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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이방인
[206]
“ 지금 성녀님께서 말씀하시는 새가,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
“ 안 보인다고요? ”
아리스텔라가 움찔 놀라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 위에 앉아있는 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스텔라가 바라보면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작게 날개를 파닥댈 뿐, 날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새를 방에 들이고 함께 잠든 다음날, 몸이 무겁고 뭔가 이물질이 낀 것처럼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신성력이 오염되어 히페리온이 직접 치료해주었다.
“ 설마 이 새가……? ”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기우뚱.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기울어지더니, 가장자리에서부터 새카만 어둠이 시야를 잠식해간다. 에녹이 다급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는 듯 입모양을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정적에 휩싸였다.
◇ ◆ ◇ ◆ ◇
아리스텔라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둠 속에 홀로 서있었다. 아니, 과연 눈을 뜬 것일까? 사위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텔라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서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뒤, 손을 휘저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 꿈…… 일까? ’
아리스텔라는 그다지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었지만, 성녀가 된 후로는 종종 꿈을 꾸었다. 전대 성녀의 기억을 엿보기도 하고, 꿈에서 아론을 만나기도 했다.
사위가 어두운 것을 보니 또 밀리아리아의 의식에 들어온 것일까.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이라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무언가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분명 서있는데도 바닥을 딛고 있다는 느낌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텅 빈 공간임에도 이상하게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신전에 온 후로 어둠은 미지이며 공포의 대상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녀에게 이 어둠은 참으로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 여긴 어떤 공간일까. ’
아리스텔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가볍게 걸음이 움직인다. 어쩌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너무 어두워서 뭔지 모르겠어. 조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어라? ”
반짝이는 하얀 것이 눈앞에서 슥 지나갔다. 아리스텔라는 얼른 빛이 지나간 자리를 눈으로 좇았다. 하얗고 반짝이는 것이 작은 곡선을 그리며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나비일까? 아니, 나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크고, 날갯짓에 힘이 느껴진다.
“ 새……. ”
하얗게 반짝이며 움직이는 형상은 정확한 형태가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리스텔라는 그것을 < 새 >라고 생각했다.
그 확신을 가지자마자, 하얗게 반짝이던 형상이 진짜로 < 새 >가 되었다.
푸드덕―
작은 새가 날갯짓하며 어딘가로 날아간다. 아리스텔라는 새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쫓아갔다. 새가 어디로 날아가는지는 모른다. 왜 그 새를 쫓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 새를 보는 순간, 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참을 뛰어도 새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평행선을 지나는 것처럼 항상 같은 거리를 유지할 뿐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아리스텔라는 성의 자락을 움켜쥐고 보폭을 크게 벌렸다.
“ 하아, 하아……. 앗! ”
갑자기 자세를 바꾼 탓일까? 아리스텔라는 제대로 발을 내딛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바닥도 존재하지 않는데 마치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몸이 뒤집히며 아래로 떨어진다.
새가 멀어진다.
쿵―
“ 아윽! ”
등에 충격이 달렸다. 단단한 바닥이 느껴진다. 아리스텔라는 몸을 일으켜 아픈 등을 쓰다듬으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제지당했다.
“ 아, 누구……. ”
남자는 아리스텔라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바닥에 눕히고 손목을 억누른 뒤, 재빨리 성의의 밑단을 걷어 올렸다.
“ 꺄아, 뭐 하는 거예요! ”
당황한 아리스텔라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뜨는 순간, 어둠이 사라지고 흐릿한 빛이 주위를 감쌌다. 이어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히페리온……? ”
평소 자신을 바라보던 따스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아니다. 히페리온의 눈빛은 날카롭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신전에 처음 도착해 마주친 그날처럼.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 히페리온, 왜……. ”
잔뜩 찌푸린 얼굴, 날카로운 눈빛, 조금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얼굴. 어째서 그가 이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지 아리스텔라는 알 수가 없었다.
“ 욕망을 잠재우면, 되는 거라고 하셨지요? ”
“ 네? ”
“ 당신을 이 신전 안에 가두는 것이 신관인 저의 역할. 세상에 재앙을 퍼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도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지금 시각은 밤일까. 그녀가 꿈을 꾸는 동인 밤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것도 꿈일까.
“ 저는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
냉정한 말과 함께, 히페리온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 아읏! ”
비좁은 안쪽을 억지로 벌리며 들어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아리스텔라는 고통스러운 듯이 신음했다. 하지만 히페리온은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그녀의 속살을 빠른 속도로 문질러 비볐다. 마찰감에 음부가 시큰거리면서 입구가 쓰렸다.
