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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이방인
[205] 신비로운 이방인
본래 신을 찬양하는 미사에는 은총을 받은 사제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녀 아리스텔라가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미사실 좌석의 절반을 성기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누군가 특별히 좌석 배정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사제들은 사제들끼리, 성기사는 성기사들끼리 모여 앉았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그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하얀 성의의 사제들이 미사실의 왼쪽을, 은색의 갑주를 걸친 성기사들이 미사실의 오른쪽을 차지하는 정돈된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성녀의 명으로 성기사와 사제들이 한데 섞여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 저기, 혼자서 너무 자리를 많이 차지하시는 거 아닙니까? ”
평소에는 여유롭던 자리가 옆자리의 덩치 때문에 비좁아지자, 크리스는 제 옆에 앉은 로이드에게 불평했다.
“ 누가 일부러 그러나. 내 몸이 커다란 걸 어쩌라고.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둘이지. ”
로이드가 반대편에 앉은 케인을 바라보자, 케인이 크리스에게 사과하며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 미안하군. 내가 끝 쪽에 앉으마. ”
성기사의 체구는 사제보다 큰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로이드와 케인은 특히 더 그랬다.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사이에 앉게 된 크리스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 그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제비뽑기에서 최악의 패를 뽑았기 때문이다.
‘ 좌석을 제비뽑기로 정하자고 한 게 대체 누구야! ’
크리스는 필사적으로 자리를 바꿔줄 사제를 찾았으나 로이드와 케인 사이에 앉고 싶어 하는 사제가 있을 리 없었다. 원망스러운 노엘은 신관직에서 물러난 아론, 에녹 대신 미사의 보조를 해야 한다며 혼자 단상으로 내뺐다.
평소에는 다섯이 앉던 긴 의자에 딱 셋이 앉았을 뿐인데 비좁게 느껴졌다. 팔을 움직여 성서를 넘기기도 불편했다. 닿기도 싫은 덩치가 양 옆에 앉아있으니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 아, 빨리 미사 끝났으면. ’
지위도 없고 권력도 없는 수습사제 크리스는 어서 봄이 되어 서품을 받고 정식 사제가 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 ◆ ◇ ◆ ◇
“ 에녹. 제단의 초를 켜는 건가요? ”
“ 예. 가장자리부터 불을 붙여가면서 마지막에 중앙의 큰 초에 불을 붙입니다. ”
본래 제단의 초를 켜는 것은 평사제의 지시아래 수습사제들이 하는 일이었다. 신관에서 물러나 수습사제로 돌아온 에녹은 직접 제단의 초에 불을 붙였다.
아리스텔라는 에녹의 관리인으로서 그가 제대로 수습사제의 일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체구가 큰 에녹의 손에 들린 초는 무척 작고 가느다란데, 그는 촛농 한 방울 떨어뜨리는 일 없이 능숙하게 초에 불을 붙여나간다.
“ 굉장하다……. ”
“ 대단할 것 없는 일입니다. ”
“ 그래도 내 눈에는 대단해 보이는걸요. ”
아리스텔라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에녹은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는, 중앙의 초에 불을 붙였다. 초에 모두 불을 붙인 후에는 손에 들고 있던 양초에 덮개를 덮어 불을 끈다. 입으로 불어 끄지 않는다는 점이 일종의 격식일 것이다.
“ 에녹. 오늘 성서를 낭독하는 건 누구죠? ”
“ 원래는 제 차례였습니다만, 신관직을 그만둔 탓에 오늘은 노엘 사제에게 부탁했습니다. ”
“ 노엘이요? 잘할 수 있을까……. ”
목소리가 크고 힘이 있으면서도 또렷한 에녹과는 달리, 노엘의 목소리는 약간 높고 카랑카랑한 편이다. 목소리에 신성력을 실어 읊으면 미사실 끝까지 낭독하는 소리야 닿겠지만, 괜찮을까. 아리스텔라는 걱정이 되었다.
“ 성녀님. 미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
“ 아, 네. 알았어요. ”
히페리온이 중앙에, 조슈아가 그의 왼편에 서자 아리스텔라는 조금 떨어져 오른편에 바로섰다. 평소와는 달리 사제와 성기사들이 섞여 앉았기 때문일까, 분명 같은 인원수일 텐데도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고 복작복작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리스텔라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복작거리는 상황을 좋아했다.
‘ 후후. 마을 집회 같은걸. ’
신전의 주인이라고 하면 상당히 거창하게 들리지만, 일흔 명의 청년들을 지도하는 마을 학당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 긴장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와 성기사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정오 미사를 시작하겠습니다. ”
그날의 정오 미사는 어수선한 건지 엄숙한 건지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 ◆ ◇ ◆ ◇
정오 미사를 마치고 나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사제들은 성서 공부를, 성기사들은 오후 순찰에 나선다. 아리스텔라의 명령으로 성기사들은 두 조로 나뉘어 교대로 한쪽은 순찰, 한쪽은 성서 공부에 들어갔다. 사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 같이 다니면서 친해지면 좋겠는데, 어쩐지 다들 표정이 좋지 않네요. ”
아리스텔라는 굳은 얼굴로 사제들을 데리고 순찰을 나가는 이자크와 역시 굳은 얼굴로 그를 따라가는 사제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제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애도했다.
