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207화 (20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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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이방인

[207]

“ 성녀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 네, 네? 왜요? ”

조슈아가 부르는 소리에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성녀님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요. ”

“ 아……. ”

“ 에녹으로부터 헛것을 보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역시 많이 피로하신 것이 아닙니까? ”

안경 너머로 보이는 연녹색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흐려졌다. 아리스텔라는 그 눈빛에 지레 가슴이 찔려 시선을 피했다.

“ 피곤한 건, 아니에요. ”

그랬다. 피곤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본 하얀 새가 환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새 때문이 아니다.

“ 조슈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나요? ”

“ ……기억하고 있습니다. ”

대미사 중에 몸이 달아올라 흥분해서 어쩌지도 못하고 난처해하던 그녀를 그가 진정시켜주었다. 난생 처음 남자와 섹스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아리스텔라는 조슈아를 받아들였다. 분명 그녀 스스로 받아들인 남자는 조슈아가 처음이니 기억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히페리온과의 첫날밤을 꿈속에서 체험하고 나자 조슈아와 마주보는 일이 민망해졌다.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가슴이 콕콕 쑤셨다.

참으로 이상하다. 조슈아에게 처녀를 주었다고 생색을 낸 것도, 자신을 책임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미안한 기분이 들까.

“ 만약, 그때……. ”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혹 조슈아에게 들릴까봐, 아리스텔라는 가슴께에 손을 모으고 어떻게든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 만약 그때 나를 찾아온 것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처음으로 받아들인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그것은 히페리온에게 진실을 듣게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조슈아의 상냥한 목소리와 따스한 체온이 주었던 안도감을 잊을 수 없다. 비록 자각조차 하기 전에 차여버렸지만, 그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를 찾아온 것이 다른 남자였더라면 어땠을까. 누가 찾아왔을지라도 욕구를 참지 못하고 결국 몸을 섞었을 것이다. 그때도 자신은 처음 몸을 섞게 된 남자를 특별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 나는 로이드와 크리스, 케인의 고백을 듣고 갈팡질팡했던 한심한 여자니까. 분명 누구와 몸을 섞었더라도 처음 받아들인 남자를 특별하게 생각해 그에게 마음을 주었겠지. ’

조슈아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다. 상황과 경우가 맞물려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진심이, 사랑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 울적해졌다.

“ 성녀님. ”

가늘게 떨리는 작은 어깨를 따스한 손이 감쌌다. 고개를 들자 조슈아의 얼굴이 보인다. 오후의 햇살처럼 평온한 표정. 그 나긋한 음성과 부드러운 미소가 좋았다.

“ 세계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신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

“ 네……? ”

“ 그것은 바로 과거를 바꾸는 일이지요. ”

과거가 쌓여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쌓여 미래를 만든다. 제아무리 지엄한 신이라 할지라도 이 거대한 흐름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 과거의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할 수는 있어도 과거,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

“ 조슈아. 나는……. ”

“ 저는 가장 큰 은총을 받았으니까요. ”

기억이 사라지거나 변질되더라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전대 신관들이 사실을 왜곡해서 기록했다 할지라도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꼭꼭 숨겨 감춰놓을 뿐.

“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

진실은 불변. 그 법칙이 있기에 신은 이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사소한 기억의 혼선이 빚어낸 우연일지라도 발생한 순간 진실이 되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각인된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억이 흐려지거나 죽어버린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 조슈아. ”

“ 예, 성녀님. ”

“ 나를 사랑하나요? ”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조슈아가 빙긋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보라색의 눈동자와 연녹색의 눈동자가 마주쳤다가, 스르륵 감겼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따스한 손이 등을 문지르는 감촉에 아리스텔라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조슈아는 언제나 그녀를 편안하게 해준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조용히 감싸주고,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준다.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슈아는 언제나 그녀가 가장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다.

“ 으음……. ”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조금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감았던 눈을 뜨니 조슈아의 얼굴이 보인다. 코끝을 비비며 생긋 웃고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맵고 싸한 약초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몸에 배인 그 냄새를 좋아했다.

“ 어라……. ”

조슈아의 품에 안겨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아리스텔라의 시선이 한 지점에 멈추었다. 창가에 하얀 새가 앉아 있었다.

“ 조슈아, 새가……. ”

“ 새요? ”

이번에도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 같다. 아리스텔라는 환각을 떨쳐내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지만, 그곳에 존재하는 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있는 새의 발밑에는 동그란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마치 새가 창틀에 앉아있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자신이 보는 현실과 조슈아가 보는 현실이 다르다면, 과연 진짜 < 현실 >은 어디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 ◇

정신을 차려보니 또다시 어둠 속이었다. 아리스텔라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바닥을 더듬어보았다. 여전히 만져지는 것은 없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높이의 바닥이 존재해 그 아래로는 몸이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은 대체 어떤 공간일까. 밀리아리아의 의식을 엿볼 때는 비록 어둠 속이라 한들 분명한 바닥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리도 들렸고 습기도 느껴졌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아무것도……? ’

뒤늦게 아리스텔라는 깨달았다. 어째서 이 어둠 속이 전혀 무섭지 않고 평온하게만 느껴지는지. 사위가 어둠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빛조차 없는 아득한 부재의 공간이었다. 마치 성서에서 말하는 < 태초의 세계 >처럼.