“ 아, 아파……! ”
갑자기 몸을 섞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만져주는 것이 쾌감이 아닌 고통을 수반하는지, 이토록 낯설기만 한지 알 수가 없었다.
‘ 히페리온, 어째서……? ’
아리스텔라는 헉헉거리면서 히페리온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에 닿자,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 불쾌감 어린 반응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손을 되돌렸다. 그는 살짝 고개를 털더니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쳤다.
“ 아, 히페리온! 잠깐……, 아아악! ”
그 다음 순간, 아리스텔라는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쩌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히페리온을 받아들인 속살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것은 고통 때문일까, 쾌감 때문일까.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음부가 뜨겁고 시큰거렸다. 절로 눈물이 샘솟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안을 마구잡이로 범하는 흉포한 남자의 성기는 멈추지 않았다.
“ 아, 아아아! ”
“ 크읏……! ”
히페리온이 얼굴을 찌푸리며 긁힌 신음을 냈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피하고 싶은 욕망에 휘둘려 괴로워하는 표정에 아리스텔라는 홀린 것처럼 헐떡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곧고 단정하기만 하던 방패가 사정없이 깨져나가며 드러나 버리는 날것의 쾌감. 안을 꿰뚫리는 듯한 소름끼치는 감각과 고통 속에서 본능적인 지배욕이 일었다.
서로 사랑해서 하는 섹스가 아니면 싫다고 말해놓고서, 아리스텔라는 히페리온의 괴로운 얼굴을 보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일말의 배려도 없이 제멋대로 안을 짓치는 격렬한 행위에 오싹오싹한 쾌감이 일었다.
어째서 히페리온이 이런 강제적인 행위를 일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난폭한 행동에 어째서 자신이 흥분하고 있는지도.
< 성녀님이 신전에 오신 첫날 밤, 저는 당신을 범했습니다. >
히페리온이 아리스텔라에게 진실을 고하던 밤.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토해내듯 고백했던 말이 떠오른다.
‘ 설마, 이건……. ’
아무도 없는 기도실. 어두운 기도실을 밝히는 흐릿한 불빛. 계율을 깨고 여인과 몸을 섞게 된 사제의 고통스러운 얼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히페리온과의 첫날밤.
아리스텔라는 여신 위그멘타르와 소통하지 못한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신을 봉인한 < 산 제물 >이었던 역대 성녀들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신 위그멘타르는 자신을 봉인했던 모든 성녀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텔라는 전대 성녀 밀리아리아의 기억을 꿈의 형태로 접할 수 있었다.
왜 눈치채지 못했나. 여신 위그멘타르가 보여주는 꿈을 통해 전대 성녀의 기억에 접촉할 수 있다면, 자신이 위그멘타르에게 의식을 빼앗겼을 때의 일 또한 꿈을 통해 접할 수 있다는 것을.
“ 아! 아아아아앙! ”
불이 붙는 듯한 고통을 강렬한 쾌감이 뒤덮었다. 두 사람이 함께 절정에 올랐다. 사랑은커녕 서로에 대한 일말의 호감도 없이, 단지 욕망만을 추구하기 위한 짐승 같은 섹스는 그렇게 끝났다.
◇ ◆ ◇ ◆ ◇
“ 읏, 하으……. ”
“ 성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
따스한 손이 이마를 감쌌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깜박이며 시야를 분별했다. 부드러운 갈색머리에 연녹색 눈동자. 늘 조용히 그녀를 감싸주던 남자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 몸은 괜찮으십니까? 안 좋은 곳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 으응, 조슈아……? ”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가가 살짝 풀어졌다. 아리스텔라의 상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한 조슈아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다기에 걱정했습니다. ”
“ 미안해요……. ”
“ 사과하지 마세요, 성녀님. 당신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은 저희 잘못입니다.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딱딱한 침대에 새하얀 천장. 남향의 창문에서 밝은 빛이 들어오는 작은 방. 아리스텔라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 조슈아의 진료실이다.
“ 아론…… 에녹이 날 데려왔나요? ”
“ 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기에,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니 우선은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
“ 다행이네요……. ”
또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면 너무 미안하다. 아리스텔라는 작게 기지개를 켠 후 몸을 일으켰다. 조금 기운이 없지만 어지럽지는 않았다. 다행히 신성력이 오염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 조슈아.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나요? ”
“ 한 시간 정도입니다. ”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문득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첫날밤을 엿보게 될 줄이야.
‘ 엿본 것도 아니지. 직접 겪었으니까. ’
제 안을 난폭하게 비비던 성기의 감촉이 생생해서 아리스텔라는 얼른 고개를 털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떠올려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히페리온은 그때의 일을 사과했고 아리스텔라는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생각보다 더 난폭한 행위였다고 해서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성녀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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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206,207화 연참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