“ 붙어 다니면 친해질 거라는 건 너무 안이한 생각일까요? ”
“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 기간이나 거리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어울리려는 노력입니다. ”
아론, 과거의 에녹은 교황청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려 했다. 절친한 친구가 아니라 신뢰를 주는 동료가 되는 방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에녹을 신관으로 추대하고, 에녹을 따라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으로 온 사제들은 신관의 지위를 내려놓고 수습사제가 된 에녹을 지금도 존중하고 있다. 이 정도의 신뢰를 쌓는 일은 크게 어려운 일도, 큰 행운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끈질긴 노력이 필요할 뿐.
“ 친해져야만 하는 계기가 생긴다면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
“ 친해져야 하는 계기라……. ”
친구를 만들면 상을 준다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칭찬 스탬프를 찍어 선물을 준다거나 하면 어떨까.
그런 유치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텔라는 회랑에 멈춰 서서 멀리 정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무 아래의 수풀이 살짝 흔들리더니, 하얀 새가 파드득 날갯짓하며 위로 날아올랐다.
“ 어머나. 또 새가 날아든 모양이네요. ”
“ 새요? ”
“ 네. 전에도 제 방에 들어온 적이 있거든요. ”
아리스텔라가 회랑을 지나 정원으로 나아가자 에녹이 뒤를 따랐다. 수풀 쪽으로 다가가 커다란 나무를 살피니, 굵은 가지 위에 하얀 새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녹의 꿈을 꾸기 전날, 방에 날아들었던 하얀 새다.
“ 신전에서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역시 누군가 기르는 새일까요? ”
“ 사제 가운데 새를 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
“ 그럼 성기사분이 기르는 새일지도요. ”
아리스텔라가 손을 높이 올리고 입으로 새소리를 내자,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새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치를 보더니 푸드득, 날아서 그녀의 손 위로 내려왔다.
“ 여전히 사람을 잘 따르네요. 이런 걸 보면 야생에서 살던 새는 아닐 것 같은데. ”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 내려다보면, 손바닥에 앉은 하얀 새는 아리스텔라를 바라보며 짹, 하고 작게 운다.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 이렇게 빛깔이 고운 것을 보니 주인이 관리를 잘 해주나 보네요. 먹이도 잘 먹는 것 같고……. ”
“ 성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
에녹이 곤혹스러운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보고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성기사들이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온천으로 향했던 것을 보면 우선 신전에서 말을 키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가 원한다면 어떤 동물이든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에녹은 저렇게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나. 아리스텔라는 알 수가 없었다.
“ 에녹. 새를 싫어하나요? ”
“ 짐승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
“ 으음. 억지로 좋아하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인상 풀어요. 새는 귀엽잖아요. ”
아리스텔라는 제 손 위의 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리스텔라의 손이 기분 좋은지, 새가 가볍게 짹, 하고 울면서 그녀의 손에 제 보드라운 깃털을 문질렀다.
“ 우후후. 정말 애교가 많네. 주인이 잘 가르쳤나 보구나. ”
이곳이 그녀의 방이었다면 빵이나 과자라도 주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사방이 나무뿐인 정원에서는 새에게 줄 먹이가 없다.
‘ 어떻게 할까. ’
어차피 오후에는 정해진 일정이 없고, 성기사들은 두 조로 나뉘어 성서 공부와 순찰을 나섰다. 그렇다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리스텔라가 잠시 돌봐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에녹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아리스텔라를 바라보고 있다. 성녀의 앞이라 예의를 차렸을 뿐 사실은 새를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가 에녹에게 날아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테라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 에녹. 남쪽 탑의 주방으로 가요. ”
“ 주방에 말입니까? ”
“ 네. 주방에 가면 남은 빵이 있지 않을까요? 이 아이에게 간식을 주고 싶어서요. ”
아리스텔라가 손을 올려 새를 들어보이자, 그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한 발 물러났다.
“ 에녹. 새를 꺼리는 거라면 제가 혼자 다녀올까요? ”
“ 아뇨, 성녀님. 그러니까 제 말은……. ”
에녹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정말로 새를 꺼리는 것일까.
새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사과하려고 했는데, 에녹이 먼저 말을 꺼냈다.
“ 지금 성녀님께서 말씀하시는 새가,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
============================ 작품 후기 ============================
에필로그 시작합니다. 약 3~4챕터 정도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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