신의 사생활―신에게 인간의 기준을 들이대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는 과연 서로 사랑했을까.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헤시우스는 어째서 위그멘타르를 인간 여자의 몸에 봉인했고, 위그멘타르는 어째서 남편인 헤시우스가 아닌 신전의 사제들과 몸을 섞었나.
“ 조슈아.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은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거라고 했잖아요. ”
“ 그랬지요. ”
“ 그렇다면 신도 질투를 하지 않을까요? ”
여신 위그멘타르는 질투의 여신이기도 했다. 그녀는 과연 무엇을 질투했을까. 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 신인 그녀가 보잘것없는 인간을 질투할까? 미모도 지식도 능력도 인간은 무엇 하나 신을 따라갈 수 없다. 심지어 뭇 사람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까지.
‘ 헤시우스는 나를…… 여신 위그멘타르를 계속 불렀다고 했어. ’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리스텔라를 끌어안고 애무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허락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과연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가 사랑 없는 부부였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
‘ 헤시우스는 위그멘타르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그멘타르는 헤시우스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그가 부르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섬기는 신전의 종들과 음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어쩐지 석연치가 않았다.
“ 생명의 신 헤시우스가 지켜보는 것을 알면서, 여신 위그멘타르가 이 신전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라……. ”
“ 가령 부부 사이가 안 좋아서 질투 유발을 하려고 했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요? ”
“ 어쩌면 이 신전에 저주가 내린 배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본래는 폐쇄된 신전이 아니라고 했다. 처음에는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신전이, 성녀가 음욕에 물들어 사제들과 관계하기 시작하면서 폐쇄되었다. 그리고 기록은 점점 더 성녀를 범하는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아리스텔라는 이것이 여신 위그멘타르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헤시우스는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성녀 아리스텔라에게 접촉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 ◆ ◇ ◆ ◇
흥분이 가라앉자 몸은 안정되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 몇 가지 기분을 안정시키는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녀를 마중 나온 에녹과 함께 아리스텔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 내일은 헤시우스와 위그멘타르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 ’
몸은 가뿐하고 머리도 맑았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범해지며 정신없이 신음했던 일이 거짓말처럼, 성욕도 일지 않았다. 그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쉬십시오, 성녀님.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
에녹은 침대를 정리하고 아리스텔라를 눕혔다. 조슈아로부터 성녀가 악몽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에녹은 발치의 조명등을 켠 뒤, 천으로 된 덮개를 덮어 빛을 죽였다.
“ 에녹. 저기……. ”
“ 예. ”
바로 일어서려던 에녹은 아리스텔라가 부르자마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두운 주홍색의 불빛이 에녹의 금색 눈동자를 비추었다. 헤시우스와 같은 황금색 눈동자지만, 에녹의 눈에서는 그렇게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은 나오지 않았다.
‘ 처음에는 훨씬 무서운 인상이었는데. ’
이제 에녹은 그녀의 신실한 종으로써 일하게 되었지만, 아리스텔라는 여전히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말을 해도 좋을지 확신이 없었다.
“ 제가 잠들…… 때까지만, 손을 잡아줄 수 있나요? ”
에녹도 피곤할 것이다. 의무가 없는 성녀와는 달리 그는 사제다. 그것도 지금은 수습사제의 몸이니 일반 사제보다도 바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성서 공부에 마법 연습, 비록 신관이었던 그는 다 알고 있는 것이라 해도 수습사제인 이상 복습은 불가결했다. 시종의 역할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공부를 해도 부족할 판에, 야간에도 근무를 시키는 일은 가혹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잠들면 또 헤시우스의 꿈을 꾸게 될 것 같아 아리스텔라는 두려웠다.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꿈에서 관계하게 되지 않을까 무서웠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안기는 건 꿈이라도 괴로운 일이다.
혼자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 예. 물론입니다. ”
귀찮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에녹은 깔끔하게 승낙했다. 그의 곧은 황금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거부감도 없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이 평온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 고마워요, 에녹. ”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와 함께 잠드는 일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