“ 으음, 분명 성서에서는 태초의 세계에 가장 먼저 빛이 생기고―. ”

딱 그 말을 마쳤을 때, 구석에서 반짝이는 빛이 생겼다. 작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그것은, 아리스텔라가 이곳에 와서 처음 발견했던 새였다. 그녀는 저 새를 붙잡으려다가 어딘가로 빠졌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히페리온과의 첫날밤을 엿보았다.

“ 저걸 붙잡아야 해.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다시 일어나 훨훨 날아다니는 하얀 새를 향해 달려갔다. 여전히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 내가 빛을 불렀을 때 빛나는 형체가 생기고, 저걸 새라고 인식했을 때 새로 보였어. ’

이곳이 과연 꿈인지, 무의식의 세계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공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확실히 인식하는 순간, 그녀가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루어진다.

‘ 가까이 다가온다고 생각하자. ’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던 새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하자, 정말로 새가 아리스텔라 쪽으로 다가왔다. 아리스텔라는 자신과 새 사이의 < 거리 >를 조금씩 지워나갔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새는 짹, 하고 울더니 아리스텔라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새에게서 나오던 하얀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커다란 형체로 변했다. 아리스텔라의 키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높은 그것이 그녀의 앞에 우뚝 서더니, 밝은 빛이 빛나는 형상을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해나가듯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 교황 성하……? ’

아리스텔라는 눈가를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닮긴 했지만, 그는 교황 발레리아누스가 아니었다. 발레리아누스는 구불거리는 은발의 소유자였지만 그는 긴 백발의 소유자였다. 얼핏 키가 큰 여자처럼 보이면서도 막상 하나하나 살펴보면 생김새는 남자다웠다. 섬세하면서도 수려한 이목구비에 긴 속눈썹, 색이 엷은 입술.

조각가가 하얀 대리석을 깎아내고 아직 색을 입히기 전의 모습처럼 새하얗기만 한 그는, 이제까지 그녀가 만나온 모든 이들을 닮은 것 같으면서도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새하얀 옷을 입고 있지만 그것은 성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사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 당신은 누구죠?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남자가 눈을 떴다. 오로지 하얗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황금색이었다. 그 눈빛이 마치 태양 같다고 생각한 순간, 강렬한 빛에 눈이 멀 것 같아서 아리스텔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이제야 와주었구나. ”

높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리스텔라의 뺨을 감싸 자신에게로 향한다. 뿌리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굉장히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인데도 남자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 누, 누구세요?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남자가 웃는다. 한낮의 태양 같다고 생각했던 황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마치 석양이 지는 하늘 끝자락의 태양 같다.

“ 아무리 불러도 네가 답해주지 않아서 쓸쓸했단다. ”

“ 당신 누구냐고요! ”

“ 지쳐서 다 포기해갈 때쯤, 네가 나를 알아봐 주었지. ”

남자는 아리스텔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느릿한 목소리는 입술을 떠나도 사라지지 않고 아득한 어둠 속을 배회한다. 잔잔한 물에 파문이 일듯, 어둠 속에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는 모를 거란다. ”

“ 그러니까 대체 누구……. ”

“ 너는 그렇지 않았느냐? ”

눈이 마주쳤다. 찌를 듯이 강렬한 빛을 내는 황금색의 눈동자가 빛났다. 눈이 멀지도 모르니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리스텔라가 고개를 돌리려 해도 남자의 손은 그녀가 저를 외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내가 그립지 않았느냐, 나의 반려야. ”

반려. 그 말에 아리스텔라는 홀린 것처럼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금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이 강렬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 내 이름을 불러다오. ”

아리스텔라는 남자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지배를 벗어난 몸은 저절로 입술을 움직여 하나의 이름을 뽑아내었다.

“ ……헤시우스. ”

그 순간, 어둠뿐이었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찼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원고료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초롷 님, 홍채영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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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물인지라 종이책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소장본을 원한다는 분이 계셔서 수요조사를 하려 합니다.

소장본을 원하시는 분은 코멘트나 쪽지로 말씀해주세요. 최소수량이 모이면 소장본 제작에 들어갑니다.

다만 소량인쇄인데다, 분량이 상당한지라 가격대가 꽤 될 것 같습니다.

시기상 이북이 먼저 발매되니 소장본 수요조사는 종이책이 필요한 분만 참여